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4일까지 전시되는 총 130여점의 초상화 중에서 한국 초상화는 모두 34점. 여러 조상들을 함께 그린 ‘그룹 초상화’인 중국의 선세초상(先世肖像)과 일본 무사들의 초상화도 관심을 끈다.
그러나 역시 겉모습뿐 아니라 정신까지 나타내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철칙을 바탕으로 관람자를 꿰뚫어 보는 듯한 한국의 초상화 앞에서는 유독 시간을 오래 들이며 찬찬히 살피게 된다. 수염 한올한올마저 살아있는 듯 묘사한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앞에서는 ‘터럭 한올이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似 便是他人)’는 초상화의 명제를 실감한다. 그런데 주로 작자 미상이 많은 한국 초상화 작품 중에서 무려 7점의 초상화 작가가 바로 ‘채용신’이라는 화가명으로 되어 있다. 또한 한국 초상화로는 드물게 여인의 초상도 들어 있어 더욱 호기심을 자아낸다. 고종황제 어진을 비롯해 최치원·전우·최익현·박해창(2점)의 초상, 그리고 무관초상과 ‘숙부인 장흥 마씨’로 되어 있는 여인의 초상 등 채용신 초상의 주인공들도 왕부터 우국지사, 여인까지 다양하다.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1850~1941년)은 직업화가가 아니라 무과에 급제해 종2품까지 지낸 무관이었다. 화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극세필 필법인 ‘석지필법’을 창안해 사진처럼 정밀하고 섬세한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조선조를 통틀어 가장 많은 80여점의 초상화를 남긴 초상전문 화가였다. 당시 양반들이 주로 손댄 문자향(文字香) 가득한 사군자는 남기지 않았고, 나머지 작품들도 화조화와 산수화가 대부분이다.
어려서부터 그림 잘 그리기로 소문난 그는 22세에 대원군 이하응의 초상화를 그리면서부터 화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50세 전후에 제작한 고종황제 어진으로 왕의 총애를 입었지만 한일합방 후 전라도로 낙향했다. 덕망있는 선비들과 우국지사들의 초상을 주로 그려 최익현·황현·임병찬·김직술·김영상·전우의 초상이 전해 내려오고, ‘운낭자 상’을 비롯해 여인들을 그린 작품도 몇 점 있다. 일본에도 그의 화명이 알려져, 조선총독부의 강력한 요청으로 1917년 일본여행을 하며 일본 귀족들과 장군의 초상을 그렸다.
이때 동경에 가 있던 영친왕과 만나 ‘망국의 한’을 나누며 고종황제의 어진을 전해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숨진 지 얼마 안되는 사체를 보고 그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은 ‘김준길 상’으로 프랑스 소장가의 손에 넘어가 감상할 기회가 흔치 않다.
서울 화단에서 활약하지 않았고, 도화서 화원도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진화가이자 최다초상화가였던 채용신은 국내에서는 최근까지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일찍이 그를 높이 평가해, 1943년 당시 총독부 관리였던 오다 쇼오고가 화신백화점에서 유작전을 열어주었다. 지난 2001년 뒤늦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에서 ‘석지 채용신’전이 열려 그의 예술혼을 재조명하기도 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이원일 학예부장은 “조선조 말 근대정신과 당시 사회상, 그리고 민초들의 삶을 보여주는 초상화를 제작한 유일한 화가”라며 “아직까지도 국내 미술계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