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

中庸章句序(중용장구서)



中庸章句序(중용장구서)

주희(朱熹, 1130년 ~ 1200년)

남송(南宋)의 유학자로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 출신이다. 자는 원회(元晦)이고 호는 회암(晦庵)이며 별호는 자양(紫陽)이다. 젊은 시절에는 불교와 노자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사사(師事)하면서 유학(儒學)으로 돌아왔다. 사변철학(思辨哲學)과 실천윤리(實踐倫理)를 확립하여 북송 이래의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하였다.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작품 설명

주희(朱熹)가 60세에 ≪중용장구≫를 완성하고 쓴 서문으로, 상고(上古)에서 당시(當時)까지 도학(道學)을 전한 성현(聖賢)의 계통을 밝혀 도학의 틀을 확립한 내용이다. 글의 요지는, 요임금에게서 비롯된 유학의 도통(道統)이 여러 성인(聖人)을 거치면서 공자에 이르렀는데 공자 사후에 도통이 끊겼고 이것을 염려한 자사(子思)가 유학의 도를 밝히고 도통을 명시한 것이 이 책[≪중용(中庸)≫]이라는 것이다. 이어 송대(宋代)에 이르러 정부자(程夫子)형제가 도통을 회복시켰고 이것을 자신이 이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작품 내용

中庸은 何爲而作也오. 子思子1)가 憂道學之失其傳而作也시니라. 蓋自上古로 聖神繼天立極하니 而道統之傳이 有自來矣라. 其見於經則允執厥中者이니 堯之所以授舜也요 人心은 惟危하고 道心은 惟微하니 惟精惟一이라사 允執厥中者2)는 舜之所以授禹也라. 堯之一言이 至矣盡矣로대 而舜이 復益之以三言者는 則所以明夫堯之一言을 必如是而後에 可庶幾也라.

≪중용(中庸)≫은 무엇 때문에 지었는가? 자사(子思) 선생께서 도학(道學)이 전승(傳承)을 잃을까를 염려하여 지은 것이다. 상고(上古)시대로부터 성인(聖人)과 신인(神人)이 하늘의 뜻을 이어 표준을 세웠으니 도통(道統)의 전승이 유래(由來)가 있게 되었다. 그것이 경전(經典)에 나타난 것은,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잡아라.’라고 한 것이니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전한 것이고,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은미(隱微)하니, 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도를 잡는다.’라고 한 것은 순(舜)임금이 우(禹)임금에게 전한 것이다. 요임금의 한 마디 말씀이 지극하고도 극진한데, 순(舜)이 다시 세 마디 말씀을 더한 것은 요(堯)의 한 마디 말씀을 반드시 이와 같이 한 뒤에야 거의 이룰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蓋嘗論之컨대 心之虛靈知覺은 一而已矣어늘 而以爲有人心3)道心4)之異者는 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하고 或原於性命之正하여 而所以爲知覺者不同이라. 是以로 或危殆而不安하고 或微妙而難見耳라. 然이나 人莫不有是形故로 雖上智라도 不能無人心하고 亦莫不有是性故로 雖下愚라도 不能無道心하니 二者가 雜於方寸之間어늘 而不知所以治之면 則危者愈危하고 微者愈微하여 而天理之公이 卒無以勝夫人欲之私矣리라.

시험삼아 논해보건대, 마음[심(心)]이 허령(虛靈)하고 지각(知覺)하는 것은 하나일 뿐인데,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다름이 있다고 한 것은, 그것이 혹은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나오고, 혹은 성명(性命)의 올바름에서 근원하여, 지각하게 되는 것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혹은 위태로워 안정되지 못하고, 혹은 미묘(微妙)하여 보기가 어려울 뿐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 육체(肉體)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가 없으므로 비록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인심(人心)이 없을 수 없고, 또한 이 본성(本性)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가 없으므로 비록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도심(道心)이 없을 수 없으니, 이 두 가지가 사방 한 치의 마음속에 섞여 있는데 다스릴 줄을 모른다면, 위태로운 것[인심(人心)]은 더욱 위태로워지고 은미한 것[도심(道心)]은 더욱 은미해져, 공평한 천리(天理)가 끝내 사사로운 인욕(人慾)을 이길 수 없게 된다.

 

精則察夫二者之間而不雜也요 一則守其本心之正而不離也니 從事於斯하여 無少間斷하여 必使道心으로 常爲一身之主하고 而人心으로 每聽命焉이면 則危者安하고 微者著하여 而動靜云爲가 自無過不及之差矣리라.

정밀하게 하면 두 가지의 차이를 살펴 섞이지 않게 하고, 한결같이 하면 본심(本心)의 올바름을 지켜 벗어나지 않게 되리니, 여기에 힘써서 조금도 단절됨이 없어 반드시 도심(道心)으로 하여금 항상 일신(一身)의 주인이 되게 하고, 인심(人心)으로 하여금 매번 명령(命令)을 듣게 한다면, 위태로운 것은 안정되고 은미한 것은 현저해져, 일상의 모든 행위가 저절로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잘못이 없게 될 것이다.

夫堯舜禹는 天下之大聖也요 以天下相傳은 天下之大事也라. 以天下之大聖으로 行天下之大事하시되 而其授受之際에 丁寧告戒가 不過如此하니 則天下之理가 豈有以加於此哉리오. 自是以來로 聖聖이 相承하시니 若成湯文武之爲君과 皐陶伊傅周召5)之爲臣이 旣皆以此而接夫道統之傳하시고 若吾夫子는 則雖不得其位나 而所以繼往聖하시고 開來學은 其功이 反有賢於堯舜者라.

요(堯), 순(舜), 우(禹)는 천하(天下)의 큰 성인(聖人)이고, 천하(天下)를 상대에게 전한 것은 천하(天下)의 큰 일이다. 천하의 큰 성인(聖人)으로 천하의 큰 일을 행하면서, 그분들이 주고받을 때에 간곡하게 일컬은 것이 이와 같음에 지나지 않았으니, 천하의 이치가 어찌 여기에 더할 것이 있겠는가. 이 후로 성인(聖人)과 성인(聖人)이 서로 이었으니, 성탕(成湯), 문왕(文王), 무왕(武王) 같은 인군들과 고요(皐陶), 이윤(伊尹), 부열(傅說), 주공(周公), 소공(召公) 같은 신하들이 이미 모두 이것을 가지고 도통(道統)의 전승을 이었고, 우리 공자(孔子)의 경우는 비록 그 지위를 얻지 못하셨으나 이전의 성인(聖人)을 잇고 뒤의 후학(後學)들을 열어 주신 것은 그 공(功)이 도리어 요순(堯舜)보다 훌륭함이 있다.

然이나 當是時하여 見而知之者는 惟顔氏曾氏之傳이 得其宗하시고 及曾氏之再傳하여 而復得夫子之孫子思하여는 則去聖遠而異端起矣라. 子思가 懼夫愈久而愈失其眞也하사 於是에 推本堯舜以來相傳之意하고 質以平日所聞父師之言하여 更互演繹하여 作爲此書하여 以詔後之學者라.

그러나 이 때에 (공자의 도를) 직접 보고 알았던 이로는 오직 안자(顔子)와 증자(曾子)의 전승만이 그 으뜸을 얻었고, 증자(曾子)가 다시 전하여 또 부자(夫子)의 손자 자사(子思)를 얻게 되어서는, 성인(聖人)과 거리가 멀어짐에 이단(異端)이 일어났다. 자사는 그것이 더욱 오래되면 더욱 그 참됨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이에 요순(堯舜) 이래로 상대에게 전한 뜻을 추구하고 근본을 따져, 평소 스승에게 들었던 말씀으로 질정(質正)하여 다시 서로 풀어내어 이 책을 지어 후세(後世)의 배우는 자들을 가르치셨다.

蓋其憂之也深故로 其言之也切하고 其慮之也遠故로 其說之也詳이라. 其曰天命率性은 則道心之謂也요 其曰擇善固執은 則精一之謂也며 其曰君子時中은 則執中之謂也니 世之相後가 千有餘年이로되 而其言之不異가 如合符節이라. 歷選前聖之書하여 所以提挈網維하고 開示蘊奧가 未有若是之明且盡者也라.

그가 걱정한 것이 깊었기 때문에 말씀한 것이 간절하고, 그가 염려한 것이 원대하였기 때문에 설명한 것이 자세하다. 그가 천명(天命), 솔성(率性)이라고 말한 것은 도심(道心)을 일컬은 것이고, 그가 택선(擇善), 고집(固執)이라고 말한 것은 정일(精一)을 일컬은 것이며, 그가 군자(君子), 시중(時中)이라고 말한 것은 집중(執中)을 일컬은 것이니, 시대가 뒤처진 것은 천여년(千餘年)이지만 그 말씀이 다르지 않은 것은 부절(符節)을 합한 것과 같다. 옛 성인(聖人)들의 책을 두루 선택하여 강령을 끌어 모으고 깊은 뜻을 열어 보인 것이 아직 이것[≪중용(中庸)≫]처럼 분명하고 극진한 것이 있지 않다.

自是而又再傳하여 以得孟氏하여 爲能推明是書하여 以承先聖之統이러니 及其沒하여는 而遂失其傳焉하니 則吾道之所寄가 不越乎言語文字之間하고 而異端之說이 日新月盛하여 以至於老佛之徒出하여는 則彌近理而大亂眞矣라.

이로부터 또 다시 전하여 맹자(孟子)를 얻게 되어서는 이에 대해 이 책을 미루어 밝힐 수 있어서 이전 성인(聖人)의 도통(道統)을 이었는데, 그가 별세(別世)함에 미쳐 마침내 그 전승을 잃으니, 우리의 도(道)가 의탁한 곳이 언어(言語)와 문자(文字)의 사이에 지나지 않고, 이단(異端)의 말은 날로 새로워지고 달로 성하여,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무리가 나옴에 이르러는 더욱 이치에 가까워 크게 참됨을 어지럽혔다.

然而尙幸此書之不泯故로 程夫子兄弟6)者가 出하사 得有所考하여 以續夫千載不傳之緖하고 得有所據하여 以斥夫二家7)似是之非이라. 蓋子思之功이 於是爲大나 而微程夫子면 則亦莫能因其語而得其心也리라. 惜乎라. 其所以爲說者가 不傳하고 而凡石氏8)之所輯錄은 僅出於其門人之所記라. 是以로 大義雖明이나 而微言未析하고 至其門人所自爲說하여는 則雖頗詳盡하여 而多所發明이나 然이나 倍其師說而淫於老佛者도 亦有之矣라.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책이 없어지지 않아서 정부자(程夫子) 형제(兄弟)가 나와, 고찰한 바가 있어 천년 동안 전해지지 않던 실마리를 이을 수 있었고, 근거한 바가 있어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사이비를 배척할 수 있었다. 자사(子思)의 공(功)이 이 점에서 크지만 정부자(程夫子)가 아니었더라면 또한 자사의 말씀을 인연하여 성인의 마음을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애석(哀惜)하다. 정자가 말씀한 것이 전해지지 않고, 무릇 석씨(石氏)가 모아 기록한 것은 겨우 그의 문인(門人)들이 기록한 것에서 나온 것뿐이다. 이 때문에 대의(大義)는 비록 밝혀졌으나 은미한 말씀은 분석되지 못하였고, 그 문인(門人)들이 각자 말한 것에 이르러는 비록 상당히 자세하고 극진하여 밝혀낸 바가 많지만, 그러나 그 스승의 학설을 배반하고 도가와 불가에 빠진 자도 또한 있었다.

熹自蚤歲로 則嘗受讀而竊疑之하여 沈潛反復이 蓋亦有年이러니 一旦에 恍然9)하여 似有得其要領者라. 然後에 乃敢會衆說하고 而折其衷하여 旣爲定著章句一篇하여 以俟後之君子라. 而一二同志로 復取石氏書하여 刪其繁亂하여 名以輯略하고 且記所嘗論辨取舍之意하여 別爲或問하여 以附其後라. 然後에 此書之旨가 支分節解하고 脉絡貫通하며 詳略相因하고 巨細畢擧하여 而凡諸說之同異得失도 亦得以曲暢旁通하여 而各極其趣라. 雖於道統之傳에 不敢妄議나 然이나 初學之士가 或有取焉이면 則亦庶乎行遠升高之一助云爾니라.

내가 어린 나이로부터 일찍이 (이 책을) 받아 읽으면서, 나름대로 의심이 들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반복(反復)한 것이 또한 여러 해였는데, 하루아침에 홀연(忽然)히 그 요령(要領)을 터득한 것이 있는 듯하였다. 그런 뒤에야 감히 여러 설을 모으고 절충(折衷)하여, 이미 ‘장구(章句)’ 한 편을 지어 후세(後世)의 군자(君子)를 기다린다. 그리고 한두 명의 동지(同志)들과 다시 석씨(石氏)의 글을 가져다 번잡하고 혼란한 것을 산정(刪定)하여 ‘집략(輯略)’이라 이름 붙이고, 또 일찍이 논변(論辨)하여 취사(取捨)한 뜻을 기록하여 별도로 ‘혹문(或問)’을 만들어 그 뒤에 붙였다.

그런 뒤에야 이 책의 뜻이 가지가 나뉘고 마디가 풀리며, 맥락(脈絡)이 관통(貫通)되고 상세함과 간략함이 서로 이어지며, 큰 것과 작은 것이 모두 거론되어 여러 학설의 차이와 잘잘못이 또한 자세하게 펴지고 널리 통하여 각각 그 뜻을 극진히 하게 되었다. 비록 도통(道統)의 전승에 대해 감히 함부로 논의할 수는 없겠으나 처음 배우는 선비가 혹 여기에서 취하는 것이 있다면, 또한 아마 먼 곳을 가고 높은 곳을 오르는데 하나의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淳熙己酉10)春三月戊申에 新安朱熹는 序하노라.

순희(淳熙) 기유년(己酉年) 춘삼월(春三月) 무신일(戊申日)에 신안(新安)의 주희(朱熹)는 서문을 쓴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용장구서 [中庸章句序] (중국의 명문장 감상, 2011. 9. 18., 김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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