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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강 - 대전 지명 이야기

대전(大田) 지명 이야기<?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도정 권상호 편

  동쪽은 충청북도 옥천군, 서쪽은 충청남도 공주시, 남쪽은 논산시·금산군, 북쪽은 연기군 및 충청북도 청원군에 접하고 있다. 서해안개발시대를 맞아 중부권의 중추기능을 담당하는 성장거점도시로 발전한 대전(大田)은 순우리말로 ‘한밭’으로 ‘큰 밭’을 뜻한다. 그래서 통칭 ‘한밭마을, 한밭고을’이라고 불렀다.

 

마한 : 신흔국(臣釁國) 유성구 계산동, 대정동 부근으로 추정.

백제 : 우술군(雨述郡)

통일신라 : 비풍군(比豊郡)

고려 : 회덕현(懷德縣), 유성현(儒城懸), 진잠현(眞峴->鎭嶺->鎭岑縣)에 속한 지역

조선 : 공주목(公州牧)에 속함

  헌종 12(1600) 호구 : 2,490가구, 인구 : 5278명 여 5017

1895(고종 32) : 지방행정 제도의 개편으로 회덕군(懷德郡), 진잠군(鎭岑郡)

1914 3 1 : 大田郡, 大田面(大田邑, 大田府로 발전)이 신설.

1949 8 15 : 大田市

1989 1 1 : 유성구(儒城區), 대덕구(大德區)를 신설하는 등 행정구역이 늘어나게 되면서 대전직할시(大田直轄市)가 되었으며,

1995 1 1일 대전광역시(大田廣域市)로 명칭 변경.

 

  20세기 초까지 한적했던 ‘한밭마을’이 커지게 된 것은 1905년 경부선의 통과역으로 결정되고, 1910년 회덕군청이 이곳으로 이전되었으며, 1913년에 대전을 출발점으로 하는 호남선이 개통되어 영호남을 연결하는 교통상의 요지로 대두되면서부터이다.

  신라 경덕왕 때에 지명과 인명의 한자화가 작업이 많았는데, 전국적인 한자화 작업은 일제 때 이뤄졌다. 大田도 당시 토지 대장을 작성하면서 토박이 땅이름을 한자로 번역했다고 본다.

  대전은 경부선·호남선, 경부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의 분기점이 되는 교통의 요지로서 지금까지는 소비도시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대덕연구단지 조성,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 개최, 3군사령부 이전 등을 계기로 행정·과학 중심도시,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중핵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특히 서울-부산 간 고속전철 건설도 추진되고 있어 이들 사업이 완성되는 2000년대에는 제2의 행정수도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도시로 발전할 것이다. 동구(東區)·중구(中區)·서구(西區)·유성구(儒城區)·대덕구(大德區) 5개구 86개 행정동 177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소재지는 중구 대흥동이다.

 

  대전광역시는 본래 침식분지인 대전분지에 발달한 도시이다. 분지의 남동쪽에는 식장산(食藏山), 동쪽에는 구봉산(九鳳山), 북동쪽에는 계족산(鷄足山), 응봉산(鷹峰山)이 있으며, 남쪽에는 보문산(寶文山)이 솟아 있다. 서쪽에는 관암산(冠岩山:526m)·우산봉(雨傘峰:574m)·도덕봉(道德峰:534m)이 솟아 있다. 그러나 현재는 시역이 분지 범위를 넘어 확장되어 동쪽의 경우 분지 바깥쪽에 위치한 대청호(大淸湖)가 시의 경계부를 이룬다. 대전분지는 다시 기복이 적은 구릉인 마봉(馬峰:191m), 옥녀봉(玉女峰:120m), 우성이산(179m), 매봉(140m) 등에 의해 남동부의 대전분지, 북부의 탄동분지(炭洞盆地), 중서부의 유성분지(儒城盆地)로 구분된다. 대전분지는 대전의 중심지를 이루며 유성분지에는 유성구가 자리잡고 있다. 식장산맥(食藏山脈)이 남북으로 뻗어 있는 동남부지역, 관암산·도덕봉이 솟아 있는 서부지역은 비교적 고지대이나 북부지역은 낮은 구릉지와 평야지대로서 저지대를 이룬다. 동북부지역을 흐르는 금강은 청원군과의 경계를 이룬다. 갑천(甲川)·대전천(大田川)·유등천(柳等川)·유성천(儒城川)·지족천(智足川)·대동천(大東川) 등과 금강수계의 여러 지류가 분지 사방에서 흘러 들어와 분지의 북부에서 합류한 뒤 좁은 하곡을 거쳐 북류하여 금강으로 유입된다. 이들 하천유역에는 서대전평야(西大田平野)·삼천동평야(三川洞平野) 등 비옥한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다. 북동부지역에는 금강에 대청 댐을 막아 이루어진 대청호가 있다.

 

  식장산(食藏山, 623.6m) : 대전의 동쪽에 우뚝 자리 잡은 식장산은 대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대전 동구와 충청북도 옥천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세천동, 산내동 일원에 위치한 산이다. 백제시대 성을 쌓고 군량을 많이 저장하고 신라침공을 방어하던 요새지였다는 기록에 연유하여 식장산이라 불렀다는 유래와, 먹을 것이 쏟아지는 밥그릇이 묻혀 있다 하여 식기산 또는 식장산이라 했다는 전설.

  구봉산(九鳳山, 264.1m) : 계룡산의 산줄기가 동남쪽으로 치달리다 진잠에서 불끈 솟아나온 아홉 봉우리가 있다하여 구봉산(九峯山)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일설에는 아홉 마리 봉새형으로 구봉산(九鳳山)으로도 불린다. 구봉산은 서구 관저동, 가수원동, 괴곡동, 흑석동, 봉곡동에 둘러싸여 길게 서 있으면서 아홉 개의 봉우리가 모두 제각기 멋을 자랑한다.

  계족산(鷄足山, 429m) : 산줄기가 닭발처럼 퍼져 나갔다 하여 계족산이라 부른다.

  보문산(寶文山, 457m) : 중구는 대전광영시의 심장부로 보문산, 방화산 등이 있다. 보문산은 보물이 묻혀있다 해서 보물산으로 부르다가 보문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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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
대전의 인물
  김만중 : 1635 ~ 1720(인조 13년 ~ 숙종 46년), 호 서포(西浦) 사계 김장생의 증손자이며 창주 김익희의 아들로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공부함. 서포만필, 구운몽 등을 저술하였고 국문학상 뛰어난 업적을 남김.
  김옥균 : 1851 ~ 1894(철종 2년 ~ 고종31년), 호 고부(古符) 동구 이사동 외가에서 출생. 박규수, 오경석등과 함께 개화당을 조직하고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며 개화운동을 전개함.
  박문수 : 1691 ~ 1756(숙종 17년 ~ 영조 32년), 호 기은(耆隱)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판서, 경기도 관찰사, 호조판서 등을 역임함. 영조 3년 암행어사로서 부정한 관리를 적발했고 이때의 많은 일화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음.
  박팽년 : 1414 ~ 1456(태종 17년 ~ 세조 2년), 호 취금헌(醉琴軒)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가 되어 여러 가지 편찬사업에 참여하였고,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종서 등과 같이 처형된 사육신중의 한 분임. 동구 가양동에 유허비가 있고, 선생의 묘는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음.
  송시열 : 1607 ~ 1689(선조 40년 ~ 숙종 15년), 호 우암(尤菴)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고 노론의 영수. 효종의 명을 받아 북벌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자의 대비복상문제, 경종책봉의 시기상조 상소 등으로 유배되었다가 정읍에서 사사(賜死)됨. 율곡 이이, 사계 김장생의 학문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집대성하였으며 동방의 주자(朱子)로 일컬어짐.
  송준길 : 1606 ~ 1672(선조 39년 ~ 현종 13년), 호 동춘당(同春堂)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예학의 대가임. 이조 참의, 좌참찬 등을 역임하였고, 우암 송시열과 함께 북벌계획에 깊이 참여함.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됨.
  신채호 : 1880 ~ 1936(고종 17년 ~ 1936), 호 단재(丹齋) 중구 어남동 도리미 외가에서 출생하여 8살 때 청원군 남성면 귀래리로 이사감. 독사신론, 조선사 연구초, 조선상고문화사 등을 저술하였고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임. 대만 기륭항에서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서 옥중 순국함.
  신흠 : 1566 ~ 1628(명종 21년 ~ 인조 6년), 호 상촌(象村) 동구 주산동의 외조부 추파 송기수의 집에서 성장하였으며, 이조 판서,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음. 상촌집 등의 저서가 있으며 한문학의 ‘문장 4대가’중의 한 분임
 
  대전의 文化財
  회덕 동춘당 : 조선 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 송준길(1606∼1672)선생의 별당이다. 늘 봄과 같다는 뜻의 동춘당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으로 이곳에 걸린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돌아가신 6년 후 숙종 4년(1678)에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동춘당은 굴뚝을 따로 세워 달지 않은 것이 특징인데, 왼쪽 온돌방 아래 초석과 같은 높이로 연기 구멍을 뚫어 놓아 유학자의 은둔적 사고를 잘 표현하고 있다. 즉, 따뜻한 온돌방에서 편히 쉬는 것도 부덕하게 여겼기 때문에 굴뚝을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유학적 덕목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회덕 쌍청당 : 조선 전기의 학자인 쌍청당 송유(1389∼1446) 선생이 지은 별당이다. 건물 이름은 선생의 호인 ‘쌍청’을 따다 붙였는데 청풍과 명월의 맑은 기상을 마음에 담고자 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 세종 14년(1432)에 지은 뒤로도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 지었지만 원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남간정사 :  낮은 야산 기슭 숲이 우거진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 남간정사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지은 것이다. 우암은 소제동에 살 때 서재를 짓고 능인암이라 하여 학문을 연마하였다. 숙종 9년(1683) 능인암 아래에 이 건물을 지었는데, 많은 제자를 기르고 그의 학문을 대성한 유서 깊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