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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은 전정우 선생 인천광역시초대전에 부쳐 -
김병기 (서예가, 서예평론가,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총감독, 전북대 중어중문과 교수)
Ⅰ. 인연(因緣)
사람이 서로 안다는 것은 꼭 얼굴을 마주보고 인사를 나눈 관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손을 내밀어 악수하면서 通姓名을 하기 전에도 아는 사람은 서로 잘 아는 경우가 있다. 물론, 공적인 인사들이나 유명 연예인들은 그들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을 안다. 이렇게 아는 사이는 일방적인 아는 관계이므로 ‘서로 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한쪽에서만 알면서도 ‘내가 그 사람을 잘 안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바로 그 사람에게 경도되어 이미 그 사람을 자신의 마음 안에 자리하게 한 경우이다. 송나라 때에 황정견(黃庭堅)이 바로 소동파(蘇東坡)를 그렇게 안 사람이다. 황정견은 소동파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의 마음 안에는 이미 소동파가 때로는 그의 선배로, 때로는 스승으로, 때로는 친구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황정견의 나이 34세가 되던 해에 비로소 소동파에게 〈상소자첨서(上蘇子瞻書)〉라는 편지와 함께 〈古風〉이라는 제목의 시 3수를 지어 보낸다. 편지와 시에 오래 전부터 존경해온 자신의 진심을 담은 것은 물론이다. 황정견의 편지와 시를 받은 소동파는 즉시 〈答黃魯直書〉라는 답신을 보낸다. 편지 내용은 두 말할 나위 없는“Me too”였다. 이렇게 해서 송나라를 대표하는 양대 시인이자 서예가인 소동파와 황정견의 그 깊은 교유가 시작된다.
나는 심은(沁隱) 전정우(全正雨) 선생을 전혀 알지 못했다. 아니 알 기회가 없었다. 심은 선생이 1987년 3월과 9월에 각각 동아미술상과 제6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을 수상하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을 때, 나는 대만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느라고 대만국립중앙도서관 연구실에 묻혀 한국의 신문도 보지 않고 책과 씨름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화려한 수상 소식을 알 리가 없었다. 나는 학위를 마치고 1988년 8월에 귀국했다. 당시 한국 서단은 서예협회가 미술협회로부터 독립해 나오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고, 그 파장이 1990년대까지 이어지며 서단에 새로운 변화의 기운이 감돌 때였다. 그러나 한국 서단에 이는 그런 변화의 현장 어디에도 심은 선생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는 1989년부터 《월간서예》에 글을 연재하면서 글에 대한 독자들의 좋은 반응에 힘입어 서예계 사람들과 많이 알게 되었다. 서예 단체들로부터 특강 요청을 많이 받으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심은 선생과는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 심은 선생은 그렇게 조용히 자신의 ‘공부’에만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沁隱’은 호의 의미 그대로 그의 고향인 沁都(沁島) 즉 강화도에 혹은 인사동의 연구실에 스며들 듯이 숨어 지내며 공부에 집중한 것이다.
1988년 귀국 후, 나는 한국 서단을 이해하기 위해 묵은 신문을 들춰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막 새로운 체재를 갖추고 사업을 시작한 《월간서예》 외에 다른 어디에서도 서예계 소식을 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묵은 신문을 스크랩하던 나는 동아미술상을 수상한 심은 선생의 〈金克己 선생 시〉를 쓴 작품을 보았고, 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 수상 작품인 〈益齋 선생 促織詩〉 작품도 보았다. 그때부터 내 마음 속에는 ‘심은 전정우’라는 이름이 자리하게 되었고 기회가 될 때마다 잡지에 소개되는 그의 작품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황정견의 마음 안에 소동파가 자리하듯이 내 마음 안에 심은 전정우 선생이 자리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와 심은을 황정견과 소동파에 비유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해 없기 바란다.)
2004년 9월 2일~8일, 나는 백악미술관에서 나의 첫 개인전을 〈사람과 서예-서예가 웰빙이다〉라는 제목으로 가졌고, 심은 선생은 같은 기간에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沁隱全正雨展>이라는 제목 아래 개인전을 가졌다. 이때, 심은 선생이 먼저 내 전시장을 찾아왔다. 나는 선배가 먼저 찾아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로 선생의 전시장을 찾아갔다. 이렇게 우리는 첫 만남을 가졌고, 그 후, 2007년 한국미술관에서 열렸던 산민 이용 선생의 초대전에 하객으로 갔다가 저녁 식사자리에 함께 앉았다. 이때도 별 이야기는 없었다. 다만 앞으로 자주 만나자는 얘기만 나누었다. 그 후, 나는 딱 한 번 인사동에 있는 심은 선생 서예연구실을 방문하였다. 역시 내 생각대로였다. 당시 그의 서실에는 천자문을 각종 字體로 700번 이상을 쓴 실적의 일부가 실지 작품으로 보관되어 있었다. 나는 그가 넘겨주는 대로 천자문을 보기 시작했다. 경이로움 자체였다. 천자문을 700번을 썼다는 것은 일단 글자 수로 70만자를 썼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 70만자를 대전, 소전 가릴 것 없이 각종 전서체로, 서한 예서, 동한 예서는 물론 죽간, 목간에 이르기까지 각종 예서체로 다 써봤고, 6조 해서는 물론, 당나라의 해서 명가가 썼던 서체로 다 써보았으며, 왕희지를 시작으로 당·송·원·명·청 여러 대가들의 행초서체로도 1,000자씩을 다 써봤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 노력과 집념에 그만 경도되고 말았다. 그리고 글씨를 쓸 수 있는 바탕이 될 만한 재료라면 한지 조각이든 양지 조각이든 판지이든 뭐든지 모아서 다 빼곡하게 작품을 구상해 놓은 그 성실성에 그만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심은이 ‘천자문 서예가’라는 점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새삼 다시 천자문 얘기를 꺼내는 것은 진부하게 들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서단에서 심은의 천자문 얘기는 100번을 강조하여 얘기한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단순한 글씨 쓰기 연습이 아니라, 문자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천착이요, 1,000글자를 一氣啊成하게 쓰는 끈기의 수련이요, 문자에 대한 경배이며, 서예에 대한 경외의 표시이고, 무엇보다도 자신과의 싸움에 대한 연속된 승리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10년 공부’라는 말이 있다. 어떤 분야라도 10년이라는 세월을 투자하다보면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공감했기 때문에 예로부터 있어왔던 말이다. 심은은 그 ‘10년 공부’를 제대로 했다. 단지 세월만 10년을 투자한 게 아니라, 자신의 온 몸을 때로는 뜨겁게, 때로는 차갑게 그 세월 속에 녹여 넣은 것이다. 잘못 한 10년 공부를 일컬어 속어로 ‘10년 공부 도로 아미타불’이라고 한다. 방향을 잘못 잡아 헛물을 켠 시간투자를 비웃거나 안타깝게 여길 때 사용하는 말이다. 심은의 ‘천자문 쓰기 서예공부’는 ‘도로 아미타불’의 속성이 단 1%도 끼어들 틈이 없는 제대로 된 ‘10년 공부’ 아니 ‘20년 공부’였다. 나는 심은의 ‘10년 공부’에 이렇게 경도되어 들어갔다. 그리고 2013년, 나는 천자문의 저자 주흥사(周興嗣)의 고향인 중국의 하남성 沈丘에서 주흥사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천자문 국제서예전과 학술대회〉에 초청을 받았을 때 주최 측에 “당신네 나라 중국에 천자문을 각기 다른 서체로 700본 이상을 쓴 서예가가 있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국의 ‘심은 전정우’라는 특별한 서예가를 반드시 초청하라고 강력하게 추천했다. 그 해 9월, 나와 심은 선생은 3박4일 동안 심구에 머물며 전시에도 함께 참가하고 학술대회에도 함께 참가하였다. 내가 1988년 9월 대만유학에서 돌아온 후, 묵은 신문을 뒤적여 1987년에 있었던 그의 화려한 수상 경력과 수상작으로부터 받은 느낌으로 인해 가슴에 품기 시작했던 심은 전정우의 모습을 천자문의 고향인 중국 땅 沈丘를 여행하는 4일 동안에 자세히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때 그의 너털웃음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심은 전정우’의 열정과 끈기와 자신감과 자부심과 대인관(待人觀)을 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철저한 작가 정신을 보았다. 과연 ‘심은 전정우’였다. 그래서 나는 沈丘의 국제서예전 전시장을 함께 둘러 본 중국 서예가들을 향해 심은의 서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심은 선생의 작품은 중국이나 일본의 정상급 작가들과 비교했을 때 최우위의 자리를 양보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심은 선생의 작품은 누구도 쉽게 따라 갈 수 없는 높은 경계의 작품입니다. 심은 선생은 120가지 字體와 書體로 천자문을 720번이나 썼습니다. 그 과정에서 거의 모든 한자에 대한 자체를 다 익히고, 명가들의 서체를 다 파악했기 때문에 이미 한자의 字·書體에 관한 한,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글자에 대한 자체의 구조를 완전히 머리에 담고 있기 때문에 심은 선생은 유희하듯이 자유자재로 글씨를 씁니다. 두서너 가지 자체에 익숙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작품을 창작하는 여타의 서예가들과 판이한 점입니다. 만약, 심은 선생의 작품과 자신의 작품을 비교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천자문을 최소한 몇 십 체 만이라도 써봐야만 비로소 비교가 가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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