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단문고 소장, 조선후기 일상사 보고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세기 조선후기 지방에 근거한 유학자의 일상사를 고스란히 담은 조선 최대 개인 서간문 1천600여 통이 27일 공개됐다.
개인 소장 문고인 서울 중구 서소문동 아단문고는 충청도 남포현(藍浦縣) 삼계리(三溪里. 현재 충남 보령시 미산면)에서 일생을 보낸 노론 계열 유학자 조병덕(趙秉悳.1800-1870)이 가족과 친지, 제자 등에게 보낸 편지 1천662점을 27일 공개했다.
이들 편지 대부분은 1850-60년대에 작성됐으며, 조병덕이 그의 둘째아들 조장희(趙章熙.1827-1916)에게 보낸 것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하영휘(河永輝) 아단문고 학예연구실장은 "이들 편지에는 남에게 보여주기 싫어한 내밀한 사연이 많아 심지어 '이 편지는 태워버리라'는 내용도 남아있으며, 유학자 본연의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급격한 세태 변화와 극심한 생활고 사이에서 갈등하는 조선후기 한 양반의 일상과 일생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 실장은 2004년도 서강대 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한 유학자의 서간의 통한 19세기 호서(湖西) 사회사 연구」을 통해 조병덕의 가계와 학맥 및 생애ㆍ일상공간ㆍ생계로서의 도덕경제ㆍ정치사건ㆍ조병덕이 구축한 연망(네트워크)을 집중분석했다.
그 결과 하 실장은 이들 조병덕 서간은 급격한 세태 변화에서 종래 주자학적 질서가 완전히 파탄난 조선후기 유학자 양반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나아가 "이것은 그 시대 보편적인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예컨대 이들 편지에는 고부간 갈등으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쫓겨나는 장면이 목격되는가 하면, 조병덕이 조직한 문중계가 완전히 붕괴되어 그의 아버지 제삿날에는 "한 사람도 오지 않고, 한 푼도 들어온 돈이 없다"는 탄식도 쏟아져 있다.
나아가 이미 이 무렵이 되면 조병덕이 몸 담았던 노론 사이에서도 동류 의식은 전혀 없었으며, 양반이 상민이나 지방관아 아전에게 협박을 받는 장면도 출현한다.
당시 경제상과 관련해 하 실장은 "조병덕이 시장에서 구입한 것은 얼마간의 종이와 달력 뿐이었다"면서 "19세기 조선은 일상용품 대부분을 선물로 충당하는 '도덕경제' 체제였으며, 이것이 시장경제 발달을 강력히 저지했다"고 지적했다.
결국 조선후기에는 상업이 발달함으로써 자본주의 싹을 스스로 틔우고 있었다는 '내재적 발전' 혹은 '자본주의 맹아'는 조선에 없었다고 결론내렸다. <사진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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