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한국문학신문> 칼럼 60- 바람과 믿음

바람과 믿음

 

도정 권상호

  우리의 바람[희망(希望)]은 바람[(바람 풍)]이요, 우리의 믿음은 미[(물 수)]이다. 인간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고, 환경을 탓하지 않는 물처럼 믿음직하게 살고 싶어 한다. 바람[]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도 지구를 썩지 않게 하고 산소를 공급해 주며,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며 자신을 겸손하게 지키면서도 삼라만상에 스며들고 모든 동식물에게는 영양소를 실어 나른다. 

  바람과 물의 덕은 부드러움에 있다. 그 부드러움으로 자연이란 멋진 조각 작품을 낳는다. 특히 산 위의 장엄한 바위나 바닷가의 옹골찬 조약돌의 아름다움을 응시하다가 보면 그 조각 작품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바람과 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바람과 믿음으로도 멈출 수 없는 것은 시간이요, 극복할 수 없는 것은 공간이다. 시간(時間), 공간(空間), 인간(人間)은 삼 형제이다. 돌림자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은 즐거운 시간과 아름다운 공간 속에서 삶을 영위해 나가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영원하기에 멈춤 없이 흘러가고, 공간은 무한하기에 경계 없이 굴러가지만, 인간은 영원하지도 무한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치고받으며 살아간다. 그러고 보면 싸우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도 영역 다툼, 먹이 다툼, 이성 쟁취를 위해 처절하게 싸우는 동물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전쟁이란 집단 이기주의에서 나온 피할 수 없는 자연 현상 중의 하나일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인간이 건강을 찾는 일은 시간을 극복하고자 함에서, 넓은 땅과 집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공간을 극복하고자 함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다. 돈을 벌고자 함은 위의 두 가지를 어느 정도 가능케 해 주기 때문이리라. ()이나 원유는 유한(有限)하다. 독도와 같은 섬은 물론 수면 위로 나타나지 않은 이어도조차도 유한하다. 유한한 인간이 유한한 시공을 얻기 위해 유한한 돈을 벌려고 버둥거리다가 유한한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이 유한을 극복하는 방법은 없을까. 그 대안으로 찾아낸 것이 종교, 예술, 철학 따위라고 생각한다. 유한한 인간이 종교, 예술, 철학이란 타이틀을 내 걸고 무한을 꿈꾸며 살아가다가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이 기특하기도 하다.

  인간은 좁은 육신을 짊어지고 짧은 인생을 굴리며 살아가다가 생을 마감한다. 종교는 무한의 공간인 극락과 천국을 제시하고, 영원히 죽지 않는 환생과 영생을 약속하고 있다. 예술은 인간이 시간의 경계를 잊어버리도록 노래하게 하고, 공간의 경계를 잊어버리도록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리고 철학은 인간의 이러한 모든 소망을 실현 가능케 하는 ‘생각’이라는 위대한 힘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그런데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생각을 생각하면 생각을 생각할수록 올바른 생각이 생각나지 않아 생각을 생각하지 않는 생각이 올바른 생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청춘들이다. 허걱. 생각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 인간의 몸을 조금만 살펴보면 생각에서 오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예컨대, 신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이 머리이다. 이것은 머리를 쓰면서 살아가라는 무언의 가르침이리라. 얼쑤. 눈은 왜 입보다 위에 있을까. 적게 말하고 많이 보라는 뜻이리라. 옳거니. 귀는 왜 입보다 위에 있을까. 적게 말하고 많이 들으라는 뜻이리라. 잘한다. 게다가 입은 하나인데, 눈과 귀는 각각 두 개씩이나 된다. 이는 더더욱 많이 보고, 더욱더 많이 들으며 살아가라는 뜻이렷다. 견문(見聞)이로다.

  어디 더 깊이 생각해 보자. 눈은 보기만 하고, 귀는 듣기만 하면 되지만, 입은 먹으랴 말하랴 바쁘기만 하다. 눈과 귀는 각각 두 개씩이나 되면서도 보고 듣는 입력(入力) 기관의 역할만 하면 되지만, 입은 하나밖에 없으면서도 먹어야 하는 입력(入力) 기관의 역할과 말해야 하는 출력(出力) 기관의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한다. 바쁘다 바빠. . 그러므로 입방아는 찧어도 눈방아, 귀방아를 찧는다는 말은 없다.

  또 생각해 볼까나. 두 눈은 앞쪽을 향해 있으나, 두 귀는 좌우를 향해 있다. 두 눈이 앞쪽으로 나 있는 것은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가라.’라는 뜻이 아닐까. 두 귀가 서로 반대쪽에 있는 것은 ‘반대쪽의 의견도 모두 균형 있게 들어라.’라는 의미가 아닐까.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보내라.’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코는 왜 길고 아래로 향해 있을까. 공기의 통로가 긴 것은 찬 공기는 덥게 하고, 더운 공기 차게 하여 알맞은 온도를 폐에 공급하고자 그렇겠지. 아래로 향한 것은 혹여 비가 오더라도 빗물은 배제하고 공기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겠지. 코는 얼굴에서 가장 돌출한 부분이라서 자존심을 상징하기도 한다. 자존심이 너무 강하여 일을 그르칠 정도이면, ‘큰코다친다.’라고 하며 주의를 시킨다.

  그럼, 폐가 신장보다 위에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폐로는 하늘을 호흡하고, 신장으로는 대지를 비옥하게 만들라.’라는 뜻이리라.

  손은 발보다 위에 있다. 왜 그럴까. 인간은 발로 이동하여 손으로 먹고살기 때문에 구태여 그 중요성을 얘기하라면 손이 더 소중하겠지. 현대로 올수록 교통수단의 발달로 발의 역할은 점차 줄어들고, 손의 역할은 점차 커지고 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나오고 나서 두 손은 더욱더 바빠졌다.

  나무에는 가지[]가 있듯이 인간에게는 사지[]가 있다. 그래서 왕년에는 사지선다(四枝選多)형의 문제가 많았다. 사지선다형이란 네 가지 선택지 가운데 가장 적당한 답을 고르는 문제 방식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지(四肢)를 보고 만들어낸 문제 유형이 아닐까.

  그러나 요즈음은 오지선다(五枝選多)형의 문제가 대세이다. 이것은 문제를 푸는 인간의 한 손가락이 다섯 개인 것을 보고 만들어낸 문제 유형이 아닐까.

 

  우리 몸의 어느 부위인 들 중요하지 않은 곳이 있으랴. 평생 우리의 영혼이 세내어 사는 하나뿐인 몸. 하루에도 아침, 점심, 저녁으로 세 차례나 집세를 달라고 조르는, 더러는 간식까지 요구하는 암팡진 몸이다.

  이러한 몸을 왕()으로 모시는 비법이 있다. 벌렁 땅[()]에 드러누워 보시라. 내 몸이 ‘흙 토()’ 위에 ‘한 일()’ 자를 이루니 ‘임금 왕()’ 자가 된다. 그렇다. 땅에 누우면 누구나 다 왕이 된다. 얼씨구.

  바쁜 일손을 잠시 놓고 방바닥에 몸을 던져 보자. 너도 왕이요, 나도 왕이다. 오늘은 생각 끝에 바람도 믿음도 모두 이루었다. 앗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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