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요약논문 - 목은의 사군자 상징성 연구

Ⅰ. 序論


  1. 硏究 目的

이 논문에서는 麗末鮮初의 大文豪이자 政治家, 儒學者, 敎育者인 牧隱 李穡(1328~1396)이 지은 漢詩 중에서 四君子를 素材로 한 작품만을 골라 그 속에 담긴 象徵性을 고찰하고자 한다.

기존의 논문에서 목은의 自然觀과 목은의 四君子를 다룬 실적을 살필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이 논문에서는 목은의 四君子詩 전반을 다룬다는 점에서 목은의 전체적인 四君子觀 및 이를 통한 外物認識은 물론 그 象徵性까지 읽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매화·난초·국화·대를 일러 四君子라고 하고, 四君子를 대상으로 창작한 시를 四君子詩라 한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 경치를 주제로 읊은 시를 自然詩 또는 景物詩라고 하는데, 四君子를 대상으로 창작된 시도 자연 경물의 일부이고 보면 四君子詩는 넓은 의미에서 自然詩의 일반적 특징을 지닌다. 중국문학에서 초기 사군자시의 기원은 『詩經』과 『楚辭』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四君子詩도 自然詩와 마찬가지로 魏晉時代와 唐에 이르는 동안 양과 질에서 있어서 부단한 발전을 이루었다.

하필 목은의 四君子詩에 나타난 상징성을 연구하는가 하는 점에서는, 첫째는 목은이 麗末文學을 대표하고 있는 문인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 둘째는 목은이 여말의 性理學者로서 그 당시 사상의 중심에 서 있었다는 점, 셋째는 목은이 四君子를 읊거나 이를 소재로 사용한 詩가 400여 수에 이른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목은의 詩文은 성리학적 사유에 기초해 외물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으로, 文學과 道學이 融解되어 있는 것으로, 형식적인 측면에만 힘을 쏟는 것을 거부하고 내용 중심의 詩觀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古文에 대한 지향이 강한 것으로, 詩經詩를 수용하면서 시의 公利的 목적을 강조하며 성리학적 사유에 따른 정치적 이념을 공고히 다지려 하였다는 것으로, 豪放의 風格 또는 그와 유사한 국면이 있다는 것으로, 목은의 四君子詩는 儒者的  문학관을 지녔음을 직접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는 것 등으로 이해되어 왔다. 

여기에서는 목은의 시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목은의 梅蘭菊竹觀을 살피고 그 각각의 象徵性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四君子를 바라보는 목은의 눈을 토대로 그의 문학관, 자연관, 인생관, 철학관 등을 살펴보고자 함이 이 논문의 작은 기대라 할 수 있다. 

목은의 시에 나타나는 자연물은 사군자 외에도 松, 蓮을 비롯하여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시경 이상의 여말 植物圖鑑을 연상케 할 정도이다.

四君子라는 소략한 소재를 연구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측량하기 어려운 목은 문학을 歪曲하거나 흠집을 낼 수도 있다는 염려가 앞선다. 하지만 한 그루의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해 보았다.

균형감각을 갖고 작업하기 위하여 6천수에 가까운 목은시 전체 속에서의 목은의 사군자시라는 생각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통시적 균형 감각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詩經』과 『楚辭』에 나타나는 사군자로부터 목은 전후까지의 중국과 한국의 사군자시 展開樣相을 미리 검토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牧隱 李穡의 四君子詩 하나하나가 갖는 내용을 바탕으로 동질성을 찾아보고, 그럼으로써 전체적인 상징성을 묶어내는 작업이기는 하나, 이 작업이 우리 선조의 四君子觀 전반의 큰 흐름의 하나의 연결 고리가 되기를 바란다. 또한, 왕조교체기의 긴박한 상황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한 선비의 눈에 비친 사군자관을 통하여 한 인간의 내면의식의 흐름도 짐작해 보고자 한다. 

여말선초의 한 지식인의 독자적인 四君子觀을 통하여 사군자가 지니는 일반적 象徵性 규명에 일조하고, 나아가 목은의 四君子詩 연구는 목은의 四君子美學을 비롯하여 목은의 景物觀과 自然美學의 실체를 究明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한다.

牧隱詩 硏究는 앞으로도 더 많은 작품에 대한 분석을 통한 종합적인 연구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漢詩史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牧隱의 詩文學 연구가 더욱 활기를 띨 것이 기대되는 것은 그의 詩文이 너무나 浩瀚하기 때문이다. 목은의 四君子詩에 나타난 象徵性 연구를 통한 人間 牧隱에 대한 이해와, 牧隱詩의 文學史的 자리매김을 좀 더 분명히 하고자 한다.

사실 목은 시대에는 梅·蘭·菊·竹이라는 일반적 인식이 없었다. 따라서 목은도 梅·蘭·菊·竹만이 四君子라는 생각 없이 그냥 花木 중에 유달리 관심을 끄는 詩材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四君子라는 말은 엄밀히 말해서 文人畵家들에 의하여 붙여진 畵目의 네 종류였지만, 文人畵의 주체가 文人이기 때문에 오늘날은 文學을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범칭하는 용어로 성장해 왔다. 그런 만큼 목은은 四君子만을 통하여 君子像을 찾으려고 애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이 논문 작업이 유효하리라 믿는 것은 繪畫와 文學의 장르 교섭을 통한 문학의 영역 확대에 대한 기대도 있기 때문이다. 

작업 과정에서 목은은 더 많은 松詩나, 荷詩를 비롯한 많은 花木을 통하여 자신의 소회를 밝히고 있음을 살필 수 있었지만, 이들 자연물에 대한 연구는 다음 과제로 남긴다.


  2. 硏究史 檢討


麗末 三隱의 한 사람인 목은에 대한 연구는 현재 인물의 정치관, 철학관 및 문학론 연구, 그리고 주제별 또는 소재별 연구 등 여러모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麗末 文學 윤곽 및 여말 문학의 큰 줄기의 하나인 牧隱 文學의 세계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牧隱 文學은 그 분량의 방대함과 영역의 다양함 및 깊이의 심오함으로 인하여 더한 천착과 연구가 계속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이는 목은의 文集에 실린 작품은 詩가 6천수에 가깝고 散文도 2백 편을 넘는 분량으로 조선조에서도 보기 드문 巨帙의 문집이기 때문이다.

목은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목은 문학의 연구는 1980년대에 들어와서부터 그 실적이 쌓여가고 있으며, 특히 1990년대 이후에는 연구가 활기를 띠어 박사, 석사 논문이 다수 발표되었다. 姜在哲, 「牧隱詩 硏究」, ‘特히 四君子詩에 主眼하여’, 단국대학교, 1981.

곽진, 「牧隱 李穡의 詩에 대한 一硏究」, ‘特히 風俗詩을 中心으로’, 成均館大學校, 1982.

宋政憲, 「牧隱詩의 歸田思想에 대한 硏究」, 『국어국문학』 91호, pp. 325-330, 국어국문학회, 1984.

柳廣眞, 「牧隱 李穡의 詩文學 硏究」, 誠信女子大學校, 1992.

朴熹, 「牧隱 李穡의 詩文學 硏究」, 世宗大學校 1994.

洪琦杓 「牧隱 李穡의 儒學思想 硏究」, ‘牧隱 性理說의 思想史的 位相과 관련하여’, 成均館大學校, 1994.

呂運弼, 「牧隱詩의 唐詩受容에 관한 硏究」, 『韓國漢詩硏究 2』, pp. 29-62, 韓國漢詩學會, 1994.

李漢馥,「牧隱 李穡의 詠史詩 硏究」, 高麗大學校, 1994.

朴熹, 「牧隱 李穡의 詩文學 硏究」, 世宗大學校, 1994.

朴熹, 「牧隱詩에 나타난 君子觀」, 『동국어문학 제7집』, pp. 15-36, 동국대학교 국어교육과, 1995.

黃載文, 「牧隱詩의 風格 硏究」, 『韓國漢詩硏究 3』, pp. 149-170, 태학사, 1995.

정재철, 「牧隱 李穡 詩의 硏究」, ‘그 思想的 志向의 探究’, 고려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6 

柳浩珍, 「李穡 詩 硏究」, ‘道學 性向의 작품을 중심으로’, 高麗大學校, 1999.

정재철, 「목은시에 있어서 시경시의 수용과 그 의의」, 『韓國漢文學硏究』 24輯, pp. 43-70, 1999.

李鶴遠, 「牧隱(李穡) 元留學期의 詩 硏究」, 公州大學校, 2000.

河政承, 「牧隱 李穡 詩의 品格 硏究」, 『東方漢文學』 20輯, pp. 117-161, 東方漢文學會, 2001.

河政承, 「高麗後期 漢詩의 品格 硏究」, ‘牧隱系 士人을 中心으로’, 成均館大學校, 2001.

崔光範, 「高麗末 漢詩 風格 硏究」,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p.3.

李英徽, 「牧隱 李穡의 賦 硏究」, 『한국어문학연구』제40집, 한국어문학연구학회, 2003.

朱慶烈, 「高麗中期 自然詩 硏究」, 고려대학교 대학원, 2004.

鄭貞淑, 「李穡 散文 文學 硏究」, 단국대학교, 2004.

元周用, 「牧隱 李穡 散文 硏究」, 成均館大學校, 2005. 

魚江石,「牧隱 李穡 文學 硏究」, 韓國學中央硏究院,  2005. 

姜承希, 「다시(茶詩)를 통해 본 목은 이색의 사상연구」, 圓光大學校, 2006. 

玄那美, 「牧隱集에 나타난 高麗時代 茶 文化 硏究」, 成均館大學校, 2006.

朴鏡深, 「牧隱 李穡의 哲學思想 硏究」, 成均館大學校, 2006.

姜相吉, 「牧隱 李穡의 本然之性 중심의 敎育思想」, 慶尙大學校 2008.

조해파, 「牧隱 李穡 시문학의 陶淵明 수용 연구」, 선문대학교, 2008.

김홍매,「목은 이색의 詠花詩 연구」, ‘매화시 국화시 연꽃시를 중심으로’, 국문학회, 2008.

金載旭,「牧隱 李穡의 詠物詩 硏究」, 高麗大學校, 2009.

 기왕에 발표된 여러 논문에 대한 개괄은 기존 박사 논문에 실려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목은의 사군자시와 유관한 논문을 중심으로 연구 성과의 의의를 밝히고자 한다.

목은의 시문학 연구를 통하여 목은의 사군자를 소재로 한 논문으로 먼저 주목되는 것은 姜在哲의 「牧隱 李穡의 四君子詩 硏究」 姜在哲, 「牧隱 李穡의 四君子詩 硏究」, 『漢文學論集』第五輯, 檀國漢文學會, 1987.

라는 논문이다. 논자는 목은의 사군자시를 분석하여 量的으로 제일 우세한 것은 詠菊詩, 다음으로는 詠梅詩, 가장 적은 것은 詠蘭詩로 꼽았다. 詠菊詩가 가장 많은 이유는 정치 생활에서 물러나 자연에 묻히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으로 淵明思想에 심취했던 證左로 보고 있다. 원래 漢詩에서는 詠蘭詩가 적은 법인데, 崔康賢, 「四君子의 文學的 考察(Ⅱ)」, ‘主로 蘭을 中心하여’, 『弘大論叢』8, p.19, 1976. 

 牧隱의 경우도 例外는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四君子詩는 用事가 심하지만 언제나 新意를 창출해 냄에서 목은의 뛰어난 시작 수법을 읽고 있다. 일상적 詩語가 일반 다른 작가의 四君子詩와 별 차이가 나지 않음은 목은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四君子詩를 골고루 많이 읊었고, 이 영향이 우리 漢詩史에 면면히 흘러 내려왔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詠梅詩에서는 매화의 忍苦精神이, 詠蘭詩에서는 관직 생활을 떠나고 싶어 하는 마음과 나태함을 이기려는 意志가, 詠菊詩에서는 임금을 聖君으로 모시고 싶은 衷情이, 詠竹詩에서는 虛心과 敦厚한 학문 및 등용되지 않은 志士의 안타까움이 나타나 있다고 보았다.


  3. 硏究 範圍와 方法

牧隱의 四君子詩에 나타난 象徵性에 관한 바람직한 연구를 위해서는 몇 가지 면에서 선행 작업이 필요하다. 

우선 목은 이색의 생애에 대한 검토를 해야 한다. 문학은 특별한 時空의 상황에서 나온 창작물이므로 목은의 전반적인 행력을 살펴봄으로써 목은의 사군자시가 어떠한 계기와 상황에서 나온 시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색의 행력을 통하여 어떠한 환경과 시간에 지어진 시인지 알아보는 것은 反映論的인 관점이 되겠다. 다음으로 『牧隱詩藁』에 나타난 君子詩를 통하여 목은의 君子觀을 파악하기로 한다. 『牧隱詩藁』에 실린 26편의 君子詩를 중심으로 하되, 『牧隱文藁』에 나타난 목은의 君子觀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다음은 작업으로는 『牧隱詩藁』에서 四君子를 언급한 시들을 일일이 찾아서 정리해 보는 일이었다. 그 결과, ‘梅’ 자로 검색한 결과는 93회, ‘蘭’ 자 검색 결과는 44회, ‘菊’ 자 검색 결과는 102회, ‘竹’ 자 검색 결과는 115회나 되었으며, 梅․․蘭․菊․竹과 의미상 상통하는 글자로 검색한 결과는, ‘蕙’ 자가 8회, ‘黃花’가 45회, 筍 38회, 筠 자가 3회, 琅玕이 5회로 나타났다. 金鎭英·金東建, 『牧隱 李穡 詩語 索引』 上下, 牧隱硏究會 硏究叢書 7, 이회문화사, 2007.

 이 정도라면 목은의 사군자시에 나타난 상징성 연구를 위한 풍부한 자료라고 판단된다. 

이 중에서 蕙草는 蘭草의 일종으로 보고 詠蘭詩에 포함했고, 黃花는 詠菊詩에, 筠·筍·琅玕 등은 詠竹詩에 포함해서 연구 범위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文學史上 사군자가 시문학에 어떻게 등장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가장 오래된 시집이자 북방 문학을 대표하는 『詩經』과, 周代 남방 문학의 總集이라 할 수 있는 『楚辭』에 나타난 四君子詩를 찾아보았다. 그 결과 매화시와 대시는 『詩經』에 등장하지만, 난초시와 국화시는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식물마다 그 분포에 차이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난초 余既滋蘭之九畹兮 又樹蕙之百畝(나는 이미 구원의 난초를 기르고 또 백무의 혜초도 심었다.), 『離騷經』, 屈原.

, 국화 夕餐秋菊之落英(저녁에는 가을 국화 떨어지는 꽃잎 먹는다.), 『離騷經』, 屈原.

는 屈原의 「離騷經」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四君子의 일반적 屬性과 展開樣相을 바탕으로 목은의 사군자시가 지니는 象徵性을 찾아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문학사상에 나타나는 사군자시의 普遍性의 바탕 위에 목은의 사군자시가 갖는 特殊性을 찾아내야 한다.

韓國古典飜譯院에서 제공하는 한국고전종합 DB에 의하면 古典飜譯叢書, 優秀古典飜譯書,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日省錄, 韓國文集叢刊, 國學原典 등의 자료에 ‘牧隱’의 검색 결과는 10,536건, ‘牧隱’은 2,328건, ‘牧隱 李穡’은 596건의 자료가 실려 있는 것만 보아도 인간 목은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목은 문학에 대한 양적, 질적 성과에 많은 사람이 주목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목은의 방대한 문학 실적과 후대인들의 관심을 바탕으로 하여 이 논문에서는 그의 詩에 나타난 四君子詩만을 대상으로 하고 이에 나타난 象徵性을 고찰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四君子詩라고 하면 梅․蘭․菊․竹을 주제 또는 소재로 하거나, 사군자를 그린 그림에 題를 붙인 題畵詩까지 포함한다.

牧隱의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꾸준하고도 심도 있게 이루어져 왔다. 그 사이 목은의 정치적 활동과 문학, 사상, 생애와 역사적 위상, 외교적 역할, 師承 및 交遊, 목은과 禑昌問題, 風俗詩, 儒學思想, 敎育思想, 佛敎觀, 四君子詩 등에 관한 연구는 매우 다각적이고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목은이 남긴 문집은 『牧隱文藁』 20권, 『牧隱詩稿』 3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집은 先親의 『稼亭集』과 함께 고려 후기의 인문, 사회, 정치, 철학 등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牧隱詩藁』에 나타난 四君子를 소재로 한 시만을 중심으로 하여 그 象徵性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목은의 四君子詩에 나타나는 象徵性 연구를 통한 목은의 전반적인 精神世界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牧隱의 生涯와 性理學者로서의 君子 認識 및 기존의 四君子의 屬性에 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목은의 군자 인식은 『牧隱詩藁』에 나오는 전반적인 시 내용을 바탕으로 특히 ‘君子’를 시제로 한 25편에 무게를 두고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목은의 四君子詩에 나타난 象徵性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기존의 일반적인 사군자의 屬性과 展開樣相에 관한 탐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일반적, 보편적인 사군자에 관한 상징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야 목은만의 독창적이고, 전문적인 사군자관을 끄집어 낼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四君子詩라 함은 첫째, 사군자를 題材로 한 시를 말한다. 둘째, 사군자를 여러 素材 중의 하나로 한 시도 포함했다. 셋째, 題畵詩로서 사군자를 그린 그림을 보고 지은 시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Ⅱ. 牧隱의 生涯 및 君子觀

 1. 牧隱의 生涯

여기서는 목은의 인간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어 가족 상황까지 포함하여, 목은의 생애를 11기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사후에 『牧隱集』의 刊行 경위와 목은의 역사적 位相을 살피기 위하여 12기를 추가했다. 지어진 기사의 출처는 그의 年譜, 權近의 行狀, 高麗史, 太祖實錄 등을 참고하여 정리한 것이다.


1) 出生과 어머니의 訓育(1328~1334 : 1~7세)

2) 修學과 結婚(1335~1346 : 8~19세)

3) 燕京 儒學(1347~1350 : 20~23세)

4) 父親喪과 出仕(1351~1355 : 24~28세)

5) 制度 改革과 紅巾賊의 亂(1356~1362 : 29~35세)

6) 元․明 交替와 性理學 振作(1363~1370 : 36~43세) 

7) 母親喪과 恭愍王의 逝去(1371~1374 : 44~47세) 

8) 杜門不出과 作詩消憂(1375~1382 : 48~55세) 

9) 疏外된 벼슬길(1375~1382 : 56~60세) 

10) 李成桂 攝政과 流配(1388~1391 : 61~64세)

11) 亡國과 喪妻와 의문의 죽음(1392~1396 : 65~69세)

12) 文集 刊行과 목은의 역사적 位相


목은의 역사적 위상은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自負心이 강하여 剛直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政治的 측면에서 살펴보면 忠臣이요, 思想的 측면에서 볼 때는 儒學者이며, 敎育的 측면에서 그는 成均館 大司成을 역임하면서 性理學 발전의 토대를 쌓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文學的으로는 질과 양적인 면에서 고려의 대미를 장식한 최대의 文豪로 평가받고 있다. 목은은 고려 말 정치계, 사상계, 문학계에서의 거목이라 할 수 있다. 


  2. 牧隱의 君子觀

이 땅에 性理學의 씨앗을 가져와 뿌리를 내린 牧隱은 평생 聖人을 흠모하며 君子를 꿈꾸고 또 실천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詩文을 통하여 살필 수 있다. 

여기서 君子詩라고 하면, 목은이 지은 君子를 소재로 한 詩를 말한다. 『牧隱詩藁』와 『牧隱文藁』에 나오는 ‘君子’라는 제목의 詩와 ‘君子’라는 단어가 들어간 제목의 시는 물론 그 외에도 여러 곳에 君子를 논한 시들이 보인다. 『牧隱詩稿』에는 ‘君子’라는 제목의 시는 18편, ‘君子’라는 단어를 포함하는 제목의 시는 8편으로 모두 26편이나 전하고 있다. 『牧隱文藁』 「孟周說」에는 ‘士君子’에 관한 의견이 간명하게 나오는데, 여기의 ‘士君子’는 ‘君子’의 의미와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士君子는 지위가 있고, 덕행이 높으며, 학문이 깊은 사람을 말하는데, ‘君子’는 여기에서 지위를 뺀 나머지, 덕행과 학문이 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士君子는 어려서는 배움에 힘쓰고 자라서는 이를 實行해야 하는데, 집안에서 시작하여 天下에서 마치는 것이다. 임금에게는 몸을 바쳐 충성하고 백성에게는 혜택을 베풀며(致君澤民), 風俗을 改良하여 세상을 좋게 하는 것(移風易俗)이니, 반드시 堯舜 같은 임금이 되고 唐虞의 시대가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士君子幼也學。壯也行。始于家而終于天下。致君澤民。移風易俗。必曰堯舜其人。唐虞其時。『牧隱文藁』 卷10, 「孟周說」 


士君子의 실천 덕목을 정리해 보면

첫째, 어려서는 배움에 힘쓸 것 

둘째, 자라서는 배운 것을 실행할 것, 知行一致의 가치를 높이 보고 있다.

셋째, 실행 범위가 집안에서 시작하여 천하에서 마치는 것이라 했으니,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덕목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넷째, 임금에게는 몸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

다섯째, 백성에게는 혜택을 베풀 것

여섯째, 풍속을 개량하여 세상을 좋게 할 것 등이다.

군자의 이상적 모델로 사람으로서는 堯舜 임금을, 시대로는 唐虞의 시대를 각각 제시하고 있다.


Ⅲ. 四君子의 屬性과 四君子詩의 展開樣相

  1. 四君子의 起源과 屬性

四君子란 매화·난초·국화·대의 네 가지 식물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흔히 줄여서 梅·蘭·菊·竹이라 한다. 지구 상의 약 150만 가지 종류의 많은 植物 중에서 특별히 이 넷을 선택하여 四君子라 하는 것은 매화·난초·국화·대가 남다른 아름다움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각기 높은 ‘氣象’과 ‘品格’을 지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비록 난초와 국화는 각각 花草의 일종이고, 매화는 꽃 피우고 열매 맺는 나무의 일종이며, 대는 볏과식물의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君子와 같은 ‘德’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四君子라고 한다. 이 중에서 대를 일상적으로 ‘대나무’라고 일컫는데, 이는 대를 나무의 일종으로 생각하고 이른 말이므로 ‘대’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한편 李奎報는 글의 연원을 情에 緣由한 마음의 격동에 두고 일단 마음속에 격함이 있으면 반드시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서 가히 그것을 막을 수 없다고 했다. 『東國李相國集』 권27, 與朴侍御犀書, 

 이와 같은 ‘緣情而發’의 증언으로서의 문학론 김진영, 『고전작가의 풍모와 문학』, 경희대학교 출판국, 2004.

에서 보면 ‘緣情’의 근거를 찾는 일이 이 항목의 설정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사군자에 대한 연정에 감응하여 별명을 붙이고 漢詩句로 형상화되는 짧은 예를 들어보고자 한다.

四君子라는 말의 연원은 시보다 그림에서 먼저 사용한 듯하다. 明 나라 때의 詩書畵家인 陳繼儒 陳繼儒는 明代의 文人으로 자는 仲醇, 호는 眉公이다. 詩歌ㆍ文辭에 능하였으며, 글씨는 蘇米를 法으로 하고, 간혹 山水ㆍ奇石ㆍ梅竹도 그렸다. 著書에 『眉公全集』이 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밴드로 보내기
  • 네이버로 보내기
  • 텀블러로 보내기
  • 핀터레스트로 보내기

Comments

권상호
시간과 마음을 담은 사군자

 매화의 개화로 봄을 가늠하고 국화 향으로 가을이 짙어 감을 짐작하던 시절, 사람들은 자연에서 살아가는 이치를 배우려는 겸손함이 있었다. 눈보라 속에 꽃망울을 맺어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매화를 찾아다녔고, 풀잎처럼 약해 보이지만 한결같이 그윽한 향기를 발하는 난을 그리워하였다. 뭇 꽃이 진 늦가을 서리에도 꿋꿋하였던 국화를 칭송하였고, 곧고 늘 푸른 대나무를 정신적 침구로 삼기도 하였다. 모진 계절의 변화에도 의연히 제 본분을 지키는 이들에서 군자다운 삶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의미를 잃지 않고 강한 가치지향적인 사군자, 한국을 비롯한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의 핵심적인 문화원형 가운데 하나가 사군자四君子이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가 실제로 그림으로 그려진 것은 송대宋代를 거치면서 비교적 분명히 등장하였고, 이전에는 시詩에서 주로 등장하였다. 네 가지 가운데 가장 먼저 그려진 것으로는 대나무로 여겨지며 한대漢代(기원전206-24)에 세워진 산동성 곡부현의 죽엽비竹葉碑에서 보이고 있다.

네 명의 군자

  군자의 길은 옛 선비들이 가장 닮고 싶어 했던 ‘이상적 인간상’이었다. 유교에서 지향하는 이상적 덕목을 갖춘 인간상으로, 곧 선비정신을 간직한 고결한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여러 면에서 모범이 되는 선비를 이르는 말로 그 뜻이 높은 군자라 하였다.

 문인들이 사군자를 좋아했던 이유는 이 식물이 가진 독특한 특성이기도 하지만 이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몇몇의 문인들의 고결한 삶의 이야기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 맹상孟嘗, 조趙나라 평원平原, 초楚나라 춘신春申, 위魏나라 신릉信陵 이 네 군자를 사람들은 사군자라 하였다. 이러한 전통을 받은 우리나라에서도 덕이 있는 사람을 사군자라 일렀는데, 조선시대 『허백정집虛白亭集』에는 홍귀달, 김종직, 조위, 성현을 이름을 볼 수 있다.

사군자화四君子畵는 문인화文人畵이다
  사군자라 하면 대체로 사군자화를 생각하지만 그림으로 그려지기 훨씬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시와 글에서 사군자를 노래하였다. 송宋대 성리학자들은 사물에 자신의 뜻을 의탁하여 노래하는 영물시詠物詩를 지었고, 사물에 의미를 담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크게 유행하면서 사군자화의 사상 기초가 된 것이다.
  그림을 직업으로 하지 않은 문인들이 여기餘技로 자신들의 의중을 표현하기 위해 그린 그림은, 그들의 신분이나 교양의 차이로 인해 직업화가인 화공畵工이 그린 그림과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논리를 기반으로 그들이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사대부 화론을 만들었다. 이후 관직에 비해 문인의 수가 많아지면서 문인화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문인화는 문인 각자의 학문과 교양 그리고 글씨를 쓰는 필력을 바탕으로, 대상에서 받은 감동을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해 내는 특징이 있다. 또한 비록 필력이 뛰어나더라도 너무 기교를 부리지 않았고 도리어 소박한 맛을 살려 그렸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림은 서로를 이해하는 문인들 사이에서 감상되었을 뿐 값을 매겨 거래되지는 않았다.
  사군자라 하고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중국 명나라 말기(16세기말)에 이르러서이다. 이전부터 함께 그려졌을 것으로 생각되나 작품으로 남아 있지는 않고, 다만 사군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이들 네 식물을 한데 묶어 다룬 최초의 문헌이 중국 명대에 발간된 『매죽난국사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군자라는 용어가 매난국죽을 가리키며 직접적으로 사용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우리나라 회화사에 사군자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20년 일제강점기 초기인 것으로 보인다. 사군자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명기된 것은 1922년부터 시작된 ‘조선미술전람회 규정’에서이다. 이 전람회의 사군자 규정에 “주로 먹을 사용한 간단한 그림”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감상
  사군자 작품을 깊이 있게 감상하려면 작품이 만들어진 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이해해야한다. 당시 작가가 사군자 그림 속에 무엇을 담으려고 했는지 헤아리고 짐작해야 한다. 단순히 시각적인 그림으로만 봐서는 참 아름다움을 느끼기 어렵다.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취미활동으로 사군자를 그리고 있으며 이를 통해 대중에게 많이 이해되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보다 깊이 있게 감상을 하고자 한다면 힘들지만 역사책과 미술사책을 곁에 두고 있어야 한다.

  시대가 다르고 작가가 다른데 왜 사군자 작품은 비슷비슷할까. 현대에는 실험적인 작품이 많아지면서 다양한 작품이 태어나지만 과거에는 그들의 사상적 기반흐름이 크게 바뀌지 않았으며, 그림을 그릴 때도 도구라야 붓 한 자루, 먹 또는 약간의 안료가 전부이기 때문에 고만고만하게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림을 찬찬히 되풀이해서 보다보면 그림의 형식이나 양식이 조금씩 다름을 알 수 있다. 붓의 크고 작음, 빠르고 느림, 먹의 짙고 옅음, 공간의 빽빽함과 시원함, 짜임새의 불안정과 불안 따위를 꾸준히 새기며 볼일이다.
  작품 속에 배어있는 정신을 느낄 수 있는데, 쓸쓸함, 화풀이, 화려함, 외로움, 교만, 겸손, 욕망, 저항, 분노.... 작가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림으로 어려울 때는 화면의 한쪽에 써 놓은 화제를 보는 것도 한 방편이겠다.
** 이 글은 이선옥『사군자』(돌베게 2011), 최열『사군자감상법』(대원사 2002)에서 발췌ㆍ요약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