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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동서화합의 견인차 정의화 의원님 인터뷰 - 포은 정몽주 선생의 대책문에 대하여

* 국보문학 임수홍 발행인과 함께 국회의원 회관 312호 정의화 의원실에 들렀다. 
* 첨부화일에는 대책문 원문의 사진이 나온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대책문을 읽고서

임수홍(발행인)

고려 말기의 충신 포은 정몽주(1337~1392)가 과거시험 때 제출한 답안지가 처음으로 일본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포은공파 20대손인 한나라당 4선 정의화 의원을 권상호 수원대 교수(서예)와 함께 의원회관 312호로 찾아가 간단한 인터뷰를 하였다.

부산 중동구가 지역구인 정의원은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유치특별위원회 위원장’과 ‘2015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유치위원장’을 맡았으며, ‘전남 여수명예시민증’(2008년 1월), ‘광주시 명예시민증’(2008년 11월 7일)을 받았을 정도로 영호남 벽허물기를 앞장서서 실천하는 정치인이다.

특히 (사)남북의료협력재단 이사장(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공동의장(현), 우리민족서로돕기 공동대표(현)로 활동하면서 영호남 화합뿐만 아니라 남북 평화 통일의 기초를 다지고 있는 중요한 일들을 차분하게 해오고 있는 역량있는 정치인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임수홍: 안녕하세요. 바쁘신 중에서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먼저, 포은공파 후손으로서 ‘정몽주 대책문‘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의 심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정의화: 3월쯤 신문을 통해 처음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래서 원문을 완전히 번역하고자 노심초사하던 중, 권상호 교수를 알게 되었습니다. 길이 보전해야 할 조상의 귀중한 자료여서 특별히 권교수에게 병풍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임수홍: 포은공파 20대손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포은 선생의 영정을 언제 쯤 보았는지요?

정의화: 1962년 겨울방학 때로 기억이 됩니다. 그때는 교통이 너무 불편하여 ‘동대문 운동장 앞’에서 하루에 한 번 있는 버스를 타고 능골에 들어가면 자고 나와야 했습니다.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골에 있는 묘소를 아버지가 데리고 갔는데, 처음 포은 할아버지의 영정을 보았을 때 나와 많이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특히 턱이 둥근 모습이 저와 똑같았지요. 다 둘려보고 아래쪽에 있는 종갓집에 가서 부산의 일가가 왔다고 말하고 하룻밤 자고 온 기억이 있습니다. 밤에는 종갓집에서 고구마 말린 것과 강냉이를 주어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버지는 상당히 추운 날씨인데도 춥다고 하지 않은 나에게 격려성 칭찬을 했던 생각이 납니다. 그 정도로 포은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나의 성장 과정에 있어 소중한 계기가 되었고, 이후 포은 할아버지는 나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임수홍: 포은 선생의 대책문을 읽고 느낀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정의화: 포은 할아버지는 대학자, 정치가, 외교관, 군사전문가, 지략가 등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분입니다. 대책문의 내용을 보니, ‘홍건적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강태공이나 제갈량처럼 당시 문무 겸용한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며, 주나라 이전에는 문과 무가 일치하였고, 문무를 함께 쓰는 것이 모든 왕이 따라야 할 대법(大法)이었는데, 수(隋) 당(唐) 등을 거치면서 이런 전통이 무너졌지만 이제는 이 같은 전통을 복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것이 바로 ‘나라바로세우기’ 운동이며, ‘仁(인)의 정치’를 구현하려는 공동체 정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임수홍: 평소 정치인, 의사, 또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 국민들에게 바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정의화: 얼마 전에 숭례문 현판 복원 행사를 지켜봤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예(禮)를 멀리하는 국민들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저는 새로운 현판이 중요한 게 아니고, 숭례(崇禮)라는 말이 가르쳐 주듯이 예(禮)를 숭상(崇尙)하는 국민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대책문에도 인의예지(仁義禮智)와 형정공수(刑政攻守)란 말이 나오는데 저는 우리 민족이 그 중에서도 예(禮)를 가장 소중히 생각했다고 생각합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열렸던 자리가 바로 경북궁의 흥례문(興禮門) 앞뜰이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 앞에 ‘예(禮)를 일으킨다’는 뜻의 흥례문이란 문 이름만 봐도 얼마나 ‘예(禮)’를 숭상한 민족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임수홍: 포은 정몽주 선생의 대책문 중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 한 구절을 소개 주십시오.

정의화: 다음의 내용은 놀랍게도 오늘의 우리 현실에도 꼭 맞는 말이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본받아야 할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문무(文武)를 함께 쓰는 것은 모든 왕이 따라야 할 대법(大法)이고 만세(萬世)의 불변하는 원칙이다. 문(文)은 융성한 것을 유지하고 완성된 것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것이고, 무(武)는 어지러움을 바로 잡아 바름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는 문(文)의 도구이고, 형정공수(刑政攻守)는 무(武)의 술(術)이다. 잘 다스려질 때에는 문(文)의 덕(德)으로 양(陽)에 베풀고 무(武)의 술(術)은 음(陰)에 감추어 둔다. 어지러워지는 때에 이르러서는 무(武)의 술(術)을 양(陽)에 베풀고 문(文)의 덕(德)은 음(陰)에 시행한다. 문(文)만을 사용하고 무(武)를 쓰지 않으면 예기치 않은 사태 당하였을 때 구해낼 수 없고, 무(武)만을 사용하고 문(文)을 쓰지 않으면 인심(人心)이 어긋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문(文)과 무(武)를 함께 써 하나로 한 연후에 천하의 다스림을 이룰 수 있다.

(夫文武並用者, 百王之大法, 萬世之常經. 文者, 可以持盈守成, 武者, 可以撥亂反正. 仁義禮智, 文之具也. 刑政攻守, 武之術也. 方其治也, 以文之德, 施之於陽, 以武之術, 藏之於陰. 及其亂也, 以武之術, 施之於陽, 以文之德, 行之於陰. 文而不武, 則不虞之變不可救. 武而不文, 則人心之逆不可槪. 是以文武並用而爲一, 然後可以致天下之治也.)

시의적절(時宜適切)한 문(文)과 무(武)의 조화, 그야말로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 원리가 아니겠습니까.

임수홍: 의원님 바쁜 일정에도 시간을 내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의원님께서 몸소 실천하고 있는 ‘영호남 화합’과 ‘남북통일 기반 조성’을 위한 활동 등이 국민들 가슴속에 잔잔하게 퍼져나가길 기원합니다.

정의화: 국보문학의 무궁한 발전을 빕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대책문(對策文)

問,

天下之生久矣, 一治一亂者, 無常. 自唐虞三代以降, 迄于宋遼, 歷代之迹, 布在方策, 班班可見. 夫治之所以治者, 何道? 亂之所以生者, 何事? 將時數之使然歟? 刑政之致然歟? 抑一代一世之所以爲統體者, 孰善而孰不善乎? 皇元有興, 混一區宇, 曾未百年, 一旦賊起, 至今爲梗, 其故何哉? 我國家自聖祖耕業以來, 人老止戈者, 垂五百年矣. 比及賊之渡江, 人人懷敵愾之心, 擊破達妬之降, 使西北之民, 復帖席而眠, 玆非吾君德之所致乎? 豈以是雄示天下乎? 惟小心翼翼, 誕敷文德, 必思乎至治耳. 其軼古之世, 何代歟? 且安不忘危, 治不忘亂, 爲國者, 所當審也. 爲不得而用武, 則太公望·司馬穰苴·孫賓·吳起·孔明·李靖之輩, 各有兵書焉. 何書爲之要書? 言其術, 何術合於義? 知書之要, 擇術之義, 攻守不足算矣. 諸生博問, 其於天下國家治亂統體․尙文用武之道, 究之熟而講之明矣. 若言苟而泛, 義淺而迂. 豈拘於文? 不取, 必矣.”

對,

三代以上, 文與武爲一. 三代而下, 文與武爲二. 文與武爲一, 則可以致天下之治. 文與武爲二, 則不可以致天下之治. 執事先生發策秋圍, 策之以古今治亂之迹, 繼之以太公諸子之書, 乃曰, ‘知書之要, 擇術之義, 攻守不足算矣.’ 大哉問也! 其憂國愛民之心乎! 其出將入相之機乎! 愚雖不敏, 敢不悉心以對乎?

夫文武並用者, 百王之大法, 萬世之常經. 文者, 可以持盈守成, 武者, 可以撥亂反正. 仁義禮智, 文之具也. 刑政攻守, 武之術也. 方其治也, 以文之德, 施之於陽, 以武之術, 藏之於陰. 及其亂也, 以武之術, 施之於陽, 以文之德, 行之於陰. 文而不武, 則不虞之變不可救. 武而不文, 則人心之逆不可槪. 是以文武並用而爲一, 然後可以致天下之治也. 愚請卽執事之問而明之.

夫唐虞三代之治, 仁以爲源, 禮以爲体, 遂使天下之人, 淪於肌膚, 浹於骨髓,……農桑之隙, 無不以修文講武,……文武並用, 而圖治之統體者, 可知矣. 其治之興, 不在於玆乎? 秦漢而降, 三國鼎峙, 五朝有擾, 曰隋曰唐, 以及於宋, 文武之道, 互有得失. 統體之觀, 固可監也. 漢高之寬仁, 可爲百世之統體. 然於文治, 則固未純也. 太宗之仁義, 亦可以爲百世之統體, 然顧其德, 則實有慚矣. 不能以文武爲治之統體者, 亦可知矣. 其亂之所由生者, 亦不在於玆乎? 然則統體之善者, 其惟三代文武之道乎? 或者全以治亂之由, 歸之氣數, 蓋亦不知之甚也. 洪惟皇元, 積仁積義, 崇文崇武, 混一之盛, 曠古所無, 將謂太平之治, 蓋萬世而無憂, 奈何曾未百年, 河南之賊, 起自孽芽, 一旦之禍, 幾至十年? 蓋自世祖皇帝, 武定禍亂, 列聖相承, 文致太平, 而比年以來, 上下晏然. 文治缺而不知其缺, 武備疏而不覺其疏. 一有卒然之患, 不知可救也. 悲夫!"

惟我太祖統三之初, 立法制事, 並用文武, 五百年間, 爲治之盛, 可謂軼唐虞而追三代矣. 惟我主上殿下, 因已成之業, 守禮義之法, 不謂大器之已成而思其所以危, 不謂吾民之已治而思其所以亂. 崇學識以興文敎, 設府兵以講武事, 警戒之志, 惟日不足. 比歲之賊, 以烏合之衆, 乘勝遠鬪, 所至之域, 望風奔潰. 而遂渡於鴨祿之江. 於是命將出師, 以堂堂之鎭, 磊磊之兵, 一出而一勝, 再出而再勝. 雷厲風飛, 掃蕩西北, 會朝有淸明之慶矣. 然猶不敢好大喜功、雄視天下, 使其將帥, 謹守封疆, 與一二大臣, 圖議政事, 擧賢求彦, 設科取士, 文武之效, 見於今日. 執事猶以兵術爲問, 其赤心報國之心, 隱然自見於言外矣.

夫太公望始遇於熊羆之獵, 卒爲帝王之師. 鷹揚牧野之戰, 歸馬華山之陽, 文武之德, 可謂備矣. 司馬穰苴擢自微賤, 遂爲大將, 所令之人無不從, 所遇之賊無不服, 文武之德, 亦不可謂之不備矣. 諸葛孔明, 則南陽之間, 三聘而起, 蜀漢之際, 八陣爲圖. 生生之志, 慨然有臣佐之風, 非謂文武……乎? 孫賓吳起李靖之徒, 其才智則可謂名將矣, 其文德則固有嫌矣. 夫觀其行之義, 則可知其術之善, 知其術之善, 則可以見其書之要矣. 太公之相武王、穰苴之誅莊賈、孔明之興漢室, 眞得天下之大義. 至於孫賓之應變、吳起之善戰、李靖之智謀, 爲今之將, 亦不可不知也. 然讀其書而通其變, 通其變而任其事, 只在得人而已. 爲今之計者, 誠得文武兼備之人, 廓揚文武兼用之道, 敎民以孝悌忠信之德, 習民以坐作進退之法, 而使將知其道, 兵知其律, 則可以無敵於天下矣. 愚何幸執筆草檄, 以補國家之萬一. 執事轉而上聞, 幸甚.

<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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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下가 생긴 지가 오래되었다만 한번 다스려지고 한번 혼란해지는 것이 일정하지 않다. 唐虞와 三代이래 宋遼에 이르기까지 歷代의 자취가 書冊에 기록되어 있으니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대저 잘 다스려지는 시대에 있어 다스려지게 되는 이유는 무슨 도 때문이겠는가? 혼란한 시대에 있어 혼란이 생기게 되는 이유는 무슨 일 때문이겠는가? 時代의 運數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겠는가? 刑政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겠는가? 또한 一代一世가 統體를 갖추는 것에 있어 어느 것이 선하고 어느 것이 선하지 않겠는가? 위대한 元이 흥기하여 천하를 통일한지 백년이 채 안되었는데, 하루아침에 홍건적이 일어나 지금까지 장애가 되고 있으니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우리나라는 聖祖가 나라를 창업한 이래 전쟁이 그친지 500년이 되었다. 근래 賊(홍건적)이 강을 건너오자 모든 사람들이 적개심을 품고 達妬을 격퇴시켜 西北民들로 하여금 다시 자리를 깔고 잠들도록 하였으니 이는 우리 임금의 덕의 소치가 아니겠는가? 어찌 이것으로써 천하에 위용을 보이려는 것이겠는가? 오직 조심하고 삼가며 文德을 펼치고 반드시 至治를 이룰 것을 생각할 따름이다. 따르고자 한 시대는 어느 시대인가? 또 편안할 때는 위급할 때를 잊지 않고 다스려질 때는 혼란할 때를 잊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를 도모하려는 사람이라면 깊이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피할 수 없어 武威를 본받고자 하면, 太公望·司馬穰苴·孫賓·吳起·孔明·李靖 등에게 각각 兵書가 있으니 어떤 책이 그것을 위한 핵심적인 병서인가? 술수를 말하자면 어떤 술수가 義에 합치되는가? 병서의 요체를 알고 술수의 義를 선택할 수 있다면 공격하고 방어하는 전쟁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 제생들은 널리 공부하였으니 천하 국가의 治亂과 統體, 文을 숭상하고 武를 쓰는 것 등의 도리에 관해 익히 탐구하고 밝게 강구하였을 것이다. 말이 구차하고 범연하면, 의리가 천박하고 우활하다. 어찌 문장에 구애될 것인가? 뽑히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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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代이전에는 文과 武가 하나였으나 三代 이후에는 文과 武가 둘로 나뉘었다. 文과 武가 하나가 되면 天下를 다스릴 수 있고, 文과 武가 둘로 나뉘면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 執事 先生이 과장에서 책문을 발표하면서 古今 治亂의 자취를 묻고, 이어 太公 등 諸子의 책을 거론하면서 ‘병서의 요체를 알고 술수의 義를 선택할 수 있다면 공격하고 방어하는 전쟁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고 하셨다. 크도다 질문이여! 憂國愛民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요, 나가서는 장수의 일을 행하고 들어와서는 재상의 일을 행하는 근본이로다. 내가 비록 불민하지만 감히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文武를 함께 쓰는 것은 모든 왕이 따라야 할 大法이고 萬世의 불변하는 원칙이다. 文은 융성한 것을 유지하고 완성된 것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것이고, 武는 어지러움을 바로 잡아 바름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仁義禮智는 文의 도구이고, 刑政攻守는 武의 術이다. 잘 다스려질 때에는 文의 德으로 陽에 베풀고 武의 術은 陰에 감추어 둔다. 어지러워지는 때에 이르러서는 武의 術을 陽에 베풀고 文의 德은 陰에 시행한다. 文만을 사용하고 武를 쓰지 않으면 예기치 않은 사태 당하였을 때 구해낼 수 없고, 武만을 사용하고 文을 쓰지 않으면 人心이 어긋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러므로 文과 武를 함께 써 하나로 한 연후에 천하의 다스림을 이룰 수 있다. 내가 執事의 물음을 받고 그 점을 분명히 밝히자 한다.

唐虞 三代의 정치는 仁으로서 근본을 삼고 禮로서 중심을 삼아 드디어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몸에 젖어들고 뼈 속 스며들게 했고, …… 농사짓는 틈틈이 문무를 익히지 않음이 없었으니 …… 文武를 병용하면서 統體를 도모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스림이 흥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秦漢이래 삼국이 鼎立하여 대치하고 五朝에 소요가 있었으며, 隋와 唐을 거쳐 宋에 이르기까지 文武의 道는 서로 得失이 있었으니, 統體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정말로 거울로 삼을 만하다. 漢 高祖의 관대하고 어짐은 百世의 統體로 삼을 만하지만, 文治의 측면에서는 진실로 아직 순수하지 못했다. 太宗의 仁義 역시 百世의 統體로 삼을 만하였지만 그 덕을 돌아보면 실로 부끄러운 점이 있었다. 문과 무로 다스림의 統體로 삼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혼란함이 발생한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統體가 훌륭하였던 것은 오직 三代와 文武의 道일 것이다! 혹자는 치란의 이유를 온전히 氣數로 돌리는데 이 또한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이다. 위대한 원나라가 인과 의를 쌓고 文과 武를 숭상하여 통일을 이룬 盛業은 옛날에도 없던 일이라 장차 太平의 至治가 만세토록 이어져 근심이 없으리라고 할 만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백년도 채 안되어, 河南의 홍건적이 소소한 것으로부터 일어나 잠시의 화난이 십년가까이 계속되었던가? 대개 世祖皇帝가 武를 통해 禍亂을 진정시키고 그 이후의 황제들이 서로 이어 文으로 太平을 이루었다. 근년 이래로 상하가 안일해져 文治가 무너졌어도 무너진 줄을 모르고 武備가 소홀했어도 소홀한 줄을 깨닫지 못하니 갑작스런 우환이 생기면 구원할 방도가 있을지 모르겠다. 슬프도다!

우리 太祖가 후삼국을 통일한 초기에 법제를 수립하고 정사를 정비함에 文과 武를 함께 사용하여 이후 오백년간 성대한 치세를 이루었으니 唐虞를 지나 삼대를 뒤따랐다고 할 만하다. 오직 우리 主上殿下께서는 이미 이루어놓은 업적을 기반으로 禮義之法을 지킴에, 大器가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고 위태로워지는 이유를 생각하며, 우리 백성들이 이미 다스려졌다고 하지 않고 혼란이 야기되는 이유를 생각하셨다. 그러므로 學校를 숭상하여 文敎를 진흥시키고 府兵을 설치하여 武事를 강마시키면서, 경계하는 뜻이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셨다. 최근 도적들이 오합지졸로 승기 타고 멀리 공격해오니 이르는 곳마다 그 기세를 보고 무너져 마침내 압록강을 건너오기에 이르렀다. 이에 장수들에게 군사를 출동하도록 명하니 당당한 진영과 굳센 병사들로 한 번 나가면 한 번 승리하고 두 번 나가면 두 번 승리하였고, 우레처럼 날쌔게 몰아쳐 서북지역을 소탕하자, 조정에 청명한 경사가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큰 것을 좋아하고 공을 기뻐하며 천하에 위용을 과시하는 따위를 하지 않고 장수들로 하여금 국경을 삼가 지키게 하였고, 대신들과 정사를 의논하는 한편, 현자를 천거시키고 선비를 구하여 과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니 문무를 병용한 효과가 오늘날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도 執事는 오히려 병술을 가지고 질문을 하시니 나라에 보답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 은연중에 저절로 나타나는 바이다.

저 太公望은 곰을 사냥하는 사냥터에서 처음 무왕을 만나 帝王의 君師가 되었고, 牧野의 전쟁에서 용맹을 떨쳐 말들을 華山 남쪽으로 돌려보냈으니 文과 武의 德이 갖추어졌다고 할 만하다. 司馬穰苴는 미천한 출신에서 발탁되어 마침내 대장이 되어 명령을 하면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만나는 적마다 복종하지 않으니 문과 무의 덕이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제갈공명은 南陽에서 세 번 부름을 받고 일어나, 蜀漢이 분립하는 때에 八陣으로 진영을 이루어 만물을 살리려는 뜻에서 신하로서 보좌하고자 하는 풍도를 분연히 가졌으니 문무의……을 이름이 아니겠는가? 孫臏, 吳起, 李靖 등의 무리는 그 재주와 지혜로 보면 名將이라고 일컬을 만하지만, 그 文德으로 보면 그렇지 못하다는 혐의가 본래부터 있었다. 그 행동이 의리에 부합함을 보면 그로써 술수가 선함을 아니, 그 술수의 선함을 안다면 그 책의 요체를 알 수 있다. 태공이 무왕을 돕고 穰苴가 莊賈를 주살하며 공명이 한의 왕실을 흥기시킨 것은 참으로 천하의 大義를 얻은 것이다. 孫臏이 변화에 대응한 것과 吳起가 전투를 잘 한 것 그리고 李靖이 지혜로운 계책을 낸 것 등은 지금의 장수된 자들이 역시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을 읽어 변화에 통달하며, 그 변화에 통달하여 그 일을 맡기게 되는 것은 오직 사람을 얻는데 달려 있으니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진실로 문무를 겸비한 사람을 얻어 문무를 겸용하는 도리를 널리 드날리며, 효제충신의 도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앉고 일어나며 나가고 물러나는 방법으로 백성들에게 익히게 하는 한편 장수가 그 도를 알고 병사들이 군율을 알게 하면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게 될 것이다. 붓을 잡고 글을 써 만에 하나 국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 같은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집사께서 임금께 전하여 말씀드려주시면 정말 다행이겠다.

(도현철교수의 <對策文을 통해본 鄭夢周의 國防 對策과 文武兼用論>에서 발췌)

<주> 정몽주

본관 영일(迎日).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초명 몽란(夢蘭)·몽룡(夢龍). 시호 문충(文忠).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냈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의판서(禮儀判書)·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미 타락할대로 타락한 고려 왕조를 그만 포기하고, 자신(이방원)과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칡덩굴처럼 얽히어져 함께 조선왕조를 세우자.'라는 뜻입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회유하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방원이 하여가를 읊은 뒤. 포은 정몽주는 다음의 시조를 읊었습니다. 이 시조가 바로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입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자신의 몸이 백 번이라도 죽는 한이 있고 뼈가 사무치더라도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다'고 시조로 말하며 이방원의 회유를 거절합니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회유할 수 없음을 알고 돌아갑니다. 그 뒤 부하들에게 시켜 '선죽교'라는 다리에서 정몽주를 죽이게 됩니다. 그 때 정몽주가 흘린 피가 아직까지 핏자국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고려 충신 정몽주의 충성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려줍니다. 그리고 정몽주를 죽인 이유로  이방원은 아버지 태조로부터 배척을 당합니다. 결국 왕자의 난의 시초가 정몽주의 죽음이 아니었을까 할 정도로 많은 공을 세운 그는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로부터 미움을 사게 됩니다.  정몽주의 죽음은 결국 왕자의 난의 시초인 것이죠. 두 부자간에 금이 가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인 것이죠. 고려에 대한 충심이 죽어서 고려를 망국으로 만든 이들 간에 혈육상쟁의 원이 되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그의 충심은 하늘을 감동시키고 조선에 시련을 안겨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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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권상호
<問>
唐虞: 중국(中國)의 도당씨(陶唐氏)와 유우씨(有虞氏). 곧 요와 순의 시대(時代)를 함께 이르는 말로 중국(中國) 사상(思想)의 이상적(理想的) 태평(太平) 시대(時代)로 치는 시대(時代)임

三代: 중국(中國) 상대(上代)의 하(夏), 은(殷), 주(周)의 세 왕조(王朝)

宋遼: 고려는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하여 한반도의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이에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각축을 벌였던 宋遼는 각각 외교와 전쟁을 통해 고려와 관계를 형성해 나갔다.

刑政: 政刑과 같은 말로 정치와 형벌을 아울러 이르는 말.

紅巾賊의 난: 중국 중원(中原)에서 이민족 왕조인 원(元)의 지배를 타도하고 한(漢)민족 왕조인 명(明)나라 창건의 계기를 만든 종교적 농민반란. ~홍건적의 세력은 일시 화북(華北)·화중(華中) 일대에 미쳤으나, 내부분열로 인하여 통일정권을 이룩하지 못한 채 원군(元軍)에게 쫓기고, 또 만주로 진출하여 2차에 걸쳐 고려를 침략하였으나 격파당해 괴멸되었다. 이러한 가운데서 주원장만이 착실하게 지반을 닦아서 천하를 평정하는 데 성공하였다.

達妬(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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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
策問: <역사>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물어서 답하게 하던 과거(科擧) 과목. ≒책(策)·책시(策試).
장쭤[江左(강좌)] : 중국 양쯔강[揚子江] 하류의 남쪽 연안지대. 중국 고대(古代)에는 동쪽은 좌, 서쪽은 우라고 하였다. 장쭤는 양쯔강 하류의 남쪽 연안지대를 가리킨다. 동진(東晉) 및 남조(南朝)에 속하는 송(宋:420∼479), 제(齊:479∼502), 양(梁:502∼557), 진(陳:557∼589)의 근거지가 바로 장쭤에 있었다. 그 당시에는 오조(五朝) 통치 아래 있는 전체 지역을 장쭤라고 불렀다.

통치[統治]:  나라나 지역을 도맡아 다스림. ≒치리(治理)·통리(統理).

* 재갈: 말을 부리기 위하여 아가리에 가로 물리는 가느다란 막대. 보통 쇠로 만들었는데 굴레가 달려 있어 여기에 고삐를 맨다. ≒마함(馬銜)·방성구·함륵(銜勒).
* 멍에: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하여 마소의 목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 ≒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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