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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가는 길에 만난 금강경 - 그 아름다운 조우
- 동천(東泉) 엄기철(嚴基喆) 세 번째 전시회 -
1. 붓 끝에 피어난 금강경 연화장세계
금강경(金剛經)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의 준말로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이라고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 ‘반야(般若)’란 모든 법의 진실을 아는 지혜(知慧)를 뜻하고 ‘바라밀(波羅蜜)’은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는 차안(此岸)에서 열반(涅槃)의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보살의 수행을 의미한다. 따라서 금강반야바라밀경은 ‘금강석과 같은 견고한 지혜를 찾아 수행해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한 불경’이라 풀이할 수 있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작가 ‘엄기철(嚴基喆)’ 선생의 함자 세 글자에는 ‘금강(金剛)처럼 단단하고 빛나는 지덕(智德)’의 의미가 들어있고, ‘동천(東泉)’이란 아호에는 ‘반야(般若)의 샘물’ 이미지가 배어 있다. 따라서 그의 작업 과정은 생래적으로 금강경의 수행 과정을 밟지 않을 수 없는 인연법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2013년 2월의 첫 전시회가 내용과 규모 및 작업량과 다양성 측면에서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한 스펙터클(spectacle)한 전시였다면, 6년여의 거리를 둔 세 번째 전시는 금강경을 집중적으로 파고든 몰입(沒入)의 경계를 보여주는 전시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금강경 전문을 쓴 작품만도 23점이나 된다. 그중에서 19m에 이르는 ‘한글로 풀어쓴 금강반야바라밀경’, 11m나 되는 12폭 병풍의 ‘추사체 금강경’과 같은 작품은 매크로 캘리그라피(macro-calligraphy)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작은 종이 위에 금강경 5,300여 자를 빼곡히 써넣은 작품 ‘극세필(極細筆) 금강경’은 마이크로 캘리그라피(micro-calligraphy)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이 외 20점의 금강경 작품도 서로 다른 빛과 목소리로 금강경을 독송하고 있으니 가히 필묵으로 열린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에 빠져든 느낌을 받는다.
금강경 외에도 게송(偈頌), 경구(經句) 등의 작품이 80여 점이나 된다. 모두 100점이 넘는 작품이 다양한 옷을 입고 색다른 묵향으로 다가온다.
2. 추사(秋史)의 예혼(藝魂)을 따르다
동천 선생의 연구실 이름은 추예랑(秋藝廊)이다. 한눈에 추사(秋史)의 예술(藝術)을 흠모하고 따르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추예랑(秋藝廊)에 랑(廊)자를 붙임은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열린 공간이란 의미로 보인다.
안타깝게도 추사체(秋史體)는 인구(人口)에 회자(膾炙)하는 만큼 실제로 추사 교본을 곁에 두고 임서(臨書)하는 서예가는 별로 없다. 추사 선생의 고명(高名)을 의기양양하게 말하지만 정작 추사 학문을 연구하고 실사구시 정신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작가는 많지 않다. 이는 통일신라의 김생(金生)과 최치원(崔致遠), 고려의 張端說(장단열)과 이암(李嵒), 조선의 이용(李瑢)과 한호(韓濩), 그리고 이광사(李匡師) 등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우리 선조의 예술을 선양(宣揚)하지 않으면 그 누가 따르겠는가 하고 생각하면 자괴감마저 든다.
그러나 동천 선생은 세상의 흐름과 타인의 외면에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추사 존사(尊師)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며 추사체를 본받아 쓰고 또 연구하며 추사 필맥(筆脈)을 이어가고 있다.
선생은 스스로 무명작가, 재야작가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알고 보면 이미 추사선생추모 전국휘호대회에서 장원(壯元), 초대작가로서 운영위원과 심사위원을 거쳐, 현재 (사)한국추사체연구회 부회장(副會長)으로 재임 중에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충북 충주 출신으로, 한학을 하신 부친의 엄한 가르침 아래 초등학교 때부터 붓글씨로 여러 상을 받았으며, 군에서도 행정병으로 붓을 놓을 겨를 없이 지냈다는 사실이다. 제대 후 대기업에서의 직장생활 동안은 다소 서예와 뜸하기도 했지만, 지방 파견근무 중에 고(故) 연파(蓮坡) 최정수(崔正秀) 선생을 만난 것이 작가에게는 추사체의 비밀을 발견하고 서예에 몰두하게 되는 새로운 전기(轉機)가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은퇴 이후의 보람된 삶과 자녀교육을 위한 좋은 부모 모습 등을 생각하며, 다들 부러워하는 직장생활마저 마침내 그만두게 된다.
작가를 생각하면 <GRIT>이란 책이 떠오른다. 이 책에서 ‘열정(passion)은 강도가 아니라 지속성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존경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동천 선생의 예도(藝道)에서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는 언제나 추사 김정희였다. 그의 버킷리스트(bucket list) 첫째는 ‘추예(秋藝)의 길을 닦고 넓힌 뒤,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개척해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3. 나를 찾아가는 길에 서다
동천 선생은 서예가 일상이고 일상이 서예이다. 작가와 동행하다가 보면 인간적인 면에서 늘 공감하게 되는 부분이 바로 그의 진정성(眞情性)과 일에 대한 몰입(沒入) 부분이다. 그리고 작가는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체화(體化)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선한 일을 하면 선한 사람이 된다.’라는 말이 있다. 동천 선생은 2013년 서울미술관 기획초대전 이후 길상사 초대로 ‘법정 스님의 향기로운 글 서화전’을 열고나서 줄곧 재능 기부는 물론 작품 기증과 같은 선한 일을 해오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2010년 열반하신 법정 스님의 깊은 철학을 더 깊이 깨닫게 되고, 나아가 ‘나를 찾아가는 길’에 몰입하게 된다. 그 길이 외롭지 않은 것은 언제나 붓과 금강경이 그를 지켜주었고, 6년간의 붓을 통한 마음 수행의 결과가 오늘의 전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작가는 붓 연주만 하는 게 아니라 가끔 기타 연주도 하며 5060 세대의 중심에 서서 당대의 노래는 물론 다양한 음악을 라이브로 즐긴다. 추예랑에 들어서자 놀랍게도 전면에는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거기에는 기타와 반주기는 물론 음향기기까지 갖춰진 훌륭한 음악실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곳은 서예 교육은 물론 음악 교실과 세미나 등도 열리는 공간이었다. 나오는 길에 들려준 그의 즉석 반주와 노래가 아직도 쟁쟁하다. 서예와 음악은 너무나 닮은 점이 많게 느껴진다. 점획(點劃)의 흐름은 멜로디요, 전절(轉折)은 리듬이며, 장법(章法)은 하모니에 비유할 수 있겠다. 작가의 좌금우서(左琴右書)의 생활은 맺힌 것은 풀고 막힌 것은 뚫어가는 창조적인 삶 그 자체였다.
4. 접속보다 접촉으로 살다
서예가로서의 동천 선생은 접속보다 접촉의 가치를 알고 있다. 열 번의 문자보다 한 번 만남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 백 장의 칼라복사보다 한 장의 먹 자국을 소중히 여긴다. 그리하여 SNS 시대에도 붓을 꼭 잡고 전통예술이자 슬로 아트(slow art)인 서예를 지금까지 묵묵히 지켜왔으며 앞으로도 반드시 지키리라 믿는다.
현실은 터치시대(touch age)이다. 필기시대(writing age)는 가고 터치시대가 왔다. 우리는 매일 터치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버스를 타고 내릴 때나 전철 출입구를 드나들 때는 물론, 회사와 아파트 출입 때도 터치를 해야 한다. 스마트폰의 키패드도 터치하며 의견을 주고받는다.
집에 도착하는 편지 중, 손으로 쓴 편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사인조차도 없다. 만약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 볼펜이 있었다면 ‘과연 그들도 붓을 잡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먹도 갈기 귀찮아서 먹물로 쓰는 마당에 어떻게 붓글씨 예찬론을 펼 수 있을지 망설여진다. 하지만 작가는 거침없이 서예를 찬양하고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의 중요성을 고집한다.
그렇다. 터치가 편리하고 쉽지만, 오가는 정과 생각하는 힘을 사라지게 만든다. 생각해 보면 터치로 받은 문자와 육필로 쓴 글을 받았을 때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우리는 초연결사회(hyper-connected society)가 되었다고 마냥 좋아할 게 아니다. 초연결사회에서는 터치에 의한 접속(access)만 남고, 스킨십에 의한 접촉(contact)은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붓글씨는 터치가 아니라 접촉이다. 서예 인구가 점차 줄어들고 있음은 서예는 접속이 아니라 접촉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부모님, 특히 어머니와의 많은 접촉으로 성장해 왔다. 그러나 이것을 터치라고 하지는 않는다. 인간성 회복을 위해서는 동천 선생처럼 접촉의 예술인 서예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5. 수행과 구도의 붓길
동천 선생님의 작품에서 느끼는 첫인상은 준비성과 치열함이다. 한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평소에 選文(선문)한 내용을 두고두고 음미하며, 수학적 章法(장법)으로 포치(布置)한다. 그리고 종이를 선택할 때도 紙性(지성)과 墨性(묵성)이 잘 어울리는지 실험해 보고 구한다. 더 놀라운 점은 금강경을 쓸 때, 붓에 영혼인 筆魂(필혼)을 믿고 한 번 사용한 붓은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동천 선생은 때로는 붓을 스스로 만들어 사용하고, 종이 위의 괘선마저도 한 치의 오차 없이 일일이 붓으로 그어 처리하며, 기다란 經文(경문)도 생명이 있는 것으로 보고 한번 붓을 잡으면 식음을 거르면서 끝까지 써 내려간다. 이토록 치열한 그의 작업실을 보면 때로는 실험실, 때로는 명상실, 때로는 예술 공장(art factory)을 방불케 한다. 그의 이러한 일련의 창작과정을 보면 자의식의 과잉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개성이다. 작품 준비 과정부터 완성 이후까지도 작가의 개성이 숨어 있는 것이다. 작품 완성 뒤에는, 자신을 떠난 작품으로서 작품만의 독립적 지위를 인정하기 때문에, 선생은 언제나 행복한 작가가 될 수 있었다.
그의 붓길은 공(空)과 무아(無我)를 깨달아 가는 수행의 길이다. 그의 연서(練書)는 부드러운 필검(筆劍)으로 금강(金剛)처럼 견실한 획을 빚어내며 부처님의 변함없는 지혜를 캐나가는 구도의 과정이다. 그는 오늘도 서예라는 예주(藝舟)에 금강경을 가득 싣고, 필봉(筆鋒)으로 노 저으며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을 향해 묵묵히 항해하고 있다.
6. 불변하는 것은 없다
비평문을 부탁받고 그래도 잊혀 지지 않는 한 시대의 유명 작가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원의 뜻을 적고자 한다. 원시적 안목이란 바로 곁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잘 보이는 법이다. 동천 선생의 앞날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성인의 교양이라 할 수 있는 文史哲(문사철)을 잣대로 감히 소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첫째, 문학적 측면에서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경험과 사고가 담긴 ‘나의 글’을 쓰길 바란다. 정녕 작가로서 자리매김을 하고 이름을 남기고 싶다면, 경전이나 경구도 좋지만 작가 자신의 삶과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나만의 생각, 나의 목소리’를 글로 썼으면 한다.
둘째, 역사적 측면에서 보면. 백 년 뒤의 후손들이 오늘의 동천 선생과 그의 작품을 어떻게 볼까 하는 데에서 앞으로의 작품 제작 방향을 설정했으면 한다. 평생 왕희지를 따라 써 본들 여전히 1등은 왕희지이고 추종자는 잘해야 2등이다.
셋째, 철학적 측면에서 보면, 이미 작가는 예술과 삶이 하나가 되어 행복한 작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오직 작가로서 추구할 것은 ‘변화’와 ‘창조’이다. 영원히 불변하는 진리 중의 하나는 ‘불변하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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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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