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서예> 2024년 7월호 논단
경험에서 기록까지
권상호
우리는 경험(經驗)에서 지식이나 기능을 얻고, 다양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앨버트 슈바이처는 "경험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가장 확실한 선물이다."라고 했다. 누구나 경험한 일을 그때그때 메모했다가 일기나 회고록으로 남긴다면 몇 권의 책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추억(追憶)은 경험한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이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음에도 인간은 습관적으로 돌이켜 생각해 보고 현재의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추억과 비슷한 말이 회상(回想), 회고(回顧), 회억(回憶), 추념(追念), 추상(追想) 등과 많다는 사실은 그만큼 추억이 중요하거나 피할 수 없는 인간 사고의 일부분인가 보다.
경험한 것 중에서도 특별히 오랫동안 추억으로 남아 잊히지 않은 것을 기억(記憶)이라 한다. 추억이 우리가 쌓아온 경험의 보물창고라면 기억(記憶)은 그 보물창고에 드나들 수 있는 열쇠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보물창고 문을 닫아놓은 채, 열쇠를 잃어버리고 마는 수가 자주 있다. 기억은 이전의 경험을 뇌 속에 간직했다가 필요할 때, 도로 생각해 낼 수 있는 장치이다. 기억이 저절로 떠오르는 수동적인 정신작용이라면, 외워서 잊지 않는 암기(暗記)는 능동적인 정신작용이다.
학습자의 이해를 등한히 하고 기억과 암기를 위주로 하는 수업 방법을 주입식(注入式) 교육이라 하여 배척해 왔는데, 최근에는 주입식 교육을 통한 암기가 창의력의 바탕이 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암기는 머릿속에 씨앗을 심는 일이다. 그 씨앗이 싹 틔우고 자라나 꽃을 피우면, 그동안의 노력과 정성이 열매 맺음은 물론 새로운 창조의 세계를 열어나가게 된다.
이러한 암기도 죽는 순간 함께 끝난다. 그 대안이 바로 기록(記錄)이다. 둔필승총(鈍筆勝聰)이라 했다. 둔한 붓이 총명함, 곧 암기 잘함보다 낫다는 뜻이다.
‘기록하다’나 ‘외우다’라는 뜻을 가진 記(기록할 기)자는 ‘言(말씀 언)’자와 ‘己(자기 기)자’가 결합한 모습으로 ‘말(言)을 나(己)의 머릿속에 보관하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글자이다. 또 己자는 긴 줄의 모습으로 경험한 것을 자신의 머릿속에 오래오래 저장한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錄(기록할 록)자는 ‘金(쇠 금)’자와 ‘彔(새길 록)’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彔자는 ‘나무를 깎다’의 뜻으로 <설문해자>에서 ‘刻木녹녹?也(나무에 뚜렷하게 새기다)’로 풀이하고 있다. 필자는 나무판이나 종이(一) 위에 태극 형상의 ‘ㄴ’과 ‘ㄱ’을 새기고, 여기에 물감(水)을 입힌 모습으로 본다. 따라서 나중에 생긴 錄자는 ‘칼로 새긴다’는 뜻을 강조한 글자로 볼 수 있다.
기록은 우리의 삶을 빛나게 하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가득한 신세계이다. 기록에 의한 문자의 숲속에는 문사철(文史哲)의 샘물과 시서화(詩書畵)의 향기가 넘쳐흐른다. 기록은 우리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행동의 나침반이 된다.
성공은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함에서 나온다. 기록된 경험이라야 언제든지 필요할 때 찾아서 활용할 수 있다. 따라서 기록은 순간을 영원으로 이어주는 충실한 역할을 한다. 다양한 필기도구나 키보드 또는 사진으로도 기록할 수도 있지만, 붓으로 순지 위에 쓴 붓글씨야말로 서예란 예술의 옷을 입고 흑(黑) 다이아몬드로 영원히 남는다. 여기에 서예의 위대함이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