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화교실

韓國畵의 題款 藝術

 

韓國畵의 題款 藝術

  전통적인 한국화에는 지면 위에 詩文, 書藝, 篆刻, 繪畫 등이 함께 어우러져 어떻게 보면  표구를 통하여 완성된 하나의 작품만도 綜合藝術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합 예술적 성격은 중국화, 일본화와 더불어 동양의 예술의 독특한 양식이라 하겠다. 韓國畵上에 題한 詩文의 내용과 書藝의 필치는 繪畫의 意境을 보충하고 深化하는 동시에 회화 예술의 표현 형식을 풍부하게 하며, 화가의 개성을 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詩文, 書藝, 繪畫를 결합하여 고래로 ‘三美’ 또는 ‘三絶이라고 칭한다. 三美 또는 三絶이라고 할 때, 이는 詩文과 書藝 및 繪畫를 종합적으로 예찬하여 붙이는 말이며, 이는 동양 회화에서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예술 경계인 것이다.

  題款은 落款, 款題, 題畵, 題字, 혹은 款識 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款識는 고대에 鐘鼎彝器에 鑄刻된 문자를 말한다. 顔師古 註釋의 ꡔ漢書 郊禮志ꡕ에 “鼎細小, 又有款識, 不宜荐于宗宙”라는 글귀가 보이는데 여기에 ‘款識’라는 기록이 보인다. 款은 刻이요, 識는 記라 하기도 하고, 더러는 陰文을 款, 陽文을 識라고도 한다.

  題款 예술은 풍부한 회화 사상은 물론 形式美도 포함하고 있으니, 이를 연구함은 회화 속에 숨어있는 문학적, 회화적 가치를 찾아내는 일이기도 하므로 積極的 意義가 있다 하겠다.


  1. 題款의 발생과 발전

  한국화의 회화 양식적 뿌리는 아무래도 중국화에서 찾아야 하리라고 본다. 그렇다면 중국화의 題款은 어느 때에 시작되었을까? 여기에는 대체로 세 가지 설이 있다.

  (1) 唐代에 비롯되었다는 說이 있다. 淸代 錢叔美는 ꡔ松壺畵億ꡕ중에 이르기를, 그림의 款識는 唐人이 다만 나무 뿌리나 돌틈에 小字로 썼으나 대개 글씨를 잘 쓰지는 못했다. 대개는 종이 뒷면에 기록했을 따름이다. 宋代에 이르러 그림을 그린 年月을 기록 한 行을 썼으니 두 行으로 쓴 것은 없다. 그런데 오직 東坡만이 큰 行書 또는 楷書로, 더러는 三五行으로 跋文을 붙였다.

  (2) 宋代說이 있다. 淸代의 方薰은 ꡔ山靜居畵論ꡕ 중에 이르기를 畵面에 款題하는 일은 蘇軾과 米芾에서 시작하여 元明代에 이르면 허다하다 했다.

  (3) 元代說이다. 明代의 沈灝는 그의 저서 ꡔ畵塵ꡕ 중에 이르기를, 元 이전에는 거의 題款을 사용하지 않았고, 款式을 돌틈에 숨기거나, 글씨를 두려워하여 잘 쓰지 못했거나 畵局을 상하게 하기가 일쑤였다 했다. 나중에 그림과 글씨가 모두 뛰어나 아름답게 題款을 하게 된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학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중국화의 제관은 唐代에 시작되었고 小字로 樹根이나 石罅의 가운데에 썼다.

  둘째, 宋代에 이르러 年月을 기록하기 시작하였으나 다만 細楷 一行으로 썼다.

  셋째, 蘇軾과 米芾에서 비롯하여 題款에는 行楷를 사용하여 三五行으로 썼다.

  넷째, 元 이후에는 題畵가 많았고, 書藝와 아울러 繪畫가 함께 뛰어났다.

  이상의 몇 가지 사항에서 살펴본 바, 唐代에 題款이 이미 발생하였으나 다만 초기 단계에 지나지 않았고, 宋代의 蘇軾, 米芾이 題款 예술을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으니, 이는 題款 예술의 過渡 단계이고, 元代 이후에야 題款 예술이 成熟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한국화의 제관은 그렇다면 언제 비롯되었을까?


  漢代 人物畵가 題榜을 발생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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