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계소식

서예계 큰별 일중 김충현 선생 별세

서예계의 큰별 일중(一中) 김충현 선생이 2006년 11월 19일 오후 8시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85세.
김충현 선생은 한글서체개발에 매진, 훈민정음의 고판본체에 한문서예의 전법과 예법을 도입한 ‘고체’를 구사해 한글서예의 새로운 표현영역을 제시했다. 독실한 불자인 김충현 선생은 한문서예에도 능해 해, 행, 초를 두루 섭렵했고 각 서체의 특징을 한 화면에 담아내는 행, 초에서도 독보적인 경지를 이룩했다.
작품으로는 ‘유관순 열사비 비문’ ‘이충무공 한산도 제승당 비문’ ‘월인천강지곡’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301호. 발인은 23일. (02)2072-2091.

[삶과추억] 한문·한글 모두 능통 … 서예계 `큰 획`
 
한국 서예계의 큰 별이 졌다. 일중(一中) 김충현 선생은 소전 손재형(1981년 작고) 선생과 더불어 한국 서예의 양대 산맥을 이뤄왔다. 손재형 선생이 전서를 중심으로 실험적인 글자체인 '소전체'를 발전시켰다면, 일중은 반듯한 글씨인 해서를 바탕으로 정통을 따르는 글씨체인 '일중체'를 뿌리내렸다.

98년 서예박물관 개관 10주년 기념 회고전을 마련했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이동국 학예사는 "선생님의 한문 서예는 전 서체가 뛰어나고 아름답다. 한문뿐만 아니라 한글 서예에도 능통한 몇 안 되는 분"이라며 "전시장이 북적거릴 정도로 선생님의 서예는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21년 서울에서 태어난 일중은 중동고를 졸업한 뒤 김용진씨에게서 예서를, 윤용구씨에게서 행서를 사사했다.

이후 48년부터 61년까지 경동고 교사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과 학교 서예 교육의 저변 확대에 힘썼다. 당시 이미 한글과 한문 서예 글씨로 이름이 알려져 옛 위인들의 비문을 쓰기 시작했다.

충남 병천의 유관순 열사비 비문과 이 충무공의 여러 비문 등은 정인보 선생이 글을 짓고, 일중이 글씨를 써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다. 또한 삼성그룹의 옛 로고인 한자 '三星'과 설록차로 유명한 태평양(현 아모레퍼시픽)의 '설록차' 글씨 등 대중에게 잘 알려진 글씨를 많이 남겼다.

일중은 한문뿐만 아니라 한글 서예 사랑에도 남달랐다. 한글 말살정책으로 한글 붓글씨가 금지됐던 일제시대에 그는 '우리 글씨 쓰는 법'이라는 한글 서예 교본을 준비했다가 해방되자마자 출간하는 열의를 보였다. 55년엔 중.고교생용 서예 교본인 '우리말 중등글씨체'를 집필해 학교 서예의 기본 교재로 애용됐다.

그는 또 많은 후학을 길러내 서예의 맥을 이어왔다. 요즘 유럽에서 주목받는 서예가 정도준씨는 "선생님은 해방 후 궁체.고체를 정립하는 등 선구적인 역할을 하셨다. 선생님에게 글씨를 배운 것은 큰 기회이자 영광이었다"고 말했다.

서예가협회 회장을 지내는 등 활발히 활동하던 고인은 90년대 후반 파킨슨병의 발병으로 작업을 접고 투병 생활을 해 왔다. 그의 제자인 신두영씨는 "글씨를 가르치실 땐 엄했지만 평상시엔 참 자상한 분이었다. 병중에 오래 계셔서 많은 제자가 안타까워했다"고 말했다.

후학 양성과 서예 저변 확대의 업적으로 보관문화훈장(87년). 은관문화훈장(2004년)을 받았다.

박지영 기자

* 브리테니커 사전의 김충현

1921. 4. 2 서울~./>

서예가.

호는 일중(一中). 어릴 때부터 일본인과는 타협하지 않는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14세 될 때까지 학교를 들어가지 않았고 아버지의 지도 아래 한문과 서예 공부를 했다.

1938년 중학교 1학년 때(17세) 동아일보사 주최 전조선학생작품전에서 서예로 5개 부문을 통틀어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다음해 〈동아일보〉에 '궁체'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데뷔는 1941년경으로 본다. 1942년 일제의 눈을 피해 〈우리 글씨 쓰는 법〉이란 저서를 냈고, 그후 〈중등 글씨체〉·〈중학 서예〉·〈고등 서예〉 등을 출간하면서 서예활동을 전개했다. 애초부터 한글로부터 서체(書體)를 시작한 그는 고체(古體)를 현체(現體)로 쓰는 법의 개발에 몰두했는데 이는 서예가 비록 한자문화권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그로부터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에서였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 추천작가로 추대되었고, 1954년 화신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1958년 동방연서회 이사장을 역임했고 국전의 운영위원과 심사위원, 문교부 검인정 교과서 편찬위원을 지냈다. 그는 반세기에 걸쳐 주로 교육계와 저서를 통해 서예 교육에 전념해왔다. 1981년 회갑을 맞아 비문 등 모두 200여 점이 수록된 서집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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