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한국문학신문> 칼럼 65- 라이브 서예와 붓춤

라이브 서예와 붓춤

도정 권상호

벼루 위에 먹을 갈자. 마묵(磨墨)은 심전경작(心田耕作)이자 심신수행(心身修行)의 과정이다. 마묵(磨墨)하며 명상호흡(冥想呼吸), 명상서예(冥想書藝)를 하면 온몸에 평화가 도래한다. 마묵의 끝은 언제나 윤택한 먹물과 그윽한 향기이다. 치렁치렁하게 잘 생긴 붓으로 먹물을 듬뿍 찍어 먹씨를 뿌리자. 붓끝에서 발아하는 먹꽃과 향기, 그리고 마른 뒤에 나타나는 글씨. 먹알갱이(먹씨)를 뿌려 글씨를 얻는 일은, 씨를 뿌려야 씨를 얻을 수 있는 이치와 같으니, 이는 천리(天理)이다. 탱탱하고 윤택하게 잘 갈린 먹씨의 유혹, 화선지란 포근한 은빛 대지(大地)의 기다림, 어찌 필마(筆馬)를 타지 않고 견딜 수 있으랴.

때로는 벼루처럼 단단한 마음으로 먹처럼 윤택한 글씨를 쓰자. 때로는 화선지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붓처럼 탄력 있는 글씨를 쓰자. 어느덧 묵향(墨香)이 그윽한 화선지 정원이 만들어지고 야트막한 획이라는 담을 넘나드는 필마(筆馬)!

붓이 지나간 자국은 언제나 먹으로 포장된 붓길로 남는다. 그 두께는 얇지만, 금강석보다 단단하고 흑진주보다 빛이 난다. 붓길은 다닐수록 땅이 파이는 것이 아니라 서예 작품으로 쌓인다. 세월이 흘러 결과물로 남는 것은 묵탑(墨塔)이지만, 행위의 주체로 보면 필탑(筆塔)이다.

오늘도 필탑 아래에서 두 손을 모은다. 멀고 먼 붓길에 지치고 땀에 흠뻑 젖으면 먹물에 풍덩 빠지고 싶다.

마음 바탕은 깨끗해야 한다는 회사후소(繪事後素)의 의미를 알고, 서예는 반드시 사색하여야 한다는 서수존사(書須存思)를 실천하며, 편안하고 고요해야 멀리 이를 수 있다는 영정치원(寧靜致遠)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면서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서예는 정중동(靜中動) 또는 동중정(動中靜)의 묘한 맛이 있다. 가는 듯 쉬고, 쉬는 듯 가곤 하는데 이를 삼과절(三過折)이라 한다. 붓길에 때로는 질풍노도(疾風怒濤)를 마주치기도 하고, 때로는 낙타처럼 사막 길을 정처 없이 뚜벅뚜벅 걸어가기도 한다. 순간순간 떨어지는 점과 획으로 완성되는 글자, 그 글자들이 대화를 나누며 시문(詩文)을 이루면 눈앞에 먹꽃은 꽃밭을 이루고 묵향은 또 다른 종이를 부른다. 먹꽃밭의 모양을 일러 장법(章法)이라 한다. 처음에는 인위적인 꽃밭을 만들다가 나중에는 붓길 따라 먹비[墨雨] 따라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그런 꽃밭을 더 좋아하게 된다.

문방사우(文房四友)와의 첫 만남의 설렘은 잊을 수 없다. 화선지에 붓이 닿는 순간에 전해지는 매 순간의 오싹한 전율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붓꼴림은 붓떨림을 낳고, 붓떨림은 붓자국을 낳는다. 붓자국이 모여 필탑을 쌓아 나간다. 필탑의 기단은 설렘과 전율이다. 먼 훗날 우리의 붓 연주가, 서예 갈라 쇼(gala show)가 되고, 우리의 먹빛이 세상을 빛내는 그런 날이 오길 꿈꾼다. 꿈은 꾸는 자의 몫이라기에……. ‘갈라(gala)’라는 말은 이탈리아 전통 축제의 복장 ‘gala’에 어원을 두고 있다. 갈라 쇼는 ‘축제’, ‘잔치’, ‘향연’, ‘흥겨운’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갈라 쇼는 축제처럼 흥겨운 ‘축하 공연’ 정도로 해석될 수 있는데 주로 클래식 음악, 발레 등의 공연 예술이나 피겨스케이팅 등과 같은 분야에서 행해졌지만, 앞으로는 서예에서도 펼쳐져야 한다. 더불어 즐기는 붓 연주, 붓털 하나하나에서 튕겨 나오는 오르골 이상의 천상 음악. 질펀하게 퍼져 나가는 먹 울림에서 다가오는 시각적 오르가슴……. 먹 울림을 통하여 세상의 중심에서 서예를 알리는 일이 서예 퍼포먼스, 곧 라이브 서예라고 생각한다. 

‘붓꼴림’이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생경한 말에다 어쩌면 속어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붓을 잡고 글씨를 쓰고 싶은 충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뭔가 하고 싶어 못 견디는 동기유발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도 아날로그 마니아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컴퓨터 안에 온갖 폰트들이 난무하지만 5천 년 동안 맥맥히 이어져 내려온 서예 작업을 하루라도 걸러서는 안 된다. 문방사우가 준비되어 있지 않더라도 심서(心書), 공서(空書)라도 가능하지 않은가.

좌우명으로 삼는 글귀가 있다. Beautiful space & Delightful time, 곧 ‘공간은 아름답고, 시간은 즐겁게’라는 말이다.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절대 피하거나 극복할 수 없는 것이 공간과 시간이라면 ‘그 공간 아름답고, 그 시간 즐겁게’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붓글씨 쓰는 일이야말로 그 실천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가 서예를 즐기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박제된 서예’가 아닌 ‘라이브 서예’에 있다.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나, 안진경의 ‘쟁좌위첩(爭座位帖)’과 같이 현장성과 생동감이 있는 글씨가 명필로 남아있다. 쓰는 과정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쓰는 사람은 더 큰 집중과 신명을 얻고, 관중은 붓놀림에 대한 감흥과 내용에서 오는 문기(文氣)를 맛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라이브 서예는 붓 연주라 할 수 있다.

라이브 서예의 가치는 더불어 쓰는 즐거움에 있다. 글씨를 멋지게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글 내용의 참신성도 빼놓을 수 없다. 따라서 라이브 서예를 즐기는 더 큰 보람은 늘 시심(詩心)에 젖어서 생활하는 데에 있다. 또 하나 라이브 서예를 하면 자연 친화적인 사람이 된다. 초기에는 인간의 손으로 빚어낸 인위적인 글씨를 쓰지만, 서력(書歷)이 쌓이면 점차 손을 떠나 자연의 리듬을 추구하게 된다.

우리의 아름다운 영혼이 천 년 가도 빛을 발하며 종이 위에 남아있다는 사실이 신비롭지 않은가. 죽는 순간 사유재산은 명의가 변경되지만 글씨는 낙관(落款)이라는 작품등록증으로 영원히 명의변경이 되지 않는 정신적 유산이다.

‘강남 스타일과 말춤’ 신드롬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 열풍으로 대한민국은 ‘수출 강국’, ‘기능 강국’, IT 강국’, ‘스포츠 강국’에서 ‘예술 강국’으로 떠올랐다. 미 차기 대선후보 중 롬니가 미국 방송에서 강남 스타일의 말춤을 따라 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이어지는 오바마 스타일, 그네 스타일, 강북 스타일, 광화문 스타일 등. 과연 지구촌은 스타일 쓰나미가 몰아치고 있다.

강남 스타일 열풍을 일으키며 국제가수로 등극한 싸이의 인기와 수익보다 대한민국의 국익 창출에 큰 의미를 헤아려야 한다. 붓쟁이들은 싸이의 말춤 대신에 붓춤으로, 아니면 또 다른 아이템을 창출하여 세상을 살맛나게 만들어야 할 때이다. 서예 퍼포먼스 ‘라이브 서예와 붓춤’도 개발하면 또 하나의 문화 한국의 깃발이 될 수 있다. 개천절에는 서울 우이동 솔밭공원에서 이어서 광화문광장에서는 566돌 한글날 기념 라이브 서예 공연을 펼쳤다. 다음은 영월의 김삿갓 축제 마당에서 라이브 서예와 붓춤을 펼칠 예정이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밴드로 보내기
  • 네이버로 보내기
  • 텀블러로 보내기
  • 핀터레스트로 보내기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