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보다 높은 사랑 물보다 깊은 지혜
- 여약사신문 창간 10주년에 붙여
붓쟁이 도정 권상호
열정의 십 년
너는 강산을 바꾸는 대신에
이웃의 삶을 바꾸었다.
네가 여약사신문이란 이름으로
이 땅에 어둠을 깨치고 불을 밝히자
누웠던 몸 일어나 춤을 추고
게으른 영혼에 비가 내렸다.
네가 정보의 옷을 입고 집집이 찾아들자
이 땅의 건강문화가
새 지평을 열었다.
생을 일깨운 너
행복이 가득했다.
믿음을 안겨준 너
즐거움이 가득했다.
그 신묘한 너의 붓 끝에
영혼은 날개를 달고
그 진실한 너의 생각에
건강은 춤을 추었다.
21세기 새 시대와 동행하면서
새순 같은 건강과 소박한 행복 얘기들이
보석처럼 빛나는 꼭두새벽 새소식들이
쌓이고 쌓인 창간 10주년
돌이켜보니 정녕 눈부시구나.
여약사신문이여,
그대 목소리 크도다.
이제 자부심을 가져도 좋으리.
마음껏 뽐내어도 좋으리.
산보다 높은 사랑으로
물보다 깊은 지혜로
앞으로의 십년 아니 억 천만년은
더욱 씩씩한 얼굴로 옹골차게 자라나거라.
여- 여약사님의 친근한 벗 여약사신문이여
약- 약속은 오직 하나 끝없는 건강 도전
사- 사랑의 묘약으로 나날이 성숙하고
신- 신뢰의 처방으로 다달이 건강하여
문- 문화의 오아시스로 길이 샘솟으라.
권상호
*저술 및 논문 : 고등학교 서예교과서, 중국서예미학, 나제서풍 비교연구, 자연 인간 그리고 서예 등
* 라이브 서예가로서 KBS, EBS, 종로, 보신각, 숭례문, 청계천, 대학로, 해인사 등지와 카페나 각종 행사장 등에서 80여 회 라이브 서예 공연. 개인전 3회. 그룹전 220여 회
* 주소 : 서울 노원구 중계1동 롯데우성아파트 107-1102
* 연구실 : 부휴실(강북구 미아동 192 현대아파트 상가 303호)
* 전화 : 011-9009-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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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예 단상
경북 예천 어신초등학교 시절 한 번도 내 붓글씨가 교실 뒤에 붙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먹지 위에 맹물로 잘 써 보려고 무척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내 고향 수동마을엔 서당이 있었고 한문을 배우러 다녔으니 서예가 낯설진 않았다. 예천 대창중고등학교 시절엔 교내 현관과 교장실에 걸린 멋진 글씨를 보고 몰래 흉내 내 보곤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원곡, 초정 선생님의 글씨였다. 경북사대 시절 외로움을 달래고자 교내 서예서클 ‘경묵회’를 만들어 서예로 사유하고, 서예로 생활하는 법을 배웠다. 이것이 내 愛筆運命(애필 운명)의 결정판이었다. 이윽고 해정 홍순록, 수암 한정달 선생님으로부터 붓길을 익히고, 근원 김양동 선생님으로부터는 학문하는 방법과 篆刻(전각)의 길을 텄다.
스스로 부족함을 알면서도 가르치는 일을 그만둔 적이 없으니 팔자인가 보다. 그리하여 啐啄同時(줄탁동시)의 비법으로 敎學相長(교학상장)의 노하우를 밟아 나갔다. 교사로 발령받는 대로 예천, 점촌에서 붓글씨를 가르쳤고, 상경해서는 신일고등학교 교사, 경희대학교 한문 강사, 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 서예과 겸임교수로서 일하면서 퍼포먼스의 새로운 장인 ‘라이브 서예’ 공연을 펼쳐나갔다. 현재 국내외에서 200여회의 서예공연 및 타 장르와의 협연을 가졌으며, 아티스트 카페 ‘소리빛’을 개업하여 다방면의 여러 예술인들과 더불어 실험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제 오십대 중턱이다. 공부맛이 제대로 우러날 때이다. 白雲(백운) 선생이 병석에서도 시를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詩魔(시마)에 걸렸듯이, 나는 沒墨(몰묵)하여 書魔(서마)에 홀렸나 보다.
처음 붓질을 배울 때와 지금은 사뭇 느낌이 다르다. 線(선)인 줄 알고 썼는데 알고 보니 劃(획)이었고, 運筆(운필)인 줄 알았는데, 붓을 연주하는 奏筆(주필)이었다. 그리하여 손가락 끝에 붓을 거꾸로 세우고 허공에 글쓰기를 좋아하고, 내가 붓이 되어 자주 춤을 추기도 한다. 永字八法(영자팔법)은 절대 모양이 아니라, 동작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고 서예체조에 열중한다.
서예는 단순한 평면예술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混淆(혼효)된 종합예술이다. 우주의 씨앗은 ‘소리’와 ‘빛’이다. 서예는 빛으로만 보여 줄 게 아니라 먹울림으로 들려주기도 해야 한다. 그래서 그 때 그 자리가 아니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즉발적인 라이브이다. 가수가 관중이 없으면 노래가 되지 않듯이 글씨 역시 관중이 없으면 잘 쓰여지지 않는다. 홀로 쓸 때에도 ‘十目所視(십목소시) 十手所指(십수소지) 其嚴乎(기엄호).’로 최면을 걸고 쓴다. 사실 내겐 其嚴乎(기엄호) 대신 其樂乎(기락호)이다.
서예는 學問(학문)이므로 ‘問’[질문]이 중요하고, 學習(학습)이기에 ‘習’[날갯짓 하듯 반복학습]이 소중하다. 쪽팔림은 순간이요, 실력은 영원하다. 깨달음은 순간이요, 즐거움은 영원하다. 覺得(각득)하여 法悅(법열), 藝悅(예열), 道悅(도열)을 맛보지 않겠는가?
오늘은 평생 붓길을 同行(동행)할 제자들과 함께 選文(선문), 選體(선체), 構章(구장)의 즐거움을 나눠야지... 오늘따라 붓으로 춤추며 먹을 징처럼 울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