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예사 새章 연 名品 2점 발견
2000년 12월 17일 (일)
17일 공개된 안평대군의 글씨는 교과서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명필의 진품으로 평가받고 있다.이미 국보로 지정된 ‘소원화개첩’에 비해 작품성이 뛰어난데다 권위있는 학자들이 한국 서예사의 새 장을 여는 수작으로 감정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광개토대왕비에서 시작돼 신라의 김생과 고려의 탄연,안평대군,석봉 한호,백하 윤순,추사 김정희로 이어지는 한국 서예사에서 김생과 탄연은 금석문만 전해지고 조선조 초기의 안평대군마저 진적이 드물어 이들 ‘3대 명필’의 연구에 어려움을 겪어왔다.특히 안평대군의 경우 조맹부 서체의 맹목적 수용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서예 미학의 꽃을 피운 것으로 평가돼 갈증이 더욱 컸다.1452년 세종 때 나온 경오자(庚午字)를 개주(改鑄)해 만든 임신자(任申字)의 자모(字母)를 쓰기도 했으나 지금은 활자본 책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번에 발견된 글씨 2점 가운데 ‘칠언절구(24.8×18.9㎝)’는 곱고 아리따운 송설체에다 가을의 고독을 담아 500년전의 숨결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萬里關山桂影秋 何人橫玉倚高樓 一聲吹入廣寒殿 自有知音在上頭(멀리 관산땅에 계수나무 그림자 드리운 가을/누가 높은 누각에 앉아 옥피리를 부는가/그 소리 은하수 하늘 끝까지 퍼져가니/아,나는 알겠네 저기 내 친구가 있다는 것을).
글은 쪽물을 들인 감지에 금니(金泥)로 썼다.금니는 금을 진흙처럼 개어서 만든 것으로 왕실이나 사찰에서 사경(寫經)을 할 때 애용한 희귀 재료다.세번째 구의 ‘殿’자가 끝에 나타난 것은 바탕을 첩 크기에 맞춰 잘라 표구하는 과정에서 잘못 붙여진 것이다.
’夫天地者 萬物之逆旅 光陰者 百代之過客…’으로 시작되는 두첩짜리 ‘춘야연도리원서’(25.4×11㎝,12.8㎝)는 형제들이 복숭아꽃과 자두꽃이 만발한 정원에서 만나 놀이를 즐기는 광경을 묘사한 이백의 산문.감지보다 어두운 흑지에 구사한 안평대군의 섬세한 필치가 돋보인다.예술의 전당측은 안평대군이 1450년에 남긴 석각(石刻) ‘送嚴上座歸南序’가 이 작품과 가장 가까운 예로 보고 글씨를 하나하나 비교해 가며 연구를 거듭한 끝에 진적임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 안평대군은 누구인가?
안평대군(1418∼53)은 조선조 전기의 왕족이자 서예가.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나 큰형 문종과 둘째형 세조,조카 단종 사이에서 긴장과 갈등의 삶을 살았다.나중에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과 힘을 겨루다 이른바 ‘계유정난’으로 사약을 받았다.자는 청지(淸之) 매죽헌(梅竹軒) 비해당(匪懈堂).
그러나 안평대군의 진면목은 세도가보다 예술가의 삶에서 더욱 빛난다.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불린데다 거문고에도 능해 세종 당시 예원(藝園)의 총수로 군림했다.지금의 서울 누상동쯤 되는 인왕산 산록에 무이정사(武夷精舍)와 담담정(淡淡亭)을 짓고 문사와 교유하고 중국 서화를 연구하는 등 당시 문화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그의 주문에 따라 그려진 ‘몽유도원도’가 그것을 확인해준다.안평대군은 스스로 발문을 통해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를 적은 다음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와 김종서 등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시를 짓게 해 대형시화집까지 만든 것이다.그림 속의 ‘도원’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나타냈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정치성을 넘어 그의 글씨는 송설체를 따르면서도 스스로 한국적인 필법으로 발전시킨 업적으로 추사를 앞서는 조선조 최고의 명필로 기록되며 김생 탄연과 더불어 ‘한국의 3대 명필’의 반열에 올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