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우리 산천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그려냈을 뿐 아니라 정형화된 중국 산수화까지도 진경산수화법으로 대담하게 변형시켰다.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16일부터 30일까지 갖는 「대겸재전(大謙齋展」은 진경산수화가 완성된 겸재의 60대 이후 작품들을 중심으로 그의 진경산수화를 본격적으로 조명한다.
지난 1971년 개최된 겸재정선전 이후 30여년만에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겸재의 그림 100점 이상이 소개돼 그의 작품세계의 전모를 본격적으로 엿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음양조화(陰陽調和)와 음양대비(陰陽對比)를 화면 구성의 기본원리로 삼고 중국 남양화법의 묵법(墨法)과 북방화법의 필묘(筆描)를 적절히 취해 독특한 기법을 창안해냈다.
이번 전시에는 백악산, 독락정, 취미대, 자하동 등 서울 진경부터 시작해서 '도산서원' '성류굴' 등 경상남도 청하 현감시절 그린 풍경, 모친상 탈상후 본격적으로 산수에 몰두한 시기에 그려진 '망양정' '삼일포' '월송정' '총석정' 등 관동지방의 풍경과 '단사범주(丹砂泛舟'등 단양팔경을 그린 그림들이 공개된다.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독서여가(讀書餘暇),' 영조16년(1740) 겸재가 양천현령으로 부임해가면서 벗인 이병연(李秉淵)과 석별하며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자'는 약속에 따라 그려진 그림중 하나인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등도 소개된다.
또한 '여산초당' '무송관산' '소상야우'등 중국적 소재를 조선의 산수와 인물 등으로 조선식으로 소화한 작품들도 눈에 띈다. '강진고사(江津孤舍)' '강정만조(江亭晩眺)'등은 겸재의 말년 작품들로, 조선의 진경을 추상화한 작품.
최완수 간송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겸재의 산수는 농도의 차이로 인해 바람이 솔솔 지나가는 듯 시원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라고 지적하고 "우리 산수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해내는데 가장 알맞은 고유 화법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미술사전> 정선 ( 鄭敾 /1676~1759 )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 광주(光州). 자 원백(元伯). 호 겸재(謙齋)·난곡(蘭谷). 약관에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畵員)이 되고 그 뒤 현감을 지냈다. 처음에는 중국 남화(南畵)에서 출발하였으나 30세를 전후하여 조선 산수화(山水畵)의 독자적 특징을 살린 사생(寫生)의 진경화(眞景畵)로 전환하였으며 여행을 즐겨 전국의 명승을 찾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심사정(沈師正)·조영석(趙榮)과 함께 삼재(三齋)로 불리었다.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로 하여 암벽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으나 후계자가 없어 그의 화풍은 단절되었다. 문재(文才)가 없었으므로 다만 서명과 한두 개의 낙관만이 화폭의 구석에 있을 뿐 화제(畵題)가 없다. 저서에 <도설경해(圖說經解)>가 있고 그림 작품으로는 <입암도(立巖圖)><여산초당도(廬山草堂圖)><여산폭포도(廬山瀑布圖)><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금강전도(金剛全圖)> 등이 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은 우리나라의 산천을 독자적 화법으로 그려내어 진경산수화풍을 확립시킨 동시에 진경산수화의 발달에 지대한 공로를 남긴 화가이다. 겸재는 전통적인 절파계의 북종화법과 새로이 유입된 남종화법을 결합시켜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법을 창안해 내는데, 이러한 화법을 토대로 우리나라 제일의 명승지인 금강산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빼어난 경치를 사생(寫生)하여 화폭에 담았다. 특히 평생 여러 차례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였고 100여 폭에 이르는 금강산 그림을 그렸는데, 금강산의 수많은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부감법(俯瞰法)을 써서 구도를 잡은 금강전도(金剛全圖)를 많이 그렸다. 뾰족한 암봉은 수직준법(垂直준法)으로, 나무숲이 우거진 토산은 미점준(米點 )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화풍은 산에 바위가 많고, 소나무가 많이 자라는 우리 산야의 특징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겸재의 화풍은 많은 후배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겸재 일파(一派)를 형성하였으며, 민화의 금강산 그림에서도 그 잔영을 엿볼 수 있다. 겸재의 진경산수화의 의의는 겸재와 이웃에 살면서 30여 년간 교유하였던 조선후기의 문인화가인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 )의 말로 요약될 수 있는데, 그는 겸재 스스로 새로운 화법을 창출하여 그간의 병폐와 누습을 단번에 씻어버렸고, 그 결과 조선의 산수화법이 겸재에서 비로소 새롭게 출발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진경산수 ( 眞景山水 )
조선 후기에 산천을 소재로 그린 산수화. 진경(眞境)이라고도 한다. 이는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의 전통을 바탕으로 한국적인 새로운 화풍을 창출한 가운데 발달하였다. 종래의 형식화된 창작태도에서 벗어나, 현실을 통해 고의(古意)와 이상을 찾고자 한 당시의 사상적 동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 한국의 산천을 주자학적(朱子學的) 자연과 접목시키고자 한 문인 사대부들의 자연친화적 풍류의식도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림의 소재는 전대와 마찬가지로 명승명소(名勝名所)와 별서유거(別墅幽居)·야외아집류(野外雅集類) 등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금강산과 관동지방, 한양 근교의 경관이 가장 많이 다루어졌다.
화풍은 실경산수화의 전통에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남종화법(南宗畵法)을 곁들인 것으로, 이는 정선(鄭敾)에 의하여 개발되었다. 그는 실제로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산천의 특색을 남종화법을 바탕으로 그려 진경산수화풍의 정형(定型)을 수립한 것이다. 정선의 화풍은 강희언(姜熙彦)·김유성(金有聲)·최북(崔北) 등으로 계승되었으나, 18세기 후반에 새로 등장한 강세황(姜世晃) 등의 화가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형식화된 당시의 진경산수화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실제 경관과 부합한 사실적인 기법을 강조하였는데, 그들의 이러한 화풍은 김홍도(金弘道)에 의하여 구도와 필법이 더욱 치밀하고 박진감 넘치는 화풍으로 발전하였으며 그것은 다시 이인문(李寅文)·이재관(李在寬) 등으로 계승되었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는 정선과 김홍도파 이외에 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 등의 문인화가들도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였으며, 이들은 남종화법과 함께 문인풍의 격조 높은 화풍을 바탕으로 색다른 개성미를 보여주면서 이 시대 진경산수화의 다양한 흐름에 이바지하였다. 이처럼 진경산수화는 실경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려 하였던 근대지향적인 의의를 지니면서 조선 후기의 회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이는 다시 근대 및 현대에 생긴 어떠한 특정 경관이 아닌 생활주변의 일상적인 풍경을 그린 사경산수화(寫景山水畵)로 그 전통이 계승되어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정선의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를 비롯하여 강희언의 《인왕산도》, 김석신(金碩臣)의 《도봉산도》, 이인상의 《구룡연도(九龍淵圖)》, 강세황의 《송도기행명승도첩(松都紀行名勝圖帖)》, 김홍도의 《사군첩》, 이인문의 《단발령금강전도(斷髮令金剛全圖)》, 조정규(趙廷奎)의 《금강산병풍》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