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교실

10 사군자에 대한 고찰

 10. 四君子에 대한 고찰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네가지 식물을 소재로 해서 수묵으로 그리는 사군자 그림은 문인 화가들에 의해서 많이 그려졌는데, 그 이유는 이들 소재가 함축하고 있는 상징성 때문이다.  이른 봄의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는 맑은 기상을, 깊은 산골짜기에 홀로 향기를 퍼뜨리는 난초는 고결함을, 가을의 찬 서리에도 굽히지 않고 늦게까지 피는 국화는 정절을, 그리고 곧은 줄기에 사시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는 변함없는 절개 등으로 참다운 삶의 구도자인 군자의 정신에 비유되었다.


  사군자 그림은 이러한 상징성 뿐만 아니라, 종이, 먹, 붓, 벼루와 최소한의 도구만 있으면 장소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그릴 수 있기 때문에 폭넓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글씨를 쓰는 도구에 서예의 선을 응용하여 그리는 기법적 친근감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사군자 그림이 수묵화를 배우는 데의 기초라 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난 잎에서 선의 변화, 대나무 줄기에서 필력, 매화 가지에서 구성, 국화 꽃잎에서 먹색의 농담의 능력을 배울 수 있는 적절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옛부터 동양인들은 덕성과 지성을 겸비한 최고의 인격자를 가리켜 군자라 하였다.  당시 지적 엘리트였던 문인 사대부들은 인생의 궁극적 지표를 군자라 설정하고 적극적으로 추구했었다.  사군자 그림은 바로 이러한 문인들의 삶을 확충, 고양시키고 그 마음의 뜻을 표현하기 위한 매체로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사군자 그림은 지식층을 중심으로 갖추어야 할 예술적 교양의 하나로 여겨지면서 시문, 서예와 함께 일상 생활화 되었다.


  군자에 대한 인식은 그 신분성 보다는 고매한 품성에 의한 인격적 가치로서 존경되었기 때문에 사군자를 그릴 때도 대상의 외형보다 그 자연적 본성을 나타내는 것이 더 중시되었다.  그래서 문인 사대부들은 사군자의 형상 너머에 있는 정신과 뜻을 마음으로 터득하여 마치 시를 짓는 기분으로 추상적인 구도와 모든 색을 함유하고 있다는 수묵의 표현적인 붓놀림을 통해 진솔하게 그리는 경지를 높게 여겼다.  이와 같이 사군자 그림은 동양화와 수묵화의 중심 사상과 핵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寫意畵의 정수이면서 동양 회화의 주종을 이루었던 문인화의 대표적 화목으로서 크게 성행했으며, 마음을 수양하고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매체로 널리 다뤄졌다.


  사군자는 일반적으로 매난국죽의 순서로 소개되는데, 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의 배열에 맞춘 것이고, 기법의 습득 단계는 전통적으로 가장 단순하고 기초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난초에서 시작하여 대나무, 매화, 국화의 순서로 진행된다.


1. 난초(蘭)

  난초는 예부터 깊은 골짜기에서 홀로 고고하게 향기를 품고 있는 모습이 세속의 이욕과 공명에 초연하였던 고결한 선비의 마음과 같다고 하여 幽谷佳人(유곡가인), 幽人등으로 불리었다.   난초의 상징성은 楚나라의 시인이며 충신이었던 屈原이 낭의 고결한 자태를 거울로 삼았다고 읊었듯이 이미 오래전부터 형성되었다.  난초가 그림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北宋때부터였으며 처음에는 화조화(花鳥畵)의 일부로 그려지다가 미불에 의해 수묵법에 의한 독립된 화제로 다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원나라때는 송설체로 유명한 조맹부와 雪窓등에 의해 산뜻하고 단아한 모습의 묵란이 유행되기도 하였으며, 특히 조맹부의 부인인 菅道昇의 맑고 수려한 난화는 馬守卓, 薛素素(설소소)등의 여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이들을 閨秀傳神派(규수전신파)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묵란은 고려 말기에 전래되어 조선 초기부터 그려지다가 추사 김정희에 이르러 대성되었고, 그 전통이 근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묵란은 그 은은한 먹향기와 수려한 곡선미와 청초한 분위기를 통해 고결한 이념미가 역대의 뛰어난 문인 화가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오면서 사군자 그림과 문인화의 발달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사군자 그림을 배울때 이러한 전통과 상징성을 지닌 묵란을 제일 먼저 시작하는 것은 난초의 생김새가 한자의 서체와 닮은 점이 가장 많다는 데 있다.   난엽을 그리는 것을 잎을 그린다고 하지 않고 삐친다고 하는 것도 글씨에서 삐치는 법을 쓰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김정희는, "난초를 치는 법은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文字香과 書券氣(서권기)가 있은 뒤에 얻을 수 있다" 고 하여 이론적으로 서체 훈련이 회화기술의 기초가 되고 있음을 말한 바 있다.  이점은 묵란화가 문인 묵객들이 즐겨찾던 주제의 하나로서 시, 서, 화에 능한 三絶, 특히 서예에 뛰어난 사람들에 의해 주로 그려졌던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난초의 종류는 상당히 많지만 묵란화에서는 주로 春蘭과 建蘭이 주로 다루어진다.  춘란은 草蘭, 獨頭蘭, 幽蘭(유란)이라고도 하는데 잎의 길이가 각각 달라서 길고 짧으며 한 줄기에 한 송이의 꽃이 피는 것으로 청의 鄭板橋(정판교) 와 조선 말기의 김정희, 대원군, 金應元 등이 잘 그렸다.   건란은 雄蘭, 駿河蘭(준하란), 민란 이라고도 했으며, 잎이 넓적하고 뻣뻣하여 곧게 올라가는데, 한줄기에 아홉 송이의 꽃이 핀다.   福建지방이 명산지인 이 난은 청의 오창석과 조선 말기의 閔泳翊(민영익)이 특히 잘 그렸다.


2. 대나무(竹)

  대나무는 문인 사대부들의 가장 많은 애호를 받으면서 사군자의 으뜸으로 뽑혀온 것이다. 그것은 대나무의 변함없는 청절한 자태와 그 정취를 지조있는 선비와 묵객들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늘 푸르고 곧고 강인한 줄기를 가진 이러한 대나무는 충신열사와 열녀의 절개에 비유되기도 한다.   대나무가 그림의 소재로 등장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였으나, 수묵화의 기법과 밀착되어 문인 사대부들의 화목으로 발달시킨 사람은 북송의 蘇東波(소동파)와 文同이었다.   소동파는 특히 그리고자 하는 대나무의 본성을 작가의 직관력으로 체득하여 나타낼 것을 주장한 胸中成竹論(흉중성죽론)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문동은  湖州竹派를 형성하여 묵죽화의 성행에 크게 기여하였다.  죽을 그리는데 기본은 묵죽으로 일반화 되었으나 묵죽 이전에 寫竹과 채색죽의 방법이 있었음을 기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寫竹은 사생에 의한 대나무의 묘사방법이고 채색죽은 윤곽을 선묘로 두르고 안에 칠을 하는, 이른바 鉤勒塡彩(구륵전채)의 방법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대나무는 수묵법와 결부됨으로써 비로서 동양 회화의 중심적 창작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기운과 정신의 주관적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墨이란 선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색채를 대신한 면으로서도 작용한다.  문동이나 소동파에 의해 처음 시도된 묵죽은 바로 대상물의 외형적 사생을 떠난 傳神의 실천적 방법으로 죽을 그린 것이 되며, 이때의 묵은 현상 세계 너머의 조화력을 암시하는 것으로 묵선이나 묵면모두 그 기운을 담는 형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묵죽과 동양회화가 지니고 있는 사의 정신은 이러한 창작 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묵죽도 묵란과 마찬가지로 서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찬은 서법 없는 묵죽은 병등 대나무를 보는 것 같다고 했으며 明代의 왕불은 서법과 죽법을 동체라고 하였다.   그러나 묵란이 짧고 긴 곡선의 반전을 통해 풍부한 변화를 보이는데 비해 묵죽은 직선이 위주이며 그 구도에서도 보다 다양한 것이 그리는데도 절차와 방법이 있는데, 줄기와 마디, 가지와 잎마다 그리는 순서가 있다.   먼저 줄기를 그리고 다음에 가지를, 이어서 방향과 필법을 변화시켜 잎을, 마지막으로 마디를 그리는 것이 청대 이후 확립된 죽화법이다.   이 순서는 詩에서의 기승전결과 같다.   이러한 붓의 흐름은 사군자에서 공통으로 사용되지만 그 중에서도 죽의 경우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3. 매화(梅)

  매화는 추위를 이기고 눈 속에서 피는 강인하면서도 고귀한 운치를 그 특성으로 한다.  살을 에이는 추위속에서도 풍기는 매화의 향기는 맑고 깨끗한 인품으로, 눈 속에서도 아름다운 자태는 봄을 알려주는 선구자적인 뜻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이러한 매화를 가리켜 雪中君者, 淸香, 玉骨, 淸客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매화가 수묵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북송 때였으며 창시자는 선승인 仲仁이었다.  뒤이어 같은 禪僧(선승)인 妙高(묘고)에 의해 이론적 체계화가 시도되었으며, 북송 남송 때에는 꽃잎의 윤곽을 그리는 圈法(권법)이 완성되기도 하였다.  묵매의 이러한 전통은 원대에 와서 王冕(왕면), 吳太素 등에 의해 크게 성행되었으며, 구도에서 북방식인 菱形式(릉형식)보다 남방식인 橫貫式(횡관식)이 더 유햏하였다.  명대에 와서 화보 등의 출현으로 다소 형식화 되었지만, 청대에 이르러 金農등의 개성파 화가들에 의해 보다 담채가 곁들여진 화사한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매화는 묵죽과 함께 고려 중기부터 그려졌으며 조선시대에는 각 시기마다 구도와 기법을 달리하면서 독특한 양식으로 전개되었다.  조선 초,중기에는 선비들의 기상과 밀착되어 고담한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후기에는 문인화의 담백한 분위기가 강조되다가, 말기에 이르러 趙熙龍(조희룡)에 의해 봄의 화사한 계절적 정취와 함께 보다 회화성을 짙게 나타내었다.  난초를 곡선미, 대나무를 직선미로 본다면 매화는 굴곡미에서 그 조형적 특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매화를 그리는 데는 전통적으로 다섯 가지의 필수적인 방법이 있다.  뿌리는 서로 얽혀야 하고 대목은 괴이해야 하고, 가지는 말쑥해야 하며, 줄기는 강건하고 꽃은 기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36가지의 병이 있다하여 한가지라도 잘못 그리면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기본 수련의 중요성과 함께 매화 역시 높은 경지에 들기가 어렵다는 점을 말해 주는 것으로, 문제는 형식의 충실한 모방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자신의 강성과 뜻을 얼마만큼 구현시킬 수 있는가에 참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4. 국화(菊)

  국화는 다른 꽃들이 만발하는 계절을 참으며 서리 내리는 늦가을에 그 인내와 지조를 꽃피운다.   만물이 시들고 퇴락해 가는 시절에 홀로 피어나는 국화는 현세를 외면하며 사는 은자의 모습이나 傲霜孤節(오상고절)한 군자를 연상케 한다.  그래서 국화는 晩香, 傲霜花(오상화), 佳友(가우), 金華 등으로 불렸으며 국화는 본성이 사방을 좋아하기 때문에 동쪽 울 밑에 흔히 심는 것으로 되어 있어 東籬佳色(동리주색)이라는 별명이 생겼으며, 특히 晉(진)나라의 도연명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더욱 시인 묵객들의 상탄의 대상이 되었다.  국화도 다른 사군자와 마찬가지로 북송 때부터 그려졌으나 묵국만을 전문으로 다룬 화가는 매우 드물었으며, 청나라에 와서 오창석에 의해 회화성이 강한 彩菊(채국)이 많이 그려졌다.   국화 전체 모습의 운치는 꽃이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으면서 번잡하지 말아야 하며, 잎은 상하좌우전후의 것이 서로 덮고 가리면서도 난잡하지 말아야 한다.  꽃과 꽃술은 덜 핀 것과 활짝 핀 것을 갖추어서 가지 끝이 눕든지 일어나 있어야 한다.   활짝 핀 것은 가지가 무거우므로 누워 있는 것이 어울리고, 덜 핀 것은 끝이 올라가는게 제격이다.  그러나 둘다 너무 심해서는 안된다.  잎의 형태는 다섯 갈래로 갈라지고, 파진 곳이 네 군데가 있어서 그리기가 어렵다.  이를 나타내는 데는 反葉法, 正葉法, 折葉法(절엽법) 등의 화법이 있다.  국화는 늦가을에 피는 서리에도 오연한 꽃이다.  그러므로 섬세하고 화사한 봄철의 꽃과는 특성이 다르다.  그림이 종이위에 그려졌을 때 晩節을 굳게 지켜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국화를 대하는 느낌이 들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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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
사군자 화제 추가 - 석수난향(石壽蘭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