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솔한 삶에서 발효된 토종 예술
- 운재(韻齋) 선생의 전시회에 붙여 -
권상호(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 겸임교수)
그는 불암산 자락 마들에서 나와 이웃하여 살고 있다. 시골이라 치면 내가 담 밖으로 목을 내어 부르면 응답이 올만한 정겨운 거리이다.
그는 서울의 여느 사람과 비슷하게 아파트에 살고 있다. 하지만 남과 다른 점이 있다면 출입구에 춘첩이 붙어 있어서 방문객을 미소 짓게 한다.
그는 늘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는 편이다. 그것은 마음의 여백과 고운 심성에서 나오는 인품의 향기이다. 그 인품의 향기가 붓길을 따라 흐르면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발길을 멈추게 한다.
호를 보면 작가가 추구하는 정신세계의 일단을 살필 수 있다. 이승우 선생의 號, ‘韻齋’가 말해주듯이 그의 작품을 대하면 종이와 먹의 하모니가 빚어내는 묘한 ‘韻致’ 속에서 ‘氣韻’이 생동함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운재 선생의 붓 작업에는 어떤 개성이 묻어나는가.
첫째, 그의 작품에는 작은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그의 삶 주변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소재로 택하기 때문이다. 이는 평소의 많은 독서와 사색을 바탕으로 다시 윤색되어 재미있는 이야기로 나타난다. 현실과 거리가 먼 내용을 選文하여, 평소 접하는 많은 서예 작품에서 우리는 현실과 괴리된 느낌을 받는데 운재의 경우, 그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서예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등장하는 것 중의 하나가 현실과 거리가 먼 내용을 選文한 탓으로, 서예가와 감상자 간에 소통이 잘 되지 않는 점이다.
둘째, 그의 작품에는 고향 냄새가 난다. 그는 현대인의 복잡한 도시 생활 속에서 찌든 향수를 붓끝으로 캐내곤 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과 글씨에는 향수가 물씬 풍긴다. 작품 전체 분위기를 지배하는 황토의 건강함이 기분 좋게 다가온다. 누런빛의 화선지 위에 질박하게 쓰여진 글씨는 마치 어린 시절 고향집의 황토벽에 부지깽이로 그어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가끔은 약간의 可讀性 문제로 긴장하다가도 이내 그만의 독특한 어법과 문맥을 파악하고 나면 너털웃음이 나온다. 서예를 즐기는 이는 걸음이 대문 밖을 벗어나지 않아도 몸은 이미 강호(江湖)에서 노닐고 있고, 생활이 도심에 파묻혀 있어도 마음은 늘 고향이나 산림(山林)에 깃들고 있는 것이다.
셋째, 그의 작품은 형식과 내용이 잘 어울린다. 외형의 文과 내용의 質이 썩 잘 융화되고 있다. 그야말로 그의 작품은 文質彬彬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그의 소박하고 천진한 성품에 기인하는 것이리라.
마지막으로 그의 그림에는 그리움이 배어 있다. 그 그리움은 휑하니 뚫린 여백으로 표출된다. 자연에 내재한 본질의 문제까지 관조하듯 담담히 들려주고 있다. 그의 書와 畵는 한 화면 안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림은 글씨 닮아가고 글씨는 그림을 닮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이 둘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연민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것이 바로 그의 작품에 내재한 그리움의 미학이다.
이제 앞으로는 그의 생활과 철학이 더욱 곰삭아서 잘 발효된 토종 예술로 승화된 걸작이 운재 선생의 인생 붓길에서 묻어 나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07.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