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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계소식

삼일포와 양사언

금강산려관에 닷새를 묵는 동안 우리 일행의 하루 일과는 잠에서 깨자마자 베란다로 나와 한껏 목을 빼고 금강산 쪽을 내다보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무심한 금강산은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안개 홑이불을 머리째 뒤집어쓰고는 좀처럼 얼굴을 내밀 줄 몰랐다.
답사 행장을 꾸려 현관에 모이니 북측 안내단장인 조광주 (趙光柱.45) 참사는 비안개 낀 것이 무슨 자기 잘못이나 되는 양 미안해 한다.
"암만 해도 금강산이 낯을 가리나 봅니다.
바다 쪽은 저렇게 해가 나는데…. 일단 일정을 바꾸어 삼일포를 먼저 다녀옵시다. 사실은 돌아갈 때 들를 후식감으로 남겨둔 것인데…. "
삼일포는 관동8경의 하나로 일찍이 영랑.술랑.안상랑.남석랑 등 신라의 화랑 4명이 하루만 놀자고 왔다가 3일을 놀다 가는 바람에 삼일포라는 이름을 얻었다. 바다와 맞붙은 호수이다 보니 포구도 아니면서 포자가 붙었다. 온정리려관에서 삼일포까지는 불과 12㎞다. 금강산에 와서 새삼 깨닫게 된 것은 금강산은 생각 밖으로 동해바다에 바짝 붙어 있고 휴전선에 가까이 닿아 있다는 사실이다.
북한의 고성군에 있는 장전항에서 온정리까지 찻길로 8㎞, 직선거리로는 바다까지 6㎞고 금강산 남쪽자락의 유점사 (楡岾寺) 터는
민통선에 들어갈 정도로 군사분계선에 가깝다. 그래서 려관에서 출발한 지 5분만에 우리는 장전항과 삼일포가 갈리는 길목에 도착했고 거기서 잠시 옛날 고성읍이 있던 구읍리 빈터를 질러가는 남강 (南江) 과 월비산 (月飛山) 을 내다보았다.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의 하나였던 고성들판엔 끊어진 다리 교각들이 남쪽을 향해 줄지어 있다. 그것은 남쪽 고성에서 북쪽을 향해 늘어선 교각들과 절묘하게 남북 대칭을 이루는 분단의 상처였다.
삼일포 입구에서 오른쪽 계단을 오르니 홀연히 호수의 전경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호수는 넓어 굽은 곡선이 이룬 둘레가 8㎞나 되는데 호수 가운데로는

'사선정 (四仙亭)' '단서암 (丹書巖)' '무선대 (舞仙臺)'

바윗돌들이 길게 누운 와우 (臥牛) 섬과 정겹게 이웃하고 있다. 그 사랑스럽고 정겨운 정경이란 봄날 아지랑이처럼 아련하고 초여름 산들바람처럼 보드라운 서정을 일으키는데 안내원 왈, 여기는 혁명의 메아리가 서린 장군대 (將軍臺) 충성각 (忠誠閣) 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눈앞에 보는 바위마다 예의 그 굵고 붉은 글발로 '적기가' 와 각종 만세구호가 새겨져 있다. 앞으로 남한의 금강산 유람단도 여기를 들른다는데 그때 유람객들이 피치 못하게 보게 될 이 장군대 충성각의 붉은 글발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심히 걱정스러워하며 우리는 봉래대 (蓬萊臺) 로 향했다.

장군대에서 긴 허궁(출렁) 다리를 건너 나지막한 바위산에 오르니 굴곡진 곡선이 아늑해 호수는 마치 연꽃이 겹꽃으로 피어나는 것도 같고 푸른 산이 푸른 물을 보듬고 있는 것도 같다. 그리고 뒤로는 저 멀리 안개 속에 살며시 고개를 내민 금강산이 넓게 펼쳐진다.
삼일포의 시정을 한 자리에 모은 이 바위는 옛날에 봉래 양사언 (楊士彦.1517~1584) 이 즐겨 올랐다고 해서 후세 사람들은 봉래대라
부르게 됐다.

봉래 양사언! 그는 진정한 금강산인 (金剛山人) 이었다.

역사상 금강산의 첫번째 주인공은 '나무꾼과 선녀' 의 나무꾼이고, 두번째는 발연사 (鉢淵寺) 를 세우고 거기에 뼈를 묻은 신라시대 진표(眞表) 율사며, 세번째 주인공이 양봉래다.

양사언은 금강산을 사랑해 항시 금강산 가까이 살며 호를 아예 봉래라 했다. 그는 뛰어난 낭만파 시인으로 그가 읊은 금강산 명승 각처의 노래들은 뭇 시인과 선비들이 찬탄해 마지않는 바가 됐다. 그는 또 조선 4대 명필의 한 분이자 초서의 제일인자인데 그가 만폭동 너럭바위에 새긴

"봉래풍악 (蓬萊楓岳) 원화동천 (元化洞天)"

은 한국 서예사에서 불멸의 바위 글발로 꼽힌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는 엷은 애조를 띠는 고독의 그늘이 있다. 양사언의 본관은 청주, 아버지 희수(希洙)는 주부를 지냈다.

아버지는 산천유람을 즐겼는데 어느 날 안변에서 낮참을 얻어먹으러 여염집에 들렀다가 어른들은 밭일 나가고 혼자 집을 지키는 열여섯 처녀가 해주는 점심을 먹고 또 말죽도 먹이게 됐다. 楊씨는 고마워 사례했지만 처녀는 한사코 거절해 선물로 손부채에 달린 향합(香盒) 을 주고 왔다.
몇해 뒤 처녀는 그 향합을 들고 楊씨를 찾아와 신표(信表)를 받은 몸으로 딴 곳에 시집갈 수 없다며 들어와 살기를 고집했다. 마침 상처한 楊씨는 처녀를 후처로 들였고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이 양사언이다. 양사언은 총기있고 재주있게 잘 자랐다.
그러다 어느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전처의 자식들을 모아놓고 "너희들은 사언을 서자취급 말라" 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그래서 양사언은 과거를 보아 급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분상의 약점은 끝까지 따라다녀 외직(外職)으로만 나돌게 됐다. 그래서 양사언은 8개 고을의 수령을 지내게 됐는데 그는 금강산을 좋아한 탓인지 회양.철원 등 금강산 주변 고을에 봉직되곤 했다.
1564년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양봉래는 이곳 삼일포에도 와 있었고 만년에는 삼일포 아래 감호에 비래정(飛來亭)을 짓고 거기서 지냈다. 그때 현판 글씨를 쓰는데 날 비(飛)자는 기막히게 됐지만 나머지 두 자는 이에 못 미쳐 그 비자만 족자로 해 걸어두었다. 그러다 1581년 다시 안변부사 벼슬이 내려져 비래정은 남에게 맡겨두고 임지로 갔다.
그러나 불행히도 왕릉(智陵) 화재 사건으로 황해도로 유배됐다가 2년 만에 풀려 금강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 비래정에는 어느날 '금강내기' 라는 돌풍이 일어나 책과 종이들이 다 날아갔는데 관리인이 황급히 모두 주워들었건만 비자 족자만은 끝내 찾지 못했다.
훗날 양봉래의 친구가 비래정에 와서 이 얘기를 듣고는 손가락으로 꼽아보더니 그 날이 바로 양봉래가 죽은 날이라고 했다. 혼이 깃든 이 글씨는 양봉래의 영혼과 함께 하늘로 올라간 것이었다.
봉래대 아래로는 양봉래가 글을 읽던 봉래굴이 있다. 벼랑을 타고 조심조심 봉래굴로 내려가 보니 굴 머리는 호수로 향했는데 바위 벽에는 그가 유려한 초서체로 기세차게 쓴 자작시 한 수가 새겨있다.

거울속에 피어있는 연꽃송이 서른여섯/
하늘가에 솟아오른 봉우리는 일만이천/
그중간에 놓여있는 한조각의 바위섬은/
바다찾는 길손들이 한잠쉬기 알맞구나.

아련한 전설의 아름다운 삼일포는 아름다운 금강산 탐승의 디저트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글 = 유홍준 (영남대 교수.박물관장)
1998년 09월 11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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