서예계소식

‘절대 거장’ 안진경의 글씨 기운에 압도당하다

‘절대 거장’ 안진경의 글씨 기운에 압도당하다

 

 

도쿄국립박물관 ‘안진경 특별전’ 리뷰

‘한석봉’ ‘김정희’ 명필들의 교과서
‘왕희지’ 능가한 한중일 서예사 거장
서체 변천부터 후세 영향까지 망라
대만 고궁박물관·중국 소장품 등
동아시아 글씨 문화 보물 한자리


글씨의 품격과 멋은 몰라도 된다. 느낌 말고는 거리낄 게 없었다.

 

도쿄국립박물관의 드높은 천장과 벽, 사이 공간은 온갖 기운을 내뿜는 전통 한문 글씨들의 대경연장이 되었다. 한중일 서예사의 가장 큰 거장이라는 1600년 전 왕희지를 1400년 전 당나라 초 대가들이 추앙하며 본떠 쓴 명품 글씨들과, 1300년 전 다시 왕희지를 극복하고 나온 안진경의 친필 글씨들이 지금 쓴 듯 활기를 내뿜으며 눈앞에 펼쳐졌다. 한자의 시작인 거북등딱지 갑골문의 문자들이, 글씨 예술이 가장 찬란했던 당나라 시대 태종 현종 황제들이 남긴 대작 글씨들이 숲처럼 버티고 서있다. 당나라 초기 ‘3대가’ 저수량·우세남·구양순과 송나라 거장 소동파·미불, 명·청대 거장 동기창·조지겸의 필적들도 콕콕 눈가에 박혀서 들어온다. 역사를 가로지르는 강렬한 그네들 글씨의 기운이 눈과 마음을 훑고 지나가면서 수천년 전부터 수백년 전까지 글씨를 쓴 예술가, 선비들의 내면을 어림하게 해준다. 한자로 된 서예 글씨가 어떻게 글자 모양이 바뀌고 높은 경지를 추구해갔는지를 내부에 들어서면 스스럼없이 직감적으로 깨닫게 되는 대향연이다.

 

지난 1월16일부터 일본 도쿄 우에노 공원 경내의 도쿄국립박물관 헤이세이관(평성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안진경’은 글씨 문화사의 거대한 덩어리 그 자체다. 5천년 역사를 지닌 한자가 중국 역대 명필들의 걸작들을 통해 첩첩산중 혹은 장강의 기세로 뻗어 나가는 동아시아 서예사의 대하 같은 흐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세계 최고의 서예컬렉션을 보유한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의 명품들과 일본에 산재한 중국 명글씨 컬렉션들을 모아 차린 이번 전시는 규모와 기획, 깊이 등에서 앞으로 두번 다시 보기 힘들 동아시아 서예사의 찬란한 보물 잔치다.

 

주인공은 8세기 당나라 시대의 명필로 훗날 안진경체를 닦아 중국, 조선과 일본의 서예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 절대 거장 안진경(709~785). 당나라 현종 때 인물인 안진경은 남북조 시대 글씨의 성인으로 꼽히는 왕희지(307~365)의 전아하고 유려한 서체와 달리, 힘찬 박력과 풍성한 양감, 비장한 조화를 겸비한 글씨로 동아시아 서예의 전범이 되었다. 한국인에게는 낯설 것 같지만, 천하 명필이라고 말하는 조선시대의 한석봉, 김정희, 이광사 같은 이들에게 안진경은 반드시 그의 글씨를 따라 쓰며 배워야 할 교과서 같은 존재였다. 조정의 신하로 숱한 모함에 시달리며 지방 태수를 전전했지만 안녹산의 난으로 나라가 위급에 처하자 분연히 의병을 이끌고 일어나 반란을 막았고 그런 애국충절의 정신을 독창적인 글씨체로 체화시키기까지 했으니, 그는 예술사에서 작품과 사회적 실천이 일치했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로 추앙받았다.
 

‘왕희지를 넘어선 대가’란 부제가 붙은 이 전시는 글씨 서체의 미학을 보편화하고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안진경 작품 연대기를 ‘제질문고’ 외에 ‘자서첩’, ‘소초천자문’, ‘천복사다보탑비’ 등 걸작 유묵을 통해 보여준다. 선이 굵고 중후하면서도 충실한 감정표현에 눈떠 보는 이들에게 강직하고 절절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안진경 글씨의 특징이다.

 

단연 눈길을 끄는 걸작은 ‘제질문고’란 안진경의 서첩이다. 755년 일어난 안녹산의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고립돼 살해당한 조카를 위해 쓴 이 제문은 피붙이를 잃은 비통한 심정을 녹여 넣고 있다. 왕희의 <난정서>와 더불어 서예사에서 최고의 글씨 보물로 손꼽는 걸작이지만, 얼핏 보면 곳곳에 휙휙 수정 선을 내려긋고 지저분한 고친 글자 투성이의 졸문처럼 보인다. 하지만, 적들에게 살해당한 조카의 영령을 생각하며 써내려간 초고 성격의 심경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살펴볼수록 감동에 젖게 된다. 처음엔 다소곳하게 썼다가 죽은 조카를 회상하며 적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끓이는 대목 곳곳에서 수정하고 거칠게 흘려 쓴 글귀들이 등장하면서 1300년 전 거장의 격앙된 감정, 내면을 그대로 느끼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대만 고궁박물원 소장품으로 중국 본토 누리꾼이 천이백년 묵은 보물을 본토도 아닌 일본에 대여해주었다고 비난 댓글을 쏟아낼 만큼 화제를 모았던 이 작품은 보려면 오랫동안 줄을 서야 한다.
 

특별전의 구성은 절묘하다. 갑골문과 고대 금석문 글씨들이 나오는 1장 ‘서체의 변천’부터 핵심인 2장과 3장의 당나라 시대 안사의 난과 안진경 활약을 배경으로 한 글씨들, 4장 일본의 당나라 시대 글씨 수용, 5장 송나라 때 안진경에 대한 평가를 거쳐 6장 후세의 영향으로 전시가 마무리된다. 시종 안진경의 진작을 주된 뼈대로 삼으면서도 고대 갑골문부터 명 청대까지 역대 서체의 변천과 역대 명필의 필적 비교 등을 통해 중국 서예사의 장강 같은 흐름을 한눈에 보여준다. 8세기 당나라 현종이 중국 산둥성의 명산 태산에 직접 찾아가 절벽에 새긴 예서 글씨 대작인 ‘기태산명’은 탁본을 거대한 두루마기 형태로 풀어 전시장 중앙에서 가장 큰 글씨작품으로 나왔다. 속필로 마구 흘려 쓰는 미친 초서란 뜻의 광초로 일가를 이루었던 당나라 승려 회소의 <자서첩>도 전시에 함께 나와 안진경체와는 또다른 묘미를 일으킨다. 거장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서예의 역사적 흐름까지 일목요연하게 펼쳐놓은 구성의 재치, 일본 학계의 깊고 풍성한 중국학 연구 수준과 수집역량도 혀를 내두르게 한다. 중국과 일본의 고대, 중세 서예작품들만 소개되고, 김생, 탄연 등의 한반도의 서예사는 아예 배제된 점이 눈에 걸린다.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서예사 교류에 미진했던 국내 학계의 한계를 절감하게 하는 전시이기도 하다. 24일까지.

 

도쿄/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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