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해방공간(1945∼50)의 우리 문화예술*국문학
분단의 역사와 국문학 연구의 디딤돌
최철 / 연세대 교수
이 보고서는 해방기-사건사적 구획으로는 1945년 8*15 일본의 식민지 해방으로부터 1950년 6*25 남북전쟁 직전까지에 이르는-국문학 연구의 실상을 밝혀 보자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해방은 일제 36년 동안 억눌려온 정치적 열정을 폭발시켰다. 해방기 국문학 연구 역시 독립된 국가 건설에 적극 참여해야 할 것이란 정치적 기대 위에서 출발하여 사회 문화 예술 전반에까지 확산되었다.
해방기 국문학 연구를 알아보기에 앞서 간략하나마 국문학연구의 역사를 짚어 보기로 한다. 1922년 안확(安廓)의 「조선문학사(朝鮮文學史)」가 출간된 해를 기점으로 삼는다면 국문학 연구의 역사는 70년에 달한다. 이 70년이란 시기는 일제의 식민지 시대와 남북의 분단이 공고화되는 민족의 슬픈 고난을 몸소 체득하면서 보낸 시기였다. 식민지 분단의 역사 앞에서 국문학 연구도 숱한 좌절과 한계를 느끼면서 그래도 정지되지 않은 채 꾸준히 이어 내려왔던 것이며, 민족문화의 건설을 위한 노력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1920년대 국문학 연구가 학적 체계 속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치더라도, 다음 시대에 전개될 국문학 연구의 디딤돌 구실을 하였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신라 향가 해독과 해석의 경우만 보더라도 1920년대의 연구는 후대에 이룩한 향가 연구의 초석이 되었다.
신채호(申采浩) 「처용가(處容歌) 해독」(조선고래(朝鮮古來)의 문자(文字)와 시가(詩歌)의 변천(變遷), 1918), 권덕규(權悳奎) 「처용가(處容歌) 해독」(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 1923), 안확 「처용가(處容歌)에 취(就)하여」(신생(新生) 13호, 1930), 손진태(孫晋泰) 「처용가(處容歌) 전설고(傳說考)」(신생(新生) 16호 1930) 등은 이 시기 일본 학자 금택장삼랑(金澤庄三郞), 점패방지진(鮎貝房之進), 소창진평(小倉進平), 고교형(高橋亨), 전간공작(前間恭作), 토전행촌(土田杏村)의 업적과 함께 신라 향가 해독에 기반을 마련해 놓았다.
최남선(崔南善)은 민족문화의 보존과 창달을 위해 자신이 출판사를 경영하면서 특히 고서인간(古書印刊) 사업에 열을 올렸다. 예컨대, 「시조유취(時調類聚)」(1928)는 이 같은 민족주의 국민문학운동의 뜻에서 발간된 것이다. 1927년 「계명(啓明) 19호」에는 대총본(大塚本) 「금오신화(金鰲神話)」를 다시 게재하여 잃어버린 우리 소설을 국내에 다시 알렸다. 특히 안확은 「조선문학사(朝鮮文學史)」(1922)에서 고증학적 방법론에 기초하면서 특유의 민족주의적 의지를 드러내었다. 그의 종에 대한 사상, 정인보의 얼, 문일평의 조선심, 최남선의 조선정신 등은 이 시대 민족주의 사상의 한 표출로 평가된다.
1930년에는 「조선어문학회(朝鮮語文學會)」가 중심이 되면서 이 연구회를 중심으로 하여 실증주의 국문학 연구의 싹이 트게 되었다. 김태준(金台俊), 김재철(金在喆), 조윤제(趙潤濟), 고정옥(高晶玉), 김사엽(金思燁), 이명선(李明善), 이재욱(李在郁), 김삼불(金三不), 구자균(具滋均) 등은 1930년 중반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부에서 일인(日人) 교수 고교형(高橋亨)의 지도로 조선문학을 연구하였다. 고교형은 1926년 경성대학에서 조선어 및 문학강의를 담당한 이래 앞에든 졸업생을 배출했고, 해방기 뒤에는 일본에 귀국하여 천리대학(天理大學)에서 조선문학 강의를 담당했다. 그의 민요연구가 천리대학 동방학기요 별책 2(東方學紀要 別冊 2 1968)에 실렸다.
고정옥 등은 경성대학에서 연구한 결과를 졸업논문으로 발표했다. 그 중,
김재철 「조선연극사(朝鮮演劇史)」(1933), 김태준 「조선가요집성 제1집 고가편(朝鮮歌謠集成 第一輯 古歌篇)」(1934), 조윤제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1937), 김사엽 「조선민요연구(朝鮮民謠硏究)」(1937), 고정옥 「朝鮮民謠に就い」(1938), 오영진 「조선내방가사(朝鮮內房歌詞)」(1938), 구자균 「서사시인(胥史詩人)을 중심으로 하며 본 근대위항문학(近代委巷文學)」 등이 있으며 김사엽은 졸업논문으로「嶺南民謠の硏究」(1938)를 발표했다. 김태준은「조선한문학사(朝鮮漢文學史)」(1931)와 「조선소설사(朝鮮小說史)」(1933)의 업적을 남겼다.
이 시기 연구의 새로운 경향은 서구적 실증주의를 학문연구의 방법으로 도입함으로써 종래 전통적 고증학적 연구방식에서 벗어났다. 이점은 민족주의적인 연구 지향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국문학 연구가 이 시기에 이르러 학적 체계를 세워 논리화되었고, 작품의 미적 본질의 탐색이나 사회적 가치를 해명하고자 하는 노력이 점차로 확산되었다.
고증적 국학파와 실증주의파에 의해 주도된 식민지 시대의 국문학 연구는 비록 제한된 연구 조건 밑에서라도 각 장르별로 연구가 심화되었다. 그리하여 시, 소설, 연극, 한문학, 문학사의 통계체계를 구축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로써 우리 문학 유산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과 그 맥이 서게 되었다.
조선문학 연구의 계통적 출발은 1930년 조선어문학회의 창립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회원의 국문학 연구의 역작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김태준, 「조선한문학사(朝鮮漢文學史)」, 조선어문학회(朝鮮語文學會), 1931
김태준, 「조선소설사(朝鮮小說史)」, 청진서관(淸進書館), 1933.
김재철, 「조선연극사(朝鮮演劇史)」, 학영사(學英社), 1939.
김태준, 「조선가요편(朝鮮歌謠篇)」, 조선일보(朝鮮日報).
조윤제,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岡)」, 차광당 서점(東光堂書店), 1937
이병기, 시조의 연구, 노단학보(震壇學報)
이재욱, 민요의 연구, 신흥(新興)
이들 연구서의 특색을 해방기에 쓴 김태준의 「문학유산의 정당한 계승방법」(건설기의 조선문학, 1946)이란 논고에서 아래와 같이 자성 비판하였다.
o 고대문학자료의 연대적 해설인 제론사론적(諸論史論的)인 개괄적 서술에 불과하다.
o 구체적 작품의 심미적 비평적 관찰이 결여되어 있다.
o 역사성의 규명이 결여되어 있다.
o 조선민족의 자랑을 과장한 국수주의적 요소까지 내포되었다.
o 문장은 한문을 많이 섞어서 알기 어려운 문어체인 귀족적 문장이었다.
이런 김태준의 국문학에 대한 인식은 해방기를 맞아 우리 문학연구의 방향을 새롭게 모색해 보겠다는 벅찬 격동기의 소산으로 풀이된다.
김태준의 「춘향전의 현대적 해석」, 임화의 「신문학서설(新文學序說)」(중앙일보), 임화 「조선신문학사(朝鮮新文學史)」(조선일보)는 「다소 진보적인 견지에서 서술된 것으로」 평가되었다.
김태준은 1945 8. 15 이전은 민족 전체의 생활위기요 국어, 국문 등 문화파멸의 위기로 설명하였다.
1940년에 이르러 일본이 벌인 전쟁은 세계전쟁으로 확산되어 막바지에 이르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식민지 조선에서의 조선문학 연구활동은 일체 금지되었다. 그리고 조선인에게 조선어의 사용을 금하였고, 조선의 성씨를 일본의 성씨로 바꾸는 해괴한 행위를 저질렀다.
해방기 국문학의 새로운 연구
조선민족이 1945년 8월 15일 군국주의 일본의 쇠사슬에서 해방이 되자, 그 동안 억압되었던 민족적 정열이 되살아났으며, 국문학 연구도 새롭게 그 창발력을 드러내게 되었다.
해방기(1945. 8. 15∼1950. 6. 25) 국문학 연구는 무엇보다 먼저 일제 잔재를 청산해야만 했고, 민족 내적 모순을 스스로 해결하면서 통일된 독립국가를 세워야만 했다. 이러한 민족적 과제에 대한 인식 위에서만 민족문화연구의 성과가 획득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졌다. 그러나 독립된 통일국가 건설을 향한 팽배한 민족적 열망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놓인 정치적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는 않았다. 혼란과 대립, 투쟁이 난무한 가운데 지향해야 할 노선과 방향에 혼미만 계속되었다. 해방의 결과 한반도는 미*소 양 세력전에 의해 분단되었고, 문학 운동내에서도 대립된 이데올로기의 투쟁은 해방기를 맞으면서 국문학 연구에도 정면으로 표출되었다.
이 시기에 가장 눈에 두드러진 변화로는, 국문학 연구를 실증주의 연구방법으로 출발했던 조윤제, 손진태, 이명선, 구자균, 고정옥 등이 오히려 실증주의를 비판하면서 민족사관을 추구하는 데 있었다.
조윤제가 창안한 국문학 연구 방법론으로서의 민족사관이란 민족현실에 대한 위기의식의 소산이다. 식민지 지배와 남북분단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현실 속에서 민족의 일대 위기를 접하면서 국문학 연구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조윤제는 국문학이 숱한 외래문학과의 투쟁 속에서도 끝끝내 자신의 고유한 조선의 문학성을 상실하지 않고 끈질기게도 그 생명을 이어왔다는 사실에다 무게를 두면서, 이 끈질긴 생명력은 바로 국문학의 정신이고 이러한 국문학 연구를 바탕으로 민족해방과 분단극복의 논리를 제기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의 민족사관이었다.
조윤제는 조선문학이란 조선민족의 심성과 생활을 표현한 것이며, 그것을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국문학을 외래문학과 계속 다투면서 우리의 민족사회를 유지 발전시켜 나간 생활의 기록으로 인식하고자 하였다.
조윤제는 「국문학사(國文學史)」(1949)를 통해 국문학은 조선의 민족생활을 표현한 것이며 그것은 하나의 유기체적 전체성을 이루면서 존재한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국문학에 나타난 민족정신의 본질을 밝히고, 국문학사를 통해 민족정신의 끈질긴 지속성을 증명하고자 했다. 남북 분단의 극복문제나 민족통일의 역량도 이러한 생각아래서 긍정적인 희망으로써 이해하였던 것이다.
조윤제는 민족정신의 생명체적 발전에 따라 문학사의 시대구분을 설정하였다. 태동시대*형성시대*위축시대*소생시대*육성시대*발전시대*반성시대*운동시대*복귀시대로 나누어 이름을 붙였다. 고려왕조 때 한문학의 성행은 국문학의 위축을 가져온 것으로 파악했으며, 조선왕조의 건국과 함께 나타난 문학 현상을 국문학의 소생시대로 파악하였다. 조선조 후기문학에 이르러서는 발전시대와 반성시대를 거쳐 새로운 도약을 가져온 운동시대로 파악하였다.
손진태 「조선민족설화(朝鮮民族說話)의 연구」(1947)는 1927년 「신민(新民)」지에 게재되었던 「조선민간설화(朝鮮民間說話)의 연구」를 해방기에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이다. 손진태는 설화연구의 방법에서 비교설화론에 많은 관심을 표하였다.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는 공통적인 설화가 우리나라에도 전승되었음을 보이고, 그러한 양상으로부터 문화의 변천모습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민족설화를 연구하는 방법은 하나의 민족설화가 어떻게, 어느 곳에서 발생하며, 어느 시대에, 어떤 까닭과 경로를 거쳐 전파되었는가를 밝히는 작업으로 인식하였다. 설화의 전파경로를 탐구하는 것으로 설화 연구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설화연구서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중국에 전한 조선설화 (2) 중국 영향의 민족설화 (3) 북방민족 영향의 민족설화 (4) 일본에 전파된 조선설화 (5) 불전에서 나온 민족설화 (6) 세계적으로 분포된 설화 등 총 114종의 우리 설화가 주변 민족의 설화와 어떤 전파론적 관계를 가졌는가를 연구했다.
손진태(1900∼?)는 서울 출신으로 일본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 사학과를 1927년에 졸업하고 1933년 연희전문, 1934년 보성전문에서 강의를 했고, 1945년이래 서울대학 교수로 재직 중 1950년 6*25때 납북되었다. 신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그의 이론과 사상을 전개하였다.
해방기 국문학 연구의 업적 가운데 중요한 사실은 1948년 「우리어문학회」의 조직과 이 연구조직을 통해 발간된 「국문학사(國文學史)」(1948)와 「국문학개론(國文學槪論)」(1949)을 들 수 있다. 이 두 연구서는 개인의 저술이 아니라 「우리어문학회」 회원들의 전공 영역에 따라 공동작업으로 이룩된 것이다. 이 조직의 구성원은 방종현(方種鉉), 고정옥(高晶玉), 김형옥(金亨玉), 김형규(金亨奎), 정학모(鄭鶴模), 손낙범(孫洛範), 정형용(鄭亨容), 구자균(具滋均) 등 7명이다. 이들은 경성대학 졸업생으로 당시 대학에서 국문학 강의를 담당했다.
1945년 해방은 되었지만 남북 분단의 민족대립은 날로 심각해졌다. 좌우익의 이데올로기 투쟁은 국문학 연구에도 세차게 바람을 일으켰다. 남쪽은 대한민국, 북쪽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각기 국호를 달리 정하고 남북의 분단은 더욱 자리를 다져가기 시작했다. 첨예한 문학운동의 대립은 국문학 연구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이런 판국에 섣불리 한국이니 조선이니 하는 국호를 내세우기보다는 어정쩡한대로 우리라는 동질성을 지니는 단어를 차용하여 「우리어문학회 」라 이름을 붙였다. 1950년 월북하게 되었고, 남한에는 구자균, 손낙범, 김형규, 방종현이 남게 되었다. 「우리어문학회」의 업적은 다음 항에서 재론하기로 한다.
고정옥(1911∼?)은 「우리어문학회」에서 활동하여 공동으로 「국문학사」와 「국문학개론」을 집필한 이외에, 1949년 발행한 「조선민요연구(朝鮮民謠硏究)」는 애초 경성대학의 졸업논문을 개고한 것이다. 해방기를 맞아 단행본으로 인간했다. 조선민요연구의 업적으로는 최초의 공적이다. 한편 「국어국문학요강(國語國文學要講)」(1949)을 같은 시기에 발행했다. 역시 다음 항에서 재론하기로 한다.
이명선은 경성대학 조선문학과 출신으로 유물사관적인 입장에서 국문학을 연구하여 그 결실을 「조선문학사(朝鮮文學史)」(1948)로 엮어냈다. 해방기에는 서울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1950년 전쟁을 겪으면서 월북하였다. 사회경제사의 의의를 강조하면서 문학의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의 문학사에 대한 재론은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김삼불은 연희전문에서 문학을 연구한 후 해방기에 다시 서울대학에 편입하여 졸업했다. 판소리계 소설에 대한 가치를 평가하고, 구비문학, 평민문학에 관심을 기울였다. 「배비장전」「옹고집전」(1950)의 교주를 통해 서민문학의 가치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리고 「교주 해동가요(校註 海東歌謠)」(1950)에서는 정치한 교주와 이본 문제를 체계적으로 논의했다.
구자균(1912∼1964)은 조선조 후기 중인, 서얼, 서리 계급에 속하는 문인-안항인(安巷人)-들의 작품세계를 사적인 체계를 세워 「조선평민문학사(朝鮮平民文學史)」(1948)를 발간했다. 「우리어문학회」의 회원으로 해방기 국문학 연구에 참여하여 연극(인형극*창극*가면극*구극)과 신문학(국문학과 조선문학*낭만정신과 현실주의*자연주의*설화형식과 묘사형식)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우리어문학회」의 국문학사에서는 현대문학편을 집필하였는데, 이인직(李人稷)의 신소설, 춘원(春園)의 문학에서 1920년대 「창조」, 「폐허」, 「백조」지의 문학 성격과 경향파 문학을 논하였고, 1930년의 순수문학, 일제 말기의 암흑기 문학까지 총괄 정리하였다. 그의 「조선평민문학사」에 대한 논의는 다음 장에서 재론하겠다.
우리어문학회의 활동
해방기 국문학 연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1948년에 결성된 「우리어문학회」의 활동이다. 국어국문학을 연구하는 7인이 모여 학문을 좀더 효과 있게 성취하고자 하여 결성한 단체였던 것이다. 해방기 문학운동에서 벌였던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이 모임에서는 노출되지 않았다. 순수 국문학 연구가 이들의 임무였다. 「우리어문학회」가 간행한 「국문학개론」(1949)의 방종현이 붙인 서문에는 본회의 설립 취지가 간략히 설명되어 있다.
「우리의 모임은 결코 책을 만드는 데 있지 않다. 또 모임의 이름 같은 것도 가지려고 하지도 않았다.
국어국문학이라는 학문의 같은 방면을 공부하고 있는 우리 몇 사람이 서로 시간 있는 대로 한 자리에 앉아서 그 아는 것을 피차 토론하고 그 의심 있는 데를 공동으로 질정하여 서로의 친목 된 합력에 의하여 우리의 학문을 좀더 효과 있게 전진의 길로 인도코자하는 자연한 학문심의 발로인 데에 이 모임의 근본 뜻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어문학회」에서는 「국문학사」(1948, 성당서점(成堂書店))와 「국문학개론」(1949 성당서점)의 두 연구서를 한 해 간격으로 출간했다. 이 두 연구서는 7인의 공동작업에 따라 이룩된 것이며, 이 작업에서는 「우리어문학회」 회원 6인이 관여하며 집필하였다(방종현은 빠짐). 방종현, 정학모, 고정옥, 김형규, 손낙범, 정형용, 구자균은 모두 경성대학 조선문학과를 졸업했고 모두 비슷한 연령이었다(고정옥, 김형규, 정형용, 손낙범은 1911년생이고, 방종현은 1905, 정학모 1910, 구자균 1912). 고정옥, 김형규, 정학모, 손낙범, 정형용은 서울사범대학 교수였고, 구자균은 고려대학, 방종현은 서울대학 문리대 교수였다.
일제 식민지 사슬에서의 해방과 더불어 우리 손으로 대학이 다시 정리되었고, 대학 안에서도 국문학과가 개설되었다. 국문학 강의를 위한 학교 교재가 당장 요청되었다. 이런 필요성에 의해서 「국문학사」가 집필되었다. 한 개인에 의하여 통일된 생각에서 이룩된 것이 아니고 각 시대별로 분담하여 집필되었다는 점에서 문학을 보는 생각과 바탕에 일관된 논리가 부각될 수 없었다. 이점은 방종현의 서문에도 나타난다. 또한 일관된 하나의 이념논리로서 문학사를 쓸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시기 국문학 연구의 형편이기도 했다.
국문학사의 시대구획을 문학 자체내의 현상에 두지 아니하고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적 역사에도 눈을 돌리지 않고 세계사의 세기라는 시대구획을 그대로 적용하였다. 그리하여 우리의 문학을 상고문학, 중고문학, 중세문학, 근세문학, 현대문학의 다섯 단계로 나누었다. 상고문학은 정형용, 중고문학은 김형규, 중세문학은 손낙범, 근세문학은 정학모*고정옥, 현대문학은 구자균이 각기 맡아 집필하였다. 공통적인 특성은 각종 고문헌을 통해 우리의 문학유산을 발굴 소개하는 고증적인 연구방법을 취한 점이다. 문헌 소재 국문학 작품을 친절하게 소개하는 데 머물렀다. 그러므로 독특한 문학론을 세워서 우리 문학을 재단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김형규는 중고문학에서 특히 신라 향가 해독에 관심을 기울였고, 이두문학에 대한 해독에 새로운 진전을 보였다. 향가에 쓰인 한자의 용법을 음독, 훈독, 뜻 셋으로 나누어 보았다. 향가의 이해는 먼저 고어를 읽고, 현대어로 해석한 다음에 그 노래의 내력을 설명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향가 해석에서 주변의 설화를 끌어들인 점은 한 진전이라고 보겠다.
손낙범은 중세문학 곧 고려시대 문학의 수용계층을 둘로 나누어 「특수계급의 문학과 평민문학」으로 양분하였다. 고려의 속요는 평민층 문학이고, 경기체가는 한학자인 특수계층의 문학이라 보았다. 고려는 한문학이 융성하여 고유문학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고 보았다. 이점은 조윤제의 경우와도 일치된다.
문학의 계층을 상하로 나누어 대비시키고, 민족적 정서를 그대로 나타낸 평민문학을 끈기 있게 국문학의 전통을 이어갔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문학으로 이해했다. 평민문학에 대한 관심은 고려 중*후기를 넘어 오면서 민요, 설화, 패관문학에까지 확대되었다. 구비전승의 문학은 민족문학의 정수가 숨어 있다고 본 것이다. 또한 이러한 패설의 발전에서 조선조 소설이 잉태된 것으로 설명하였다
익제(益濟) 이재현(李齋賢: 1287∼1367)의 「소악부」란 시는 전개하던 유행가요나 민요를 시화(詩化)한 것으로 작품의 중요성을 인식하게되었다.
고정옥, 손낙범, 구자균은 평민층의 문학 속에 우리 문학의 정수가 깃들어 있다고 보고 평민문학의 문예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근세문학은 조선조 문학을 총칭한다고 보았다. 정학모는 조선조 초기의 악장, 시조, 조선 초기 소설의 세 분야를 집필하였고, 고정옥은 영정시대의 조선조 소설, 후기가집과 시가문학, 민요 부분을 취급하였는 바 고정옥은 조선조 후기 문학을, 정학모는 조선조 전기문학을 각기 분담했다.
고정옥은 조선후기 문학의 새로운 양상은 소설문학의 발흥이라고 했다. 소설은 서민문학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이해했다. 고정옥은 또한 「운율문학의 정신은 대체적으로 추상적 관념적이며 그 형식은 고정되어 유동성이 없다. 시조문학은 이러한 중세기 문학의 전형적인 것으로서 주자학을 노래하고 강호시정을 읊고 군주를 찬송함에 적당한 문학의 종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설이 발흥하게 된 이유로는 임진*병자의 전란을 겪으면서 양반계급의 무기력함이 드러나게 되었고, 새로 일어난 신흥 평민계급의 대두로 활발하게 창작된 데 기인한다고 보았다.「임진록」, 「홍길동전」, 「구운몽」, 「장화홍련전」, 「춘향전」, 박지원의 소설, 「흥부전」 등은 모두가 조선조 후기 서민정신의 소산이라고 고정옥은 풀이했다. 예컨대 「춘향전」에 관해서는 이 작품의 등장으로 인해 조선 봉건사회의 서민문학이 본 궤도에 오른 것으로 설명하였다.
「춘향전」이 판소리 대본으로 창극화되어 민중의 갈채를 받기 시작하면서, 이 작품은 강렬한 휴머니즘을 지니게 되었고, 반봉건적 성향을 띤 문학이 되었다고 보았다. 이처럼 고정옥은 「춘향전」의 작품주제를 봉건관료의 부패상을 폭로하고, 권력을 통해 백성을 억압하는 지배계층에 대한 저항문학으로 정리했다. 고정옥의 유물사관에서 오는 문학해석이라 보겠다.
박지원(1737∼1805)의 소설은 봉건체제의 개혁이론이 담긴 것이며 진보적인 사상이 담긴 작품으로 해석하였다. 「양반전」은 「양반사회의 부패와 무력과 기만성을 척결하고 인간적이고 능동적인 신흥서민세력에 미래의 희망을 의탁한 내용」이라고 보았다.
「흥부전」을 평민계급에 가장 가까운 설화의 소설화로 평하였다.
이처럼 고정옥은 조선조 후기 소설의 발흥을 사회적인 측면에 연계시켜 조선조 후기 신흥평민계급의 현실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고정옥은 한국 문학 중에 특히 민요에 관심을 기울였다. 「조선민요연구」(1949)는 이러한 결실의 소산이다. 「민요에는 상류문학에서 찾을 수 없는 면면한 민족적 생활전통이 흐르고 있으며, 남의 밑에서 살던 서민과 부녀자의 진솔한 감정이 깃들어 있다」고 보았고, 나아가 서민계층의 정서가 잘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작품으로서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였다.
「우리어문학회」에서는 「국문학사」(1948)를 출간한 뒤 이어 「국문학개론」(1949)을 간행했다. 전자는 문학사의 전개를 통한 역사적 흐름을 해석한 것이라면, 「국문학개론」은 국문학의 장르별 해석이라 하겠다.
이 책에서 고정옥은 「국문학의 형태」, 「민요론」 등의 항목을 집필하였고, 김형규는 국어학과 국문학, 정학모는 한문학과 국문학, 손낙범은 향가, 정형용은 가사, 시조, 소설, 구자균은 연극과 신문학을 담당했다.
고정옥은 「국문학의 형태」를 정통문학과 민속문학으로 크게 이분하고 여기에다 중국과 서구문학과의 관계를 고려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정통문학에는 향가, 경기체가, 고려가요, 가사, 시조, 소설이 이에 속하고, 민속문학에는 민요, 설화, 연극의 세 분야가 이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국문학에서의 장르론이 고정옥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던 것이다. 장르론에 따라 국문학의 형태를 체계적으로 갈래 짓게 되었다. 그리하며 「국문학개론」에서 문학의 갈래체계를 통해 인식하고 실제 기술에 적용한 일은 고정옥의 공로로 평가된다.
민요론에서 고정옥은 민요에 담긴 민속성, 민족성, 음악성, 동작성 그리고 문학적인 측면을 고루 논하면서 민요는 이와 같은 종합성을 띤 작품으로 이해하였다.
「우리어문학회」의 「국문학개론」에서는 국문학의 개념과 범주를 두 측면에서 검토하였다. 「국어학과 국문학」에서 김형규는 국문학은 우선 국어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중시하고 「조선사람이 지은 영문이나 한시가 우리 문학이 못 되듯이 아무리 조선사람이 지은 것이라 하더라도 한문이나 한시는 국문학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한문학과 국문학」편에서 정학모는 조선민족이 중국민족과의 역사적 정치적 인연으로 말미암아 중국문화의 구속과 견제를 받으면서 성장하였다고 보고, 이로 인해 민족문화의 독자적인 건설을 꾀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더욱 과거 우리 민족은 중국의 한자를 외국문자로 생각하기보다는 우리식에 맞추어 우리나라의 문자로 인식하게끔 되었다고 하고,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는 말할 것도 없이 조선조에 국자가 만들어진 후에도 우리 민족은 한자를 빌어 문화활동을 영위하였음을 상기시켰다. 이점을 생각할 때 국문학의 범주 속에 우리나라 사람이 쓴 한자표기 문학작품을 국문학이 아니라고 확정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정학모는 한문학을 국문학의 테두리에 넣어 처리했다.
손낙범의 「향가」에서는 향가의 정의, 시대와 내용 형식의 문제를 논했다. 양주동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 이명선 「조선문학사(朝鮮文學史)」, 고정옥 「국어국문학요강(國語國文學要講)」, 조윤제 「조선시가원시형(朝鮮詩歌原詩形)」, 토전행촌(土田杏村) 「上代の歌謠」를 참고하여 정리했다. 새로운 독창적인 견해는 없다.
정헝용은 가사의 범위를 고려가사, 조선조의 궁정가사, 양반가사, 내방가사, 평민가사로 세분하였다. 또한 시조론에서 시조의 기원, 형식, 단형시조, 장형시조로 나누어 설명했다. 장형시조는 서민문학으로서의 성립 발전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보았다.
해방기 국문학 연구 성과 중에 이명선의 「조선문학사(朝鮮文學史)」(1948)는 안확의 「조선문학사(朝鮮文學史)」(1922) 이래 첫 번째의 체계적인 국문학사이다. 이명선은 경성제국대학 조선어 문학부 출신으로 서울대학 교수로 재직, 1950년 전쟁 중에 월북했다. 그의 문학론에는 사회경제사의 의의를 강조하면서 문학의 사회사적 입장에 서서 문학사를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명선은 유럽의 역사에서 드러나듯이 세계사는 노예제사회, 봉건제사회, 자본주의 사회의 순으로 전개되어 왔으므로 국문학사의 시대적 구분은 이러한 보편적 기준에 근거해야 한다고 했다. 고대, 중세, 근대의 시대구분은 이러한 유물사관적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청원(李淸源)의 「조선사회사독본(朝鮮社會史讀本)」, 백남운(白南雲)의 「조선사회경제사(朝鮮社會經濟史)」 등에서 삼한(三韓)을 원시부족국가로 보고, 삼국을 노예국가로 규정한 데 힘입어 이 시대 문학 현상을 봉건노예제 사회의 문학으로 설명했다.
실제로 이명선의 작품 해석의 실례를 몇 가지 들어보기로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기록된 유리왕의 「황조가」를 해석하면서, 고구려의 당시 사회는 모계제에서 부계제로 넘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씨족사회로 보고, 따라서 「황조가」도 그러한 사회 현실을 반영한 작품으로 이해해야 된다고 하였다. 유리왕을 중심으로 한 「화희와 치희의 상쟁도 근대 연애지상주의자들의 삼각관계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화희가 대표하고, 치희가 대표하는 종족간의 대립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며, 황조가 자체도 유리명왕의 치희에 대한 개인적 미련의 표현으로써 취급할 것이 아니라, 종족간의 상쟁을 화해시키려다가 실패한 회장의 탄성으로 이해할 것이 아닌가 ?」라고 하였다. 원시예술에서는 개인의 서정적 연애담은 결여되어 있고 그 특성은 집단적 활동에 있으며, 그것이 사회적 현실이라는 점에 관심을 기울였다.
가락국의 수로왕을 맞이하는 「영신군가」의 해석에서 이명선은 후대 신라 성덕왕 때 수로부인을 맞이하면서 합창한 허가와 관련시켜, 이 두 작품은 함께 용왕이 거처하는 바다(물)를 배경으로 한 대서사시로 평가했다. 서사시나 설화에서 장소와 시일이 중요한 의의를 차지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명선은 신라 향가를 화랑도 문학으로 파악했다. 이 점은 향가를 불교의 승려를 중심으로 한 불교문학으로 보는 관점과 대별된다. 신라향가의 작가로 알려진 인물의 신분을 화랑으로 보고 화랑도의 문학이 향가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화랑의 문학일지라도 삼국통일 이전의 것을 서사시로 파악했다. 이것은 화랑의 현실 생활이 삼국통일 이전에 있어서는 서사시적이었다는 데 유래하는 것으로 문학과 사회 현실의 밀접한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고대소설에서 「한글소설과 한문소설의 관계」를 들면서 한글소설은 한문소설에 비해 보다 더 평민적이긴 하나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고 보았다. 연암의 소설은 비록 한문으로 쓰여졌지만 양반 관료를 매도한 반봉건문학의 대표작으로 보았고, 김만중의 「구운몽」은 한글소설이지만 양반관료의 문학임을 지적했다.
이명선은 국문학 연구에서 시가 장르에 비해 소설 분야는 자료의 수집, 정리, 연구에 있어 가장 수준이 뒤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이본 연구의 필요성, 「완월회맹연」 같은 거대한 장편소설의 처리, 판소리계 소설의 연구, 소설, 독자-전기수-문제 등 소설 연구의 긴요함을 강조하였다. 당시에 주왕산(周王山)의 「조선소설사(朝鮮小說史)」(1950)가 간행되기는 했으나 김태준의 「조선소설사」(1938)의 재판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연암 소설에서 이명선은 연암은 중인신분이 아니면서 이념적인 면에서 완전히 중인과 일치하였다고 하고, 양반관료에 대한 통렬한 조소와 비판도 그의 사상과 이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허생이 상품을 독점함으로써 거리를 취득하고, 또 국제무역으로 대금을 획득하는데, 이것은 그 당시의 중인들의 현실이며 꿈이었다. 또한 연암 소설은 연암의 혁신적 개혁의지가 나타나 있기는 하나 미래를 헤쳐 나가는 진보성의 한계로 말미암아 우열한 형식주의의 표본이 되고 말았다고 하였다. 또 이명선은 「홍길동전」은 과연 허균이 지은 것이며, 원작대로인지의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홍길동전」을 「혁명소설이니 사회소설이니 하며 무슨 계급투쟁이라도 선동하는 소설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으나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홍길동전」의 혁명사상이란 계급혁명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불우한 정객이 인기를 올리기 위하여 혁명을 가장하고 이용하려 한 것이라 단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을 푼 것은 홍길동 한 개인이지, 일반 인민대중과는 아무관계도 없는 것이라 보았다. 「홍길동전」은 애매한 혁명사상에 입각한 것이며, 사회적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결여된 작품으로 평가했다. 「홍길동전」에서 보인 사회적 현실 인식의 결여는 그의 근본사상이 유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점과 그의 사회에 대한 불만이 인민대중에 대한 입장에 서서가 아니라 제 자신의 정치적 불우가 중심이 되었음을 말한다.
이명선은 「춘향전」 연구의 방향과 과제를 심도 있게 논의했다.
「춘향전」이 어느 시대에 어떤 형태로 발생한 것인가 ? 설화의 소설화이냐, 아니면 실존인물의 개인 행적인지, 어떤 경로를 밟아 어떤 형태로 발전해 내려온 것인지 ? 소설로 연극으로 시가로, 어떻게 분리되고 교류한 것인지, 여러 이본간의 차이는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것인지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그는 「춘향전」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전제를 들었다.
첫째, 「춘향전」에는 조선의 봉건사회 말기의 사회상이 여실히 표현되어 있어 거기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성격이 놀랄 만치 생생하고 정확하게 묘사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춘향전」에 나오는 새로운 타입의 인간은, 충이니, 효니, 열이니 하는 봉건도덕의 노예가 된 보수적인 인간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또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인간들이다.
셋째로, 조선의 참된 산문이 「춘향전」에 이르러 비로소 부분적이나마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김삼불(金三不)은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 해방된 다음, 다시 서울대학교 국문학과에서 수학했다. 정병욱(1922∼1985), 장덕순(1921∼), 강한영(1913∼)과 같은 경우이다. 그는 1950년 6*25 전쟁으로 월북하며 북한대학에서 국문학 강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삼불은 「배비장전 옹고집전」(1950) 교주를 내면서 판소리 문학의 위상을 규명하였다. 그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판소리 사설은 소설 장르에 속한다. 조선조 말기 서민문학의 조류에서 새로 생긴 장르로 그 사설은 서민정신의 반영물이다.
판소리 발생단계를 삼단도식으로 설명하였는 바 설화→타령→서민소설의 발생과정을 밝혔다. 이 점은 판소리 형성과정을 규명하는 데 있어 김삼불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배비장전」은 문석준(文錫準) 같은 광대에 의해 불려지고, 「옹고집전」은 권삼득(褙三得)에 의해 불려진 판소리였다.
서민소설의 팽창과 성장시기를 순조 후 고종 초로 보았다. 그것은 서민소설이 타령 후에 일어난 문학 장르란 점을 감안하여, 서민문학의 최고 고비를 갑오년(1894) 어름에 두어 상향선을 잡은 결과였다.
판소리란 특수 계급, 즉 재인, 광대에 의하여 이야기의 종두지미 한 마당을 판으로 짜서 소리로써 엮어냄을 이름한 것이다. 판소리 구성은 말〔아니리〕과 창조로 되어 있고, 광대의 몸짓〔발림, 사챠〕이 중요한 기능을 갖는다. 그러나 판소리는 주된 것이 창조며 발림은 종속적인 것이다.
김삼불은 우리 문학 연구에 있어 판소리는 「큰 광맥적 존재」라 보고 열두 판소리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김삼불의 또 다른 교주서로 김수장(奇壽長) 편선의 「해동가요(海東歌謠)」(1950)를 들 수 있다. 가람 이병기의 해제, 김삼불의 자서와 정치한 석주가 붙었다. 작가, 작품, 어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색인처리를 한 점은 「해동가요」에 적힌 시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김삼불은 우리의 시가문학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장르가 시조라고 하였으며, 이 시조를 모은 「해동가요」야말로 시조 연구에 있어 뺄 수 없는 중요한 자료라고 하겠다. 시조는 문자로 감상되는 것보다, 창을 통한 작품의 향수라는 점에서 시조집의 적층변천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김삼불 교주 「해동가요」는 일석본(이희승)과 주씨본(주시경)의 유명씨부의 교합본이다.
고정옥(1911∼?)은 경성대학 조선어문학부를 졸업하였다. 고교형 교수의 지도로 졸업논문 「朝鮮の民謠に就しῈこ」(1938)를 발표했다. 해방기에는 서울대학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우리어문학회」의 회원으로 「국문학사」와 「국문학개론」을 공동 집필했고, 앞에 든 졸업논문을 바탕으로 「조선민요연구」-원시예술로서의 민요일반과 서민문학으로서의 조선민요-(1949)를 발표하였다.
「조선민요연구」는 전10장으로 구성되었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민요연구 수집의 동기
민요의 개념
민요의 성립
민요의 발전
조선문학과 민요
조선민요의 형성
조선민요 수집연구
조선민요의 분류
조선민요의 시질(時質)
조선민요 수집연구의 장래를 위하여
고정옥은 우리 문학에서 특히 민요가 차지하는 위치를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모든 종류의 문학이 민요와 밀접한 교섭을 갖고 있으며 소설, 연극, 가사가 그러하며 시조 역시 조선조 중엽 이후에 이르러서는 민요와 밀접한 관계가 유지된다는 점에서 민요의 문학적인 의의를 높게 평가하였다.
고정옥은 「민요를 조선문학 복판에 가지고 오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고, 해방을 맞이하여 조선문학이 민주적인 민족문학의 건설을 지향함에 있어, 과거에 가장 서민적이며 가장 향토적이었던 민요유산의 연구*섭취야말로, 새로운 우리 문학의 길을 개척하는 데 불가결한 선행과제라고 하였다. 이런 점에 바로 「조선민요연구」 저작의 의의가 주어진다고 보았다.「조선민요연구」에서 중점적으로 연구된 점은 원시예술로서의 민요를 규명함과 동시에 예술 기원론을 언급하고, 조선서민문학의 역사를 탐구하면서, 국문학에 있어 문학으로서의 민요가 차지하는 기능적 지위의 중요성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현존 조선민요를 주로 내용을 기준으로 세분하여 그 정신과 형식을 검토함으로써 조선민요의 성격을 밝힌다. 곧 민요는 「현재급 장래 할 조선문학을 풍성케 하고 비극케 할 역량을 내장한 훌륭한 전통적인 서민문학」이라는 것과, 이런 역할을 발휘하기 위하여서는 전국 향토민요의 철저하고 완전한 수집이 요청되는 선행과업이란 점을 강조하였다.
고정옥은 「조선민요연구」를 통해 조선민요의 특질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첫째, 남성들이 부른 민요보다는 부요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우세하다. 남성들의 노래에는 상류지식계급이 만들었던 유교도덕의 냄새가 풍기는데 비해 부요는 그 생각과 말씨에 있어 그들의 생활과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
둘째, 풍부한 해학성을 들 수 있다. 정치적, 계급적, 사회제도적 불만에 정면으로 반항하는 대신, 그들은 풍자와 농담으로 이를 야유하고 무시하고 허무화해서 자기 위안을 꾀했던 것이다.
셋째는 풍류를 해하는 점이다. 우리 민족은 자연에 대한 미적 정서가 발달한 것으로 보았다.
넷째로 유교 교리의 침윤을 들고 있다. 조선조의 유교정책은 모든 문화에 물들었으며 민요에도 유교의 교리는 짙게 물들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다섯째, 일반서민의 지배계급에 대한 순종성이라든지, 여성의 남성에 대한 복종성이 민요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여섯째, 무상취락적인 경향이 조선민요 속에 많이 깃들어 있다.
일곱째, 민요의 내용 가운데는 조선민족의 생활고가 잘 반영되어 있다. 생활요는 그래서 「가난한 민요의 애가」라고 불려졌던 것이다.
여덟째, 민요의 형식 속에는 아름다운 운율적인 관용구가 많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아홉째, 우리 민요의 형식에는 지나치게 4*4조를 지키려는 노력에서 3음절의 말씨를 4음절로 늘이는 예가 많이 있다. 고정옥은 이점을 두고 이르기를 「리듬의 장난이 너무 많다」라고 하였다.
열째, 향토적인 특성이 드물다. 곧 어느 지방의 민요를 들어보아도 대개 비슷비슷해서 특수하게 향토색이 유지된 노래는 드물다는 것이다.
열한째, 조선의 민요 속에는 무용요가 희귀하다는 것이다. 조선의 민요에는 노동요가 제일 많고, 유희*어희적(語戱的) 노래도 상당히 풍부하나 무용요는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고정옥의 민요 연구의 업적 중에 노작으로 평가될 수 있는 분야는 조선민요의 분류이다. 그가 민요의 분류에서 특별히 고려한 점을 들면 아래와 같다.
1. 내용상 차별에 의한 것.
2. 가자(歌者)의 성(性) 연령에 의한 것.
3. 가창 되는 지역상 차별에 의한 것.
4. 노래의 시대성 신고(新古)의 차별에 의한 것.
5. 노래와 민족생활의 종합면에서 보았을 때의 차별에 의한 것.
6. 노래의 형태상 차별에 의한 것.
7. 곡조 또는 명칭상 차별에 의한 것.
8. 장단(길이)의 차별에 의한 것.
9. 성립조건의 차별에 의한 것.
10. 운율상의 차별에 의한 것.
11. 표현상 경향의 차별에 의한 것.
이상의 분류기준에 따라 실제 조선민요의 분류를 시도하였다. 고정옥의 민요분류는 학문적인 체계를 세운 최초의 것으로 종전에 수립된 민요를 총람한 결과로서 얻어진 소산이라고 하겠다.
고정옥은 민요분류를 통해 그들 민요 작품에 담긴 의미와 사상을 정확히 주석 설명하였다. 이점으로도 독자에게 민요에 대한 이해를 쉽게 접근하게 하였다. 그리고 조선민요의 특성을 파악함에 있어 고정옥이 시도한 민요의 분류는 큰 구실을 하였다.
고정옥 「국어국문학요강」(1949)은 국어학과 국문학의 간략한 개론서로서 국문학 작품의 해독과 감상의 방법을 제시한 입문서이다. 이러한 교과서용 참고서는 해방기를 맞이한 우리 현실에 적절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특히 고전시가의 통석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
문학연구에서는 향가, 고려가요, 시조, 가사, 소설, 연극, 민요, 신소설, 신문학 등 국문학의 각 장르에 걸친 작품 해석을 집중적으로 논하여 국문학 연구의 입문서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장시조민요, 연극, 신소설 등 그때까지 묻혀있던 부분을 새롭게 개발하였고, 고정옥 자신도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 방면에 새로운 진지한 연구의 서광이 비추어지기를 바랬다.
국어학 방면에는 이두와 훈민정음의 국자문제의 실체를 밝혔고, 나아가 언해, 사전류, 국자 발전과정, 어학기관(사역원, 언문청, 육영공원, 국문연구소, 조선어강습원, 어문철자법사정회, 조선어학회)의 6부면으로 나뉘었다. 국어학의 이해에서 특히 사전류의 고찰은 매우 중요한 접근이었다고 하겠다. 백과사전, 특수사전(법제, 지리, 처세, 인명, 의학), 한자언해사전(운서, 옥편, 유별(類別)사전), 중국어 사전, 외국어 사전(만주어 사전, 몽고어 사전, 일본어 사전, 아라사어 사전, 불어 사전, 영어 사전, 나전어 사전) 등 크게 5종으로 나누어 우리나라 사전의 현장을 드러내었고, 이 사전은 국어학 연구에 있어 새롭게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한 연구분야임을 강조하였다.
고정옥은 민요론에서 조선민요의 대략적인 개념을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설명하였다.
o 작가가 없다.
o 부단히 개작된다.
o 향유계급은 농촌의 서민들이다.
o 문학*음악*동작의 종합체이다.
o 단형의 노래이다.
o 서정성을 지니고 있다.
o 민요의 성립과 전승은 주로 음악에 의해서 좌우된다.
o 민요는 멜로디만으로 된 노래이다(도가(徒歌)).
o 민족의 노래이다.
o 민속학의 대상이 된다.
o 민요에는 문학성이 풍부하다.
o 노랫말에 문학성 담겨있다.
이상의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고정옥은 고대시가, 영신군가와 같은 작품은 원시종교적인 민요를 한역한 것이라고 보았고, 향가 중에 서동요, 풍요, 헌화가, 처용가도 민요가 정착된 것으로 보았다. 고려가요의 대부분도 민요적 작품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소설, 장시조, 가곡, 창극 등에 민요의 정서와 형식이 침윤되었다고 하였다. 민요가 한국 문학의 모든 문학 장르에 침투되어 연결된다는 점은 민요가 차지하는 우리 문학의 위상을 드러낸 것이다. 이점은 우리나라 문학의 한 특징이라고 하겠다. 고정옥은 민요가 우리나라 문학의 모든 장르와 연결 침투된 사실을 강조하면서 현존하는 「삼국유사」의 향가는 광의로 볼 때 민요가 정착된 것이라고 고찰했다.
고정옥은 고려가요는 표박문학이었지만 애초에는 뚜렷한 작가가 있었고, 그것을 개작해온 사람은 상당한 교양을 지닌 지식계층이라고 보았다. 이점은 고려가요를 유녀와 같은 하층이나 도시의 평민계층의 작품으로 해석하는 견해와는 다르다고 하겠다.
구자균(1912∼1964)은 개성출신으로 1936년 경성대학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했다. 해방 전에는 대구사범에서 교사를 지냈고, 1945년 10월부터 타계할 때까지 고려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의 해방 건설기 국문학의 업적으로는 「우리어문학회」편 「국문학사」와 「국문학개론」에 집필한 연극, 신문학 그리고 현대문학이 있다. 그러나 이보다는 「조선평민문학사(朝鮮平民文學史)」(1948)의 출간이 더욱 중요한 업적이라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구자균 「조선문학사」는 1936년 그의 경성대학 졸업논문 「서사시인(胥史詩人)을 중심으로 본 근대 위항문학(委巷文學)」을 개고한 것이다. 이 책을 제1부로 출간하고 이어서 근대평민시가사(近代平民詩歌史)를 2부, 근대평민소설사(近代平民小說史)를 3부로 속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2, 3부는 간행되지 않았다.
구자균은 문예 현상은 일정한 사회생활을 기반으로 하여 생기고,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대 평민의 문학활동을 살핌으로써 조선문학전사를 보충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고, 평민들의 문학을 통해서 시대와 사회상을 밝힐 수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이 같은 견지에서 구자균은 문예사회학의 방법을 응용하여 근대 평민문학을 조선의 사회사 정치사 및 문화사와의 관련성을 중시해 가면서 고구한 것이다. 구자균으로 하여금 조선조 평민문학의 가치를 더욱 부각시킨 것은 해방 건설기의 문학연구의 흐름과도 관계된다고 보겠다.
「조선평민문학사(朝鮮平民文學史)」-근대평민한문학사(近代平民漢文學史)-는 조선조 후기 사회의 서사(胥史), 중인(中人), 서류(庶流)의 이른바 외항문학의 사적 개관을 규명한 연구이다.
구자균은 조선조 숙종조 이후에 크게 일어난 평민계층의 문학을 문학사에 드러냄으로써 조선조 문학의 우수한 가치를 발굴하였던 것이다. 이점은 논자의 문학연구의 시각이 문예사회학적 방법으로 확대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조선평민문학사」는 크게 3편으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다.
1. 근대 평민문학의 구성-사회제도, 서리, 중인, 서류.
2. 평민문학 총론-발생, 시대개관, 시조상의 평민 향리와 문학
3. 시인 각론-요람시대, 대두시대, 전성시대, 소시인군 배출시대, 쇠퇴시대
김사엽은 해방기 연구업적으로 「조선문학사」(1948)를 비롯하여, 「정송강연구(鄭松江硏究)」(1950), 최남선(崔南善), 방종현(方鍾鉉)과 함께 편찬한 「조선민요집성(朝鮮民謠集成)」 (1947)을 발간했다. 문학사의 시대구분을 상고, 중고, 근세의 세 시대로 나누었고, 상고문학사는 삼국이전과 삼국의 문학으로, 중고문학사는 고려왕조의 문학, 근세문학사는 조선왕조 문학을 다루었다.
김사엽 문학사의 특성은 해방과 함께 일어난 민족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표명되어졌다는 점이다. 조선 문학의 개념규정에서 당시의 국문학 연구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아무리 조선인다운 감정의 표현이며, 문맥이라도 한문으로 쓰여진 것을 가지고 우리 문학이라고 할 수 없으니 오늘날 남아있는 산적한 문집, 잡서 등 한문으로 기록된 것 따위는 우리 문학 울타리 너머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무용지물들이다.」
김사엽 「조선문학사」는 그의 국문학에 관한 범주 설정에서 보인 대로, 한글로 쓰여진 작품을 들어 논의하려는 의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해방기의 문학성과 중에 기록될 만한 점은 우리 문학작품을 정리 소개하여 알리는 일이었다. 우리 문학작품을 널리 알려서 작품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작업이 이 시기에 새롭게 일어났다. 그 중에서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문학연구는 아니지만 김수경(金壽卿)은 모리스 쿠랑 Maurice Courant(1965∼1939), 「조선서지(朝鮮書誌)」Bibliographie Coreenne의 서론만을 번역하여 「조선문화사서설(朝鮮文化史序說)」(1947)을 출간했다. M. 쿠랑의 「조선서지」 전3권(1894∼1896)은 불란서 파리에서 간행된 것이며 1901년에 보유 1권이 다시 추가 간행되었다. 당시 필자가 접할 수 있었던 조선서적 3821부를 언어, 유교, 사서, 기예 등 9부분으로 분류한 다음 상세한 서지적 해설과 흥미 있는 문화사적 논평을 가한 업적이다. M. 쿠랑은 불란서 공사관의 서기로 서울에 거주한 1년 10개월(1890. 5∼1892. 2) 동안 수집한 서적과 연구보고서이다. 김수경은 조선문화요론으로 가장 정채한 것으로 정평이 있는 「서론」만을 번역했다. 이 번역의 시작은 역자가 1939년 경성대학 재학 당시였으나(임화가 이 출판의 간행을 종용), 해방기를 맞이하여 1947년 출간했다. 내용의 중요 골자는 조선서지의 탄생, 조선의 도서, 조선의 문자, 조선의 사상, 조선의 학예, 조선서지의 중요 참고서목 등이다. 이 서적의 출간은 조선문화, 특히 서적 인쇄문화의 귀중함을 재인식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것으로 평가된다.
홍기문(洪起文)의 「조선문화총화(朝鮮文化叢話)」(1946)는 단편적인 수상집이다. 이 글 속에는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해박한 식견이 나타나 있다. 해방 공백기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 민족문화를 폭넓게 정리한 것이다.
끝으로 해방 건설기 국문학 연구의 방향을 김태준의 글을 통해 마무리 짓기로 한다.
김태준은 해방기에 쓴 「문학유산 정당한 계승방법」(1946)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고문화의 장점을 계승하고, 외국의 진보적 문화를 비판적으로 섭취하여 우리 민족의 특성을 발휘한 새 문화를 세워야 한다……. 국수주의적 경향의 대두를 경계하고 배격하여야 한다. 이것의 배격 없이는 우리는 민족문화를 진보적 방향으로 인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김태준은 새로 건설할 문학 연구는 진보적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이란 점을 강조했다. 그는 진보적 문학 연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o 고문학의 수집, 학습, 연구, 보급의 일반화
o 고문학의 「엔사이클로페디아」식 연구가 아닌 과학적 입장에선 인민문화적인 연구
o 문학연구자의 예술비평, 정치비평과의 통일과 새 시대의 문화이론의 수립의 기여
o 문학자의 대중에의 투입과 선전 계몽활동
o 민주주의 민족문화의 수립
이점이 바로 해방 건설기 국문학 연구가 당면한 과업이며 무거운 짐으로 인식했다.
해방기 국문학 연구는 대립과 투쟁 속에서 사상논쟁으로 치솟던 문학운동과는 다른 측면에서 민족주의 문학의 전통성을 강조하면서 진지한 연구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그 시대적 의의가 새롭게 평가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