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

조경환(曺京煥) 의병장이 남긴 시와 만장

'호남창의대장' 조경환 의병장의 행적

 

조경환(曺京煥) 의병장1876214, 전라남도 광산군 서방면 산안리(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에서 태어났다. 9세부터 22세까지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1900년부터 전국 명산대천을 순례하며 산세와 지리를 답사 기록하고 당신 호를 대천(大川)이라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이 박탈되고, 1907년 대한제국군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자 조경환은 분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190712월 초순 광주·함평 등지에서 이원오(李元五김동수(金東洙양상기(梁相基) 등과 뜻을 모아 1210일 함평으로 죽봉 김태원(竹峯 金泰元)을 찾아갔다. 그때부터 조경환은 김태원 의병부대의 좌익장(左翼將)이 되어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071214일 새벽, 함평 성내의 일군을 급습하여 적 수십 명을 생포하고 총 18정 및 다수의 화약과 탄환을 노획하였다. 이 전투 이후 조경환은 김태원 의병부대의 선봉장(先鋒將)이 되었다. 190811일 적의 동태를 미리 파악하고, 창평 무동촌(舞童村)에 잠복 기다리고 있다가, 내습하는 일본헌병대를 맞아 싸워, 대장 요시다(吉田) 이하 수명을 사살하였다.

1908425일 김태원 의병장이 순국한 뒤 조경환은 의병진의 중의에 따라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조경환은 '호남창의대장'이라는 이름으로, 각지 향교에 수차 격문을 발송하여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 한편, 의병부대를 이끌고 광산 흑석리(黑石里)로 가서 경찰대와 교전한 결과, 대장 정득주(鄭得柱) 이하 수명을 생포하였다. 그 뒤에도 광주의 동촌(東村), 담양의 대치(大峙), 장성의 낭월산(浪月山), 함평의 석문산(石門山) 등 여러 곳에서 일군과 교전하여 혁혁한 승전고를 울렸다.

이와 같이 연전연승하던 조경환 의병장은 1908년 음력 1219일 구정을 앞두고, 설을 쇠고자 의병을 귀향시킨 뒤, 몇 명의 막료와 함께 어등산 사동(寺洞)에 은신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헌병대의 급습을 받아,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기증 받은 백마를 타고 이리저리 내달으며 일병을 무찌르던 중, 적탄이 오른쪽 가슴에 연달아 두 발 명중되었다.

조경환은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을 깨닫고는 목에 걸린 망원경을 벗어 놓고 왼쪽 품안에 깊이 간직하였던 의진 명단을 꺼내 안간힘 다해 불사른 후 조용히 순국하였다.

 

하늘이 거듭 푸르고 달빛 다시 밝으니 (天月重蒼 천월중창)

못된 귀신 되어서라도 왜적을 섬멸하리 (癘鬼殲賊 여귀섬적)

섬나라 왜놈들을 멸망시키지 못하면 (不滅島夷 불멸도이)

내 죽어 혼백이라도 돌아오지 않으리. (惟魂不復 유혼불복)

 

조경환 의병장이 순국하면서 남긴 시이다.

 

鹿川 高光洵(녹천고광순) 의병장(義兵長) 輓章(만장)

- 曺京煥(조경환) 지음. 조경환의 : 棲巖(서암). : 大川(대천). 一名: 準煥(준환). 韓末(한말) 義兵長(의병장)

 

조선 고종 13(1876~1909) 대한제국 순종 3

등불 앞에 잠 못 들고 나 홀로 슬퍼하네

白首丹心建義旗(백수단심건의기) 흰머리 붉은 마음으로 의병깃발 세웠건만

眐風吹落槿花時(정풍취락근화시) 홀연히 부는 바람에 무궁화 떨어질 제.

光山有約人何去(광산유약인하거) 광산 모임 약속 두고 그대는 어딜 갔소

不寐燈前獨自悲(불매등전독자비) 등불 앞에 잠 못 들고 나 홀로 슬퍼하네.

 

 

서풍 등지고 만장 쓸 즈음에 눈물만 가득하네

千秩許遠復吾東(천질허원부오동) 천 년 전 허원 장군이 이 땅에 다시 태어나

義鼓聲高燕谷中(의고성고연곡중) 의로운 북소리 연곡 골짜기에 높았건만

國運否耶能未捷(국운비야능미첩) 국운이 비색(否塞)하여 능히 이기지 못하니

西風題輓淚盈瞳(서풍제만누영동) 서풍 등지고 만장 쓸 즈음에 눈물만 가득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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