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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늙지 않고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또 있을까요? 오회분4호묘 벽화에는 공작새를 탄 신선이 약 단지를 들고 날아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강서대묘 벽화에도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는 삼신산으로 날아가는 신선의 모습이 보입니다. 고구려인들은 오래 사는 신선이 되기를 희망했으며, 오래 살 수 있는 약이나 비법을 찾으려고 노력했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나이를 먹음에 따라 사람의 몸은 약해지고, 병이 들어 죽게 된답니다. 그래서 병을 치료할 의사들이 필요하지요. 고구려에도 허준, 대장금과 같은 유명한 의사들이 있었을까요?
▲1 : 오회분4호묘의 약 단지를 든 신선의 모습. 약 단지에는 먹으면 늙지도 죽지도 않는 선약(仙藥)이 들어 있다.
◈ 침술이 발달한 나라
물론 있었습니다. 고구려 의사로 왜국에 건너가 왜왕의 어의가 된 모치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백제 사람으로 왜국에서 활동한 소수니라는 여의사는 부인병 치료에 뛰어났다고 합니다. 고구려에도 대장금, 소수니와 같은 여자 의사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구려에서는 특히 침술이 발달했는데, 안작득지라는 분은 침으로 못 고치는 병이 없었다고 합니다. 또 고구려 의사는 한 치의 머리털을 갈라 10여 가닥으로 만들어 그곳에 보이는 빈틈까지 찌를 정도로 기술이 절묘했다고 중국 기록에 전해 옵니다. 고구려의 약재인 인삼, 오미자, 백부자, 말린 지네, 금 등은 품질이 아주 좋아서 외국으로 수출되기도 했답니다.
◈ 깨끗한 생활 습관
옛날에 사람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전염병인 역병이었습니다. 고구려에도 3 차례 역병이 돌았다고 하는데, 신라나 백제에 비하면 적은 편입니다. 고구려의 기후 탓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깨끗한 것을 좋아하여 자주 목욕을 했기 때문에 역병이 적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인들도 온천에서 목욕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몸 씻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목욕을 1 년에 한번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냄새가 나고 더러워서 ‘때국 놈’이라고 놀림을 받았던 중국인들은 고구려의 이런 풍습을 놀라워했답니다.
과거에는 질병만이 아니라, 굶주림으로 사람이 죽기도 했습니다. 고구려에서는 사람이 굶어 죽는 것을 막기 위해 가뭄이나 홍수가 생기면 나라의 곡식을 풀어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특히 식량이 부족한 봄철에 나라에서 농민에게 곡식을 빌려 주고 가을에 돌려받는 진대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을 굶주림으로부터 구하기도 했답니다.
▲2 : 강서대묘의 삼신산으로 날아가는 신선의 모습. 삼신산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 신선들이 살고 있는 천국과 같은 곳이다.
◈ 장수한 왕 많아
옛날에는 60 세가 넘게 사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60이 넘으면 나라에서 장수를 축하하고 입을 것과 먹을 것, 때로는 관직도 주었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친형제 사이인 고구려 6대 태조대왕과 차대왕, 신대왕은 대단히 오래 살았다고 합니다. 태조대왕은 서기 53년인 7 세에 왕위에 올라 146년까지 무려 94 년 간이나 나라를 다스렸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죽은 것은 이보다 더 늦은 165년으로 그 때 태조대왕의 나이는 무려 119 세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차대왕은 95 세에, 신대왕은 90 세에 죽었다는군요. 또 백성을 괴롭혔던 차대왕을 몰아 내고 신대왕을 왕위에 앉힌 명림답부는 98 세에 국상이 됐다가 113 세에 죽었습니다. 20대 장수왕은 78 년 간 왕으로 살다가 98 세에 죽었芽求?
과연 당시 사람들이 이렇게 오래 살 수가 있었을까요? 차대왕과 신대왕의 나이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조선 시대에도 영조가 83 세, 태조 이성계가 74 세까지 살았으니까, 굳이 오래 산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겠지요. 고구려 왕들의 평균 수명을 계산해 보면 대략 55 세가 됩니다. 지금 사람들보다는 일찍 죽은 셈이지요. 하지만 1960년의 한국인 평균 수명이 불과 52 세였던 것에 비하면 대단히 오래 산 것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 평소 몸과 마음을 단련
고구려가 장수 국가였던 것은 목욕을 자주해 위생에 철저했고, 의학이 발달했으며, 무엇보다 사람들이 평소에 몸과 마음 단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인들은 씨름과 수박 등으로 몸을 단련했고, 빠르게 걸으며 씩씩하게 생활했답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도 즐겼는데, 이 때 말을 탄 기마 자세나 활을 당기는 자세는 자연스럽게 단전 호흡을 하게 하여 건강에 큰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늘 노래와 춤을 추며 즐겁게 살았는데, 이 또한 건강 유지에 큰 도움이 됐을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하고, 자주 씻고, 운동으로 몸을 단련한다면 여러분도 건강한 어린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을파소의 등용과 고국천왕
시골 농부에서 '국상'으로… 정치·경제 튼튼한 나라 만들어
을파소는 서기 191년부터 13 년 간 9대 고국천왕과 산상왕을 모신 고구려에서 제일 가는 현명한 국상이었습니다. 국상은 신하들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조선 시대 영의정과 같은 관직이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을파소는 국상에 임명되기 전까지는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던 농부였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하루 아침에 국상이 될 수 있었을까요?
오회분4호묘에 그려진 손에 벼 이삭을 들고 있는 농사의 신. 고구려인의 대다수는 농민이었다. 따라서 진대법을 실시한 을파소와 고국천왕은 농사의 신처럼 고마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 귀족의 반대에도 농부를 국상으로 등용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갑자기 크게 등용하는 사례가 ‘삼국지’에 나옵니다. 떠돌이 무사 집단의 지도자였던 유비가 삼고초려 끝에 제갈량을 만나 촉나라를 세운 이야기지요. 하지만 고구려 고국천왕이 을파소를 등용한 사건은 이보다 16 년 전의 일이랍니다. 게다가 고국천왕은 확고하게 정비된 국가 조직과 많은 귀족들을 거느린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따라서 고국천왕이 을파소를 등용한 것은 유비가 제갈량을 등용한 것보다는 더 큰 결심과 더 뛰어난 사람을 보는 판단력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농부를 국상으로 임명하여 성공한 고구려에서의 사례가 서쪽으로 전해져서 유비로 하여금 제갈량을 등용하도록 결심하는 데 자극이 된 것은 아닐까요?
고국천왕은 왕이 된 지 13 년 되던 해에 정치를 바로잡고자 새로운 인재를 추천하라고 신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추천한 사람은 을파소가 아니라 안유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안유는 높은 관직을 맡아서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이를 사양했습니다. 그 대신 자기보다 더 능력이 뛰어난 을파소를 천거했습니다.
고국천왕은 오로지 안유의 말을 믿고 을파소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그에게 지금의 장관에 해당되는 중외대부 관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을파소는 중외대부직을 사양했습니다. 올바른 정치를 하려면 중외대부라는 직책으로는 일을 할 수 없음을 알고 이를 사양했던 것입니다.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난 고국천왕은 을파소의 진정한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국상에 임명했습니다.
시골 농부를 국상으로 삼은 파격적인 조치는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귀족들은 왕에게 을파소를 비난하며 그를 국상직에서 쫓아 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고국천왕은 한번 결심한 이상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고국천왕은 사람의 출신을 보지 말고 사람의 능력을 믿으라면서 귀족들에게 을파소를 믿고 따르라고 명령했습니다.
◈ 대대적인 개혁에 나선 을파소
국왕의 절대적 믿음을 받은 을파소는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교육 제도를 개편하고 부정 부패 방지, 인재 선발 활성화, 진대법을 비롯한 경제 정책 개혁 등을 통해 정치를 바로잡아 고구려를 부강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진대법은 고구려가 가장 먼저 실시한 제도입니다. 식량이 부족한 3월에서 7월까지 나라에서 농민에게 곡식을 빌려 주고 10월에 되돌려 받아 백성들을 굶주림으로부터 구했습니다. 진대법의 실시로 농민들은 보다 안정적으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조선 시대에 농민을 구제하는 제도인 환곡과 11세기 송나라의 개혁적 정책이었던 청묘법은 고구려의 진대법을 본받아 시행된 것이랍니다.
고구려가 살기 좋은 곳이라고 소문이 나자 이웃 나라 농민들이 고구려로 자진해서 넘어오기도 했답니다. 백성들이 모이자 고구려는 더욱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을파소는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고구려 최고의 명재상이었습니다. 그가 죽자 고구려 사람 모두가 진심으로 슬퍼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1800 년이 지났지만 고국천왕과 안유, 을파소를 생각해 봅시다. 을파소와 같은 훌륭한 인재들은 여러분의 친구들 가운데에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을파소와 같은 업적을 이룰 수 있을까요? 고국천왕과 같이 널리 인재를 구하고, 한번 믿은 인재를 끝까지 밀어 준 사람들이 없다면, 또 안유와 같이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기회를 양보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국상 을파소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보다 어떤 부분에 능력이 뛰어난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 능력을 발휘하도록 도울 때, 그 친구도 내 능력을 인정하고 나를 도울 것입니다. 서로를 질투하기보다는 서로의 능력을 함께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면 우리 나라도 크게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을파소와 같은 뛰어난 인재도 필요하지만, 고국천왕이나 안유와 같은 사람들이 더욱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구려의 당찬 여성들
수레를 타고 외출을 하는 덕홍리 고분의 여 주인공. 여성이 외 출하여 남자와 자유롭게 얘기를 나누며 놀고 있다.
조선 시대는 남성 중심의 사회였습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더 귀하다고 여겨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살았습니다.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그 이유만으로 해 보고 싶은 일도 못 하고 살았던 조선의 여성들이 조금은 애처롭고 답답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우리 역사의 전통적인 여성의 모습일까요?
아니랍니다. 그것은 조선 후기에 주자학이 일상 생활 습관까지 규제하면서 생긴 몇백 년 안 되는 일시적인 모습일 뿐이랍니다. 신라 시대에 선덕 여왕 등 3 명의 여왕이 있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겠지요? 고구려에는 남성보다 더 당찬 삶을 살아온 여성들도 많았답니다.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의 어머니 유화의 삶을 만나 볼까요? 그녀는 웅심 연못가에 동생들과 나왔다가 천신의 아들이라는 해모수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고 임신도 했습니다. 하지만 해모수는 그녀를 떠났고, 아버지 하백은 그녀를 내쫓아 버렸습니다. 갈 곳 없던 그녀는 금와왕을 만나 동부여에서 후궁으로 살았답니다.
장천 1호분의 야외 출행도. 그림에서 보듯 고구려의 여성 들은 수레를 타고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녀는 미혼모이며, 집에서 버림 받고, 첩살이를 한 그다지 행실이 아름답지 못한 여인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고구려인들은 그녀를 해마다 동맹 행사에서 부여 신으로 섬겼답니다. 그녀는 추모에게 말을 고르는 법, 활과 화살을 만드는 법, 또 곡식을 고르는 일 등 나라를 세울 때 필요한 많은 일들을 가르쳐 준 지혜의 여신이자 생명의 신, 물의 여신, 풍요와 곡식의 여신이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신으로 섬겨질 수 있었던 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 의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랍니다.
한편, 6대 태조 대왕의 어머니인 부여 태후는 모본왕을 몰아 내고 7 세에 불과한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만듭니다. 그리고 자신이 한동안 직접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남편이 있었지만, 그녀야말로 실질적인 여왕이나 다름없었던 것이지요.
또 한 명의 주목할 여성 인물은 우씨 왕후입니다. 그녀는 남편인 고국천왕이 죽자 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밤에 몰래 왕의 두 동생인 발기와 연우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자기를 받아들인 연우에게 왕위를 넘겨 주고, 자신은 다시 한번 왕비가 됩니다.
그녀처럼 왕위를 자신이 선택한 인물에게 물려 주고 다시 왕비가 된 예는 세계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찾기 어렵습니다. 우씨 왕후는 자신이 연나부의 대표로서 고국천왕과의 사이에 자식을 두지 못 했기 때문에, 발기가 왕이 되면 연나부 세력이 약해질 것을 걱정하여 이처럼 과감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산상왕이 된 연우는 그 후 후궁을 맞아들이는 것도 몰래 할 정도로 우씨 왕후의 눈치를 봐야 했답니다.
평강 공주 역시 대단한 여성입니다. 그녀는 귀족의 자제와 결혼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궁궐을 뛰쳐나와 자기가 선택한 바보 온달과 결혼해 그를 대장군으로 만들었습니다. 조선 시대라면 평강 공주는 공주의 신분을 빼앗겼을 것이고, 온달은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구려 평원왕은 그녀와 대장군 온달을 축복해 주었답니다. 평강 공주는 이처럼 신분을 뛰어넘어 사랑을 성취한 용기 있고 진취적인 여성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일반 평민 여성들도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펼치며 살았습니다. 산상왕의 둘째 부인이 된 후녀는 자기를 죽이려는 군사들 앞에서 당당히 자신이 왕의 자식을 잉태했음을 밝혀 죽음을 면하는 당찬 면모를 보여 주기도 합니다. 고구려 여성들은 이 밖에도 결혼, 상속, 외출 등에서도 남자와 별다른 兌걋?받지 않았습니다. 자유롭게 연애를 하며 자기 재산을 갖고 당당히 사는 고구려 여성들은 말 타고 사냥하는 용감한 고구려 남성들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습니다. 고구려의 데릴사위제는 남자들이 처가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후에야 아내와 함께 남자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지극히 여성을 배려한 결혼 풍습입니다. 장천 1호 고분 벽화에는 여성이 좌우가 탁 트인 개방형 수레를 타고 외출하여 남자에게 말을 걸고 함께 춤추고 악기를 연주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엄이란 여성은 자신의 재산으로 불탑을 세우기도 했고요. 여성들은 또 경제 생활의 주체로서 농사도 짓고, 시장에서 물건도 팔고, 전문 직업인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 하게 막는다면 한 나라의 힘은 절반밖에 사용하지 못 하는 것입니다. 고구려가 강하고 멋진 나라였던 이유는 이처럼 여성들이 남성 못지않게 능력을 발휘하며 생활했기 때문이랍니다. 여성과 남성은 함께 살아가야 할 동반자입니다. 어린이 여러분들도 서로의 능력을 존중해 주고,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을 합쳐야 하겠지요.
교만해서는 안 돼요, 동천왕님
환도산성. 고구려의 수도였던 환도산성은 위나라 군대에 의해 노략질 을 당하기도 했던 곳이다.
고구려 11대 왕인 동천왕은 대단한 효자였고, 정치도 잘해서 사람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왕과 함께 무덤에 묻히기를 희망하여, 아들인 중천왕이 이를 금지시킬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동천왕은 고구려를 힘센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외국인들은 그를 대단히 무서운 인물로 기록하고 있답니다.
당시 고구려는 조조의 위나라, 손권의 오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위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는 것을 보고 오나라가 트집을 잡자 동천왕은 크게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위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내고 오나라와의 관계도 끊었습니다. 이처럼 단호하고 결단력 있는 동천왕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답니다. 그것은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쳤다는 점입니다. 자신감이 지나치면 자만심이 되지요. 동천왕은 딱 한 번 자만심을 부려 곤경을 치르게 된답니다.
동천왕은 238년 위나라를 도와 요동에 있었던 공손씨 세력을 공격하여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고구려로서는 당연히 어떤 대가를 바라고 도와 준 것인데, 위나라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동천왕은 위나라의 서안평이란 곳을 공격했습니다. 동천왕은 위나라가 오, 촉과 싸우기에 바빠서 고구려를 공격해 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고구려 철갑 기병. 대단히 강해 보이지만, 느린 움직임으로 인해 적군에게 크게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위나라는 이미 오, 촉을 크게 앞선 강대국이었습니다. 위나라는 곧바로 관구검이란 장군을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해 왔습니다. 동천왕도 2만의 군대를 비류수로 보내 위나라 군대와 맞섰습니다. 첫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적군 3000 명의 목을 베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여세를 몰아 양맥 계곡까지 추격해서 또 한 차례 승리를 거뒀습니다. 이 전투에서 적 3000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습니다. 동천왕은 거듭 승리를 거두자, 이 때부터 상대를 얕보기 시작했습니다.
“위나라가 큰 나라라고 자랑하더니, 많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도 우리의 적은 군사보다 못 하구나. 이제 적장의 목도 내 손 안에 있다.”
이 때 득래라는 현명한 신하가 동천왕에게 방심하지 말라고 충언을 했습니다. 하지만 동천왕은 자신만만해하며 고구려의 자랑인 5000 명의 철갑 기병대를 이끌고 위나라 군대를 공격했습니다. 위나라군은 무모하게 달려드는 고구려 군을 처음에는 싸움에 지는 척하면서 유인했습니다. 적의 작전에 말려든 것도 모르고 공격하던 고구려군은, 사방에서 갑자기 나타난 위나라 군대에 포위 당했습니다.
무거운 갑옷을 입은 철갑 기병은 적과 정면 충돌을 할 때는 막강한 군사들이지만, 빠르게 말을 달릴 수가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적군이 사방에서 포위를 하자, 고구려군은 활동이 자유롭지 못 하여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투로 무려 1만 8000 명이나 되는 군사들이 죽었고, 동천왕은 겨우 1000 명의 군사만을 데리고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이처럼 고구려를 위태롭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위나라 군사들은 곧 고구려 수도인 환도성으로 쳐들어와 노략질을 했습니다. 위나라 관구검은 부하인 왕기를 시켜 동천왕을 추격했습니다. 득래의 충언을 듣지 않은 동천왕은 크게 후회했지만, 추격병에 쫓기는 신세가 됐습니다. 이 때 밀우 장군이 나서서 자신이 결사대로 적을 막을 것이니, 어서 피하라고 했습니다. 밀우는 있는 힘을 다해 적과 맞섰습니다. 동천왕은 밀우가 걱정되었습니다. 그러자 유옥구가 나서서 죽음 직전의 밀우를 구해 왔습니다.
동천왕은 밀우를 자신의 무릎 위에 뉘었습니다. 한참 만에 밀우가 깨어났고, 고구려 군사들은 부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왕을 보고 힘을 내었습니다. 동천왕은 적군의 추격에서 벗어나 다시 군사를 모으려고 했습니다. 이 때 신하인 유유가 계책을 냈습니다. 유유는 위나라 군대에 가서 거짓으로 항복을 한다고 했습니다. 위나라 장군은 유유의 말을 믿고 그가 준 음식을 먹으려고 했습니다. 이 틈을 타서 유유가 칼을 꺼내 위나라 장군을 죽였습니다. 장군이 죽자 위나라 군대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때맞춰 동천왕은 모은 군사들로 위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크게 이겼습니다. 동천왕의 승리 소식에 곳곳에서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내었고, 위나라 군대는 서둘러 도망갔습니다.
밀우, 유유, 유옥구 등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신하들 덕택에 나라를 구하기는 했지만 동천왕의 한 번의 자만심은 나라를 크게 위태롭게 했습니다. 동천왕은 크게 반성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동천왕처럼 한 번 이겼다고, 한 번 잘했다고 뽐내서는 절대로 안 되겠지요. 동천왕처럼 크게 후회할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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