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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
2010/03/24 09:34
http://blog.naver.com/hy0unn731/90083777365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고, 잘 전해지지도 않아요. 또 말은 오해의 소지도 많고.."
나도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이 세상에는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음을 알기에.
말하려 하면 할수록 말의 감옥에 갇히고,
언어로 소통하려 하면 할수록 더한 단절을 느껴야 했던 순간이 나 역시 많았으니까.
.
K를 조금, 아주 조금 알 것만 같아지는 순간이었다.
그 짧았던 며칠 동안 K가 들여다본 내 모습이 내 안의 수많은 나중에 어떤 나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K는 나의 지극히 일부만을 보고, 나라는 사람을 조금은 알 것 같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체 게바라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 그랬다.
그가 본 것들, 동전의 앞면이 열 번 나올 동안 한번밖에 나오지 않은 뒷면만을 본 것일 수도 있다고.
나는 어떤 사람에게는 슬픔의 정조를 가진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으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깃발처럼 가볍게 나부끼는 바람으로 다가갔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그늘 없는 햇살 한 자락이었을 수도 있겠지.
누가 누군가를 안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
누군가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 그건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
어쩌면 우리는 여름날 오후의 짧은 꿈처럼 그렇게 잠시 스친 모습을 한 사람의 전부로 기억하는 건 아닐까.
[출처] 누군가를 안다는 것.|작성자 봉구양
진정한 지혜는 나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이다. -소크라데스
사랑하는 것과
알게 되는 것은 거의 같은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잘 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 헤르만 헤세의《헤세의 사랑》중에서 -
* 가장 잘 알기 때문에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잘 알기 때문에 가장 조심해야 할 것도 많습니다.
아는 만큼 더 챙겨보고 살펴볼 줄 알아야 하고,
또 그만큼 덮어줄 줄도 알아야 합니다.
권상호
어원분석은 그다지 도움이 안됩니다. 노우는 라틴어의 그노스세레(gnoscere) 혹은
노스세레(noscere)에서 나온 말인데(그(g)가 붙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오늘날 know라고
쓰고 k를 발음하지 않는 관습으로 남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헬라어
기노스코가 어원입니다. 그러니 뭐 더 나올게 없겠습니다. 그래서 웹스터 사전의 뜻풀이를
보겠습니다.
타동사로서의 노우의 첫 번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번역은
하지 않습니다. "1 a (1) : to perceive directly : have direct cognition of (2) : to have
understanding of <importance of knowing oneself> (3) : to recognize the nature of :
DISCERN b (1) : to recognize as being the same as something previously known (2) : to
be acquainted or familiar with (3) : to have experience of"
첫 번째 풀이부터 막힙니다. 안다는 것은 "직접 퍼시브한다(perceive), 혹은 직접적인
코그니션(cognition)을 갖는다"랍니다. 그럼 이번에는 퍼시브와 코그니션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같은 사전에서 퍼시브는 "to attain awareness or understanding of"로, 코그니션은 "the act
or process of knowing including both awareness and judgment"라고 풀고 있습니다.
퍼시브를 알려면 어웨어니스와 언더스탠딩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코그니션의 경우는 더 기가 막힙니다. 그것은 "앎(knowing)의 행위 혹은 그 과정"이랍니다.
지금 우리는 "앎"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낱말의 사슬을 따라 코그니션까지 왔는데, 그
코그니션이 다시 "앎"이라는 말로 풀리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알다"는 어느 문화권에서나 매우 기초적인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말을 동원해서 그것을 설명하려 해도, 더 어려운 말을 사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알다"는 말은 너무 쉬워서 더 쉬운 말로 설명이 불가능하단
말이지요.
한국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야후의 국어사전과 연세대에서 만든 한국어
사전에 나오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뜻풀이를 보십시다. 예문을 제외하고 새김 부분만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알다 ①(어떤 사실이나 현상을) 의식이나 감각으로 느끼거나 깨닫다. 감지하다. 의식하다.
②(어떤 사실이나 정보를) 머릿속에 가지다. (사물을) 헤아리거나 정보를 통해 어떠한
상태인지 깨닫다. 인지(認知)하다. 파악하다. 이해하다. (야후 국어사전)
알다 ① (경험, 학습, 정보를 통하여) 모르던 것을 깨닫다. ② (어떤 것을) 이해하는 지식을
가지다. (연세대 한국어 사전)
풀이는커녕 모르는 말이 더 많이 나옵니다. 사실, 현상, 의식, 감각, 감지, 정보, 인지, 파악,
이해, 경험, 학습, 정보, 이해, 지식 등의 한자어 뿐 아니라, 느끼다, 깨닫다, 모르다 등과 같은
한국 고유어의 인식론적 동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 어려운 말들을 알아야 그 쉬운
"알다"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좀 우습지 않습니까?
더 황당한 것은 의식의 식(識), 감지와 인지와 지식의 지(知), 그리고 인지의 인(認)자의
새김이 모두 "알다"라는 점입니다. "알다"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사전을 찾았는데,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설명어로 "알다"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본 영어의 노우와 코그니션의
경우와 같습니다.
"알다"를 다시 "알다"라고 설명한다? 틀린 설명이야 아니겠지만, 이런 것을 동어반복이라고
합니다. 동어반복은 설명이 아닙니다. 더 얻어지는 정보가 없기 때문이지요.
조정희 드림
권상호
국보문학은 살아있는 문학을 담아내는 등용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