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삼각산(북한산)의 유래 - 삼각산 포럼 강의 자료

三角山 有感

1982년 3월에 서울에 올라왔으니 어언 서울 생활이 36년을 채우고 있다.
그 사이 삼각산 자락에 감겨 살면서 
숱하게 기상이 넘치는 삼각산을 바라보고 
붓을 닮은 인수봉을 특별히 섬기며 살아왔다. 
마침 삼각산포럼에서 삼각산을 주제로 특강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메모를 해 본다.

들어가는 말靑山不墨萬古屛流水無絃千年琴三必知 三不知
사고방식의 진화: 2분법(생사, 밤낮, 해달, 승패...) – 3분법(시간) - 4~5분법(공간)
지난여름의 만주 답사 소감(환인, 집안, 비사성, 오녀산성, 환도산성, 백암산성, 안시성, 선양 등 답사)- 역사는 쓰여진 거짓말이요, 신화는 쓰여지지 않은 진실이다.

은 이다. 봉우리가 하나면 '峰', 둘이면 '丘', 셋이면 '山' 다섯이면 '岳(嶽)'이다.
산은 天地人 三才와 깊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산은 하늘을 이고대지를 딛고사람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사랑도 3의 수이다.
은 봉우리로 볼 때 //이고, //이고, //이고,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壽似山 福如海라고 했다. 
山과 三은 흔들림과 변함이 없다. 
산을 닮은 사람을 ‘산을 닮은 사람’ 곧 ‘仁者’라 했다.
’ 자는 ‘사람·하늘·’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仁者樂山 知者樂水’라는 말이 탄생한다.

오악(五岳/五嶽) : 
1. 우리나라의 이름난 다섯 산동의 金剛山서의 妙香山남의 智異山북의 白頭山중앙의 三角山을 이른다.
2. 중국의 이름난 다섯 산타이산(tài), 화산(huá), 헝산(héng,), 헝산(héng), 쑹산(sōng)을 이른다(저울대 형)과 (항상 항)의 중국 발음은 같다.
3. 사람의 얼굴에서 이마좌우 광대뼈를 이르는 말. 여기에서 관상이 출발한다.

유명인일수록 이름이 많다. 산도 그렇다. 
금강산은 계절마다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삼각산은 소뿔산셔블산세뿔산한산북한산중악삼봉산화산부아악 등의 별명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때 名山이자 靈山이다.

'三角山'이란 명칭과 '北漢山'의 명칭의 빈도수를 조사해 보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三角山'이란 단어가 182회 나오는 데 반해, '북한산'은 145회 나타난다.
<고전번역서>에서는 291 대 145, <한국문집총간>에는 391 대 76으로 나타난다.
통계적으로 보면 '삼각산'이란 용어가 '북한산'이란 용어보다 더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삼각산의 명칭 유래를 유추해 본다. 
도봉산의 ‘牛耳峰’(인수봉에 뾰족이 튀어나온 바위가 소의 귀를 닮은 것으로 보기도 함), 강북구의 ‘牛耳洞’, 강북구와 도봉구 사이를 흐르는 ‘牛耳川’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삼각산은 '소'와 관련이 깊은 산이다. 우이동은 본명은 ‘쇠귓골’이었다. 그렇다면 ‘소뿔산’이 삼각산의 원명일 것이다. 북쪽에서 바라본 삼각산은 마치 소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백운봉과 만경봉은 겹쳐 보여 마치 ‘소뿔’처럼 보인다. 우리 민족의 뿌리가 북방에서 내려온 민족이라면 분명 그렇게 보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백제의 수도가 들어서자 ‘소뿔산’이 ‘셔블산(서울산)’으로 와전된다. 문제는 셔블산 남쪽에서 바라보면 소뿔 2개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백운봉·인수봉·만경봉이 3개의 뿔로 보인다. 여기에서 ‘세뿔산’으로 와전되고, ‘세뿔산’을 한자로 옮기면 ‘三角山’이 되는 것이다. 삼각산의 다른 이름으로 백제의 수도를 지키는 산, 곧 ‘한산(漢山)’과 오악의 하나인 ‘중악(中岳)’도 있다.
이외에도 삼봉산(三峰山, 세봉오리로 이루어진 산), 화산(華山, 꽃이 만발하는 산) 또는 부아악(負兒岳,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모습) 등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신라 때에는 산의 형상이 아이를 업고 있는 모양과 같다 하여 부아악(負兒岳)으로 부르기도 했다. '북한산'으로 불리게 된 것은 백제의 수도 이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기록으로는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성한 뒤부터라고 추정된다. 원래 수도를 지키고 있는 산을 ‘큰 산’의 의미인 ‘한산(漢山)’이라 했다. 한강 북쪽 위례에 도읍하던 백제가 고구려에 밀려 한강 남쪽 하남으로 밀려나고는 새로운 ‘한산’ 명명이 불가피했다. 여기에서 ‘북한산’은 ‘남한산’의 상대적 개념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북한산, 남한산 등은 동산, 앞산처럼 고유명사라기보다 보통명사적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삼각산' 대신에 ‘북한산’으로 불리도록 강요당하는가. 역사 교과서에서 '삼각산'이란 명칭 대신, 일제가 붙인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라고 명명함으로서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북한산'이란 말에 익숙하게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추사 김정희의 역할이 크다. 추사는
<阮堂先生全集卷一>의 '眞興二碑攷'에서 '이상의 신라 진흥왕순수비는 지금 경도(京都)의 북쪽으로 20리쯤 되는 북한산 승가사(僧伽寺) 곁의 비봉(碑峯) 위에 있다'(右新羅眞興王巡狩碑 在今 京都北二十里北漢山僧伽寺傍碑峯之上)라고 하여 '삼각산'이란 명칭 대신에 '북한산'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1910년대 일제의 친일적 조선 지명 명명과 오늘날 정치적 메커니즘의 영향도 크다고 본다. 게다가 1983년에 '삼각산'과 '도봉산'을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함으로서 '삼각산'이란 말 대신에 ‘북한산’이란 명명이 더욱 공고해졌다. 이후 지명학회를 비롯한 몇몇 민간 단체의 노력이 있었지만 말이란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는 사회적 기능 탓으로 쉽게 되돌릴 수 없는 형편이다. 
만약 추사가 '삼각산신라진흥왕순수비'라고 했거나, 정부에서 '삼각산국립공원'이라고 했다면 '북한산'이란 명칭 대신에 '삼각산'이 힘을 얻었을 것이다. 비봉의 진흥왕순수비는 국보 제3호로 신라 진흥왕의 북한산 순행을 기념하여 碑峯에 세운 순수비이다. 다시 말하면 신라의 영역표시이다. 1816년에 김정희가 비문의 일부를 판독한 후 널리 알려졌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

전체적인 흐름을 유추해 보면 시작은 '소뿔산'이었으나 백제의 수도가 들어온 이후 명칭이 두 갈래로 나뉘어, 고유명사로서의 '삼각산'계 및 보통명사로서의 '북한산'계로 나눠 볼 수 있다.
1. 소뿔산(북쪽에서 볼 때, 소의 두 뿔로 보임. 고유명사) - 세뿔산(산의 남쪽에 있는 위례성에서 볼 때, 뿔이 세 개, 또는 三峰이 3각형을 이룸. 고유명사) - 三角山(고유명사. '세뿔산'을 三角山을 표기)
2. 셔블산('서울의 산'이란 의미의 보통명사) - 漢山('수도를 지키는 산', '큰 산'의 의미로 '동산', '앞산'과 같은 보통명사. 순우리말 '한산'을 '漢山'으로 차자 표기) - 北漢山(보통명사. 남한산에 대한 상대적 개념. 北漢山으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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