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역사부 이재정(44.사진) 학예사는 지난해 9월의 감격을 잊지 못한다. 수요일 야근을 했던 날이다. 박물관 한글실에 전시된 '두시언해' 초간본(1481년 발간)을 보는 순간 낯익은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바로 '깃'자(맨 왼쪽 활자)다. 다른 글자보다 'ㅅ' 받침이 크고 길게 찍힌 형태가 그가 수장고에서 봤던 금속활자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순간 가슴이 떨렸다. 그는 연구실에 돌아와 1461년 간행된 '능엄경언해'를 조사했다. 불경의 하나인 '능엄경'을 한글로 옮긴 '능엄경언해'는 1455년(세조 1년) 주조된 금속활자인 '을해자'로 인쇄한 최초의 책이다. 불경에 찍힌 글자와 박물관에 있는 금속활자를 일일이 대조한 그는 또다시 흥분에 휩싸였다. 경전의 글자와 박물관 소장 활자 30여 개의 모양새가 똑 맞아떨어졌다. 지금까지 존재만 알려졌을 뿐 실물이 없었던 '을해자'를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글 금속활자를 처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국내 학계에선 조선 초기인 15세기에 주조된 금속활자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게 통설이었다.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든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는 1455년께 제작됐다. <본지 1월 5일자 21면> "고려시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나라라는 자부심이 크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제대로 된 실물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박물관에 있는 금속활자는 대부분 16세기 이후 주조된 것이죠. 그날 야근을 하지 않았다면 을해자는 영영 못 찾았을지도 모릅니다." 이씨의 원래 전공은 중국사다. 고려대에서 중국 명.청시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인생은 박사학위를 딴 뒤 2000년 5월 박물관 유물부에 들어오며 달라졌다. 박물관 소장품을 대여.정리하는 일을 맡다가 한글활자의 조형미에 푹 빠졌다. 한마디로 활자가 "너무 예뻤다"고 전했다.그는 이후 활자연구에 매달렸다. 현재 중앙박물관에는 금속활자.목활자 합쳐 약 80만 개의 활자가 남아 있다. 조선시대 규장각에 있었던 활자들은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거쳐 광복 이후 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왔다. 이 중 을해자 30여 개를 포함한 한글 금속활자는 750여 개에 이른다. 이씨는 2004년부터 '중앙박물관 소장 한글활자 연구' '중앙박물관 소장 금속활자의 과학적 분석' 등의 논문을 잇따라 발표했으며, 이번에 한글 금속활자를 총정리한 자료집을 냈다. "을해자는 다른 활자와 형태가 다릅니다. 활자 뒷면과 측면을 평평하게 다듬었죠. 16세기 이후에 나온 활자는 뒷면에 홈이 파져 있거든요. 그래서 궁금증이 생겼어요. '왜 이 활자만 모양이 다를까'를 알아내는 과정에서 뜻밖의 발견을 하게 된 거죠." 그는 "앞으로 할 일이 더 많다"고 말했다. 일단 한글활자 정리를 마쳤지만 40만 개에 이르는 한자 금속활자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고 했다. 현재 부수별로 분류된 한자활자를 글자별로 정리하면 '을해자 한자'도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19세기 이전의 금속활자가 40만 개나 남아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중국에도 이만큼 많은 금속활자는 없어요. 정말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입니다. 하지만 국내의 활자 연구는 너무 미진해요. 전문가도 별로 없죠. 이번 발견을 계기로 활자의 제작.조판.성분.활용 등을 상세하게 짚어보는 작업이 뒤따라야 할 겁니다. 그래야 금속활자 종주국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아직도 풀지 못한 의문점이 있다고 했다. 조선왕조가 왜 그토록 많은 금속활자를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만들기 쉽고 돈도 적게 드는 목활자를 양산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금속활자는 중앙정부가 사용했던 겁니다. 각종 서적의 '정본(正本)'을 만들려는 차원에서 금속활자를 선호한 것 같습니다. 지방에선 중앙정부가 내려보낸 책을 목판으로 복각(覆刻)해서 펴내곤 했죠.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도 조선의 금속활자 기술을 배워갔어요. 향후 한국과 중국의 문자교류사를 연구해 보다 엄밀한 증거를 찾아내고 싶습니다." 글=박정호 기자<jhlogos@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cogito@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