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 고전번역서 | 이긍익(李肯翊) | 196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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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20년 4월 7일 계유에 창덕궁(昌德宮) 소덕당(昭德堂)에서 승하하니, 수는 65세이다. 아들 하나와 딸 넷을 낳았다. 능은 태릉(泰陵) 양주(楊州) 남쪽 노원면(蘆原面) 임좌(壬坐 북)이다. 을축년 7월 15일에 장사지냈으며, 표석이 있다. 이다.
22 | 고전번역서 | 이긍익(李肯翊) | 196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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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조의 상신(相臣)
○ 임금이 부음을 듣고 놀라며 애도하여 복작(復爵)을 명하였고, 아전들과 군민(軍民) 중에는 각각 재화를 내어 수의를 만들어 바치는 자가 잇달았다.이항복이 노원(蘆原)으로부터 달려가서 대렴(大斂)할 때에 참관하였다.
23 | 고전번역서 | 성현(成俔) | 1971년 |
용재총화 제7권
---무릇 채소와 과실은 알맞은 흙에 따라서 모두 심어야 그 이익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동대문 밖 왕십리는 무, 순무, 배추 따위를 심고 있으며, 청파(靑坡)·노원(蘆原) 두 역(驛)은 토란이 잘 되고
24 | 고전번역서 | 이유원(李裕元) | 199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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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음(梧陰)과 서계(西溪)의 구기(舊基)
오음 윤공(尹公)의 구택(舊宅)이 노원(蘆原)에 있는데, 백사(白沙) 선조께서 일찍이 꿈속에 그곳을 유람하고 지은 시에 이르기를, “복사골 안에 넓은 들이 펼쳐 있고, 녹야당 안에 여덟 용이 살고 있네.[桃花洞裏開千畝 綠野堂中有八龍]”라고 하였다. 내가 연전에 그곳을 찾아가 한 차례 유람을 하고는 그 길로 누산(樓山)에 있는 박서계(朴西溪)의 옛집에까지 갔었는데, 수석(水石)의 승경(勝景)은 노원보다 나았으나 그 기지(基址)의 형국은 그만 못하였다. 노원은 동쪽 들판 가운데 제일가는 곳이다. 오음은 문정공(文靖公) 윤두수(尹斗壽)이고, 서계는 문정공(文貞公) 박세당(朴世堂)이다.
25 | 고전번역서 | 김육(金堉) | 199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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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루정기(傴僂亭記)
수락산(水落山)은 노원(蘆原)의 뒤편에서 마치 불곡산(佛谷山)을 전송하는 것 같고, 무악산(毋岳山)은 안현(鞍峴)의 위에 있으면서 마치 부아봉(負兒峯)을 좇는 듯하여, 기괴한 형상과 이상한 모양새가 여기저기 겹쳐서 나타난다. 그리고 백운봉(白雲峯)과 인수봉(仁壽峯) 등 여러 봉우리가 저 멀리 구름 하늘 밖 아득한 곳에 삐쭉하니 솟아 있는 모습이 더더욱 경외스럽고 사랑스러우니, 아침이면 아침대로 저녁이면 저녁대로 안개와 구름이 변화함에 따라 혹 숨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며, 혹 합해지기도 하고 혹 떨어지기도 한다. 그 누가 성시(城市) 안에 이처럼 신선의 경치가 있는 줄을 알겠는가.
26 | 고전번역서 | 김육(金堉) | 1998년 |
을묘년(1615, 광해군 7)에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는데, 장령 박재(朴榟)가 정인홍(鄭仁弘)의 지시를 받고 또다시 최영경의 일을 거론하여 공을 파직시켰다. 이에 공은 노원(蘆原)의 촌사(村舍)로 물러나 살면서 도성 안으로 자주 들어가지 않았다.
27 | 고전번역서 | 서거정(徐居正) | 197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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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숙종 때에 위위승(衛尉丞) 김위제(金謂磾)가 도선(道詵)의 비결에 의거하여 남경(南京 한양)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양주(楊州)에 목멱(木覓)의 땅이 있어 도읍을 세울 만하다.” 하니, 왕이 친히 가서 시찰하고, 또 최사추(崔思諏)와 윤관(尹瓘) 등을 보내어 자세히 살펴보게 하였는데, 돌아와 아뢰기를, “노원(蘆原)ㆍ해촌(海村)ㆍ용산(龍山) 등의 산수는 도읍을 세우는 데 합당치 않고 오직 삼각산 전면 산악의 남방은 산형과 수세가 고금의 법에 부합하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