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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20세기 인천서예의 두 봉우리 - 검여와 동정

20세기 인천서예의 두 봉우리 - 劍如와 東庭

 

권상호(문학박사, 문예평론가)

1. 들어가며

국내 제3의 도시로 발돋움한 인천광역시는 인천공항이 있어 하늘길이 열려 있고, 인천항이 있어 바닷길이 열려 있다. 인천은 세계로 통하는 대한민국의 대문이자 대동맥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仁川’의 글꼴을 살펴보면 인천의 특성이 그대로 나타난다. ‘仁’ 자는 마치 ‘사람[亻]에게 하늘과 땅[二]’을 열어주는 모습이고, ‘川’ 자는 ‘활주로’ 또는 ‘뱃길’을 연상하게 한다. 

인천은 이미 아시아는 물론 지구촌 물류 허브도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이제 인천이 진정으로 살고 싶은 도시, 머물고 싶은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친환경도시 그리고 친문화도시로 가꾸어 가야 한다고 본다. 지정학적으로 인천은 한반도 핵심 요충지로 황해와 접해 있고, 한강의 하류에 위치해 있으므로 여기에 문화예술의 향기를 더한다면 시대를 선도하는 세계일류도시로 재탄생하리라 본다.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삶의 터전이었던 곳은 인천이다. 강화도 고인돌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인천은 가장 오랜 역사를 배경으로 지금은 바이오, IT 등의 최첨단 산업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만약 여기에 풍요로운 문화예술의 옷을 입힌다면 살기 좋은 허브도시, 특히 예술가들이 살고 싶은 창조도시로 재탄생할 것이다. 영국의 글래스고, 리버풀. 독일의 드레스덴, 프랑스의 파리, 이탈리아의 피렌체, 스페인의 마드리드, 일본의 도쿄, 미국과 중국의 문화도시 10곳 등

 

문화도시 인천을 만들기 위해서는 박물관, 도서관, 공연장, 전시장 등의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또한 문화 발전을 위한 시설만큼이나 그 속에 담길 콘텐츠도 중요하다. 여기서는 문화도시 인천을 꿈꾸며, 그 중에서 문자도시로서의 인천의 역사적 배경과 발전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 특히 인천이 낳은 20세기의 걸출한 두 서예가 劍如(검여) 柳熙綱(유희강)과 東庭(동정) 朴世霖(박세림)의 위상과 예술적 성과를 점검해 봄으로써 21세기를 선도하는 문화도시 인천의 위상을 제고하고자 한다.

 

2. 문자도시로서 인천의 역사적 배경

인천시민의 인식 속에는 인천은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문자를 바탕으로 한 문화가 가장 빛났던 고장으로 지금은 세계적인 활자도시, 문자도시, 서예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 문자와 관련한 인천의 연혁과 문자인프라 구축을 위한 노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詳定古今禮文(상정고금예문, 1234): 강화도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개성에서 수도를 천도한 곳으로, 재조대장경을 만들기 전인 고려 고종 21년(1234년)에 ‘상정고금예문’을 금속활자로 찍어낸 기록이 이규보가 엮은 <동국이상국집>에 남아 있다. 상정고금예문은 고려 인종 때 崔允儀(최윤의) 등 17명이 왕명으로 고금의 예의를 수집, 고증하여 50권으로 엮은 책으로 현존하지는 않지만 기록으로 보면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 직지(1377년)보다 43년 앞선다.

2) 再雕大藏經(재조대장경, 1236~1251)을 만든 곳: 한글을 창제하기 전 인천 강화도 선원사에서 몽골 침략에 맞서 두 번째로 만든 대장경. 고려 고종 23년(1236)부터 38년(1251)에 이르기까지 16년간에 걸쳐 완성. 경판 수가 총 6,589권으로 81,258판이므로 8만대장경으로도 불리며, 현재 그 경판이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다. 고종 19년(1232) 몽고병의 침입으로 初雕藏經(초조장경)과 續藏經(속장경)의 판본이 불타버리자 강화도에 천도해 있던 왕은 그 4년 후인 1236년에 大藏都監(대장도감)을 설치하고 대장경 再雕(재조)에 착수하였다. 

3) 鼎足山史庫(정족산사고, 1660): 조선시대 정부의 문서보관소로 설치된 계기는 摩尼山史庫(마니산사고)가 1653년(효종 4) 11월 實錄閣(실록각)의 失火事件(실화사건)으로 많은 사적들을 불태우게 되자 새로이 정족산성 안에 사고 건물을 짓고, 1660년(현종 1) 12월에 남은 역대 실록들과 서책들을 옮겨 보관하게 되면서부터이다. 현종 1년(1660).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 내부의 傳燈寺(전등사) 서쪽에 있었으며, ‘조선왕조실록’(=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유산)과 ‘선원보’(왕실 족보) 보관이 중심 업무이었다. 

4) 外奎章閣(외규장각, 1782): 1782년 2월 정조가 조선왕실의 儀軌(의궤)를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규장각의 부속도서관이다. 정조는 외규장각이 설치되자 원래의 규장각을 내규장각이라 하고,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5) 訓盲正音(훈맹정음, 1926):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한글로, 강화도 출신의 松庵(송암) 朴斗星(박두성) 선생이 7년간의 연구를 거쳐 1926년에 창제하였다. 1906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於義洞普通學校(어의동보통학교) 교사로 있다가 1913년 濟生院盲啞部(제생원맹아부: 서울맹학교의 전신) 교사로 취임하여, 이때부터 맹인교육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6) 서예가 검여와 동정: 추사 김정희 이후 최고의 서예가로 평가 받는 검여 유희강 선생과 서예가이자 문화예술운동가인 동정 박세림이 인천에서 태어났다.

7) 아래아 ᄒᆞᆫ글(1989): 인천 부평구 태생의 李燦振(이찬진, 1965~)은 소프트웨어 개발자이자 벤처 기업인으로 대한민국을 IT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에 밑거름이 된 한글 워드프로세서 아래아 한글을 개발하였다.

8) 국립세계문자박물관(2022년 개관 예정): 인천 연수구 송도국제도시에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을 개관할 예정이다. 전 세계 문자의 보고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2022년 송도에 문을 연다. 전 세계 문자자료를 수집·전시하고 연구도 가능한 명실상부한 국립세계 문자박물관이다.3. 20세기 대한민국의 대표 서예가 – 劍如(검여)와 東庭(동정)

인천은 교량으로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해협을 사이에 두고 크게 두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대한민국의 두 눈을 연상케 하는데, 곧 하나는 원인천과 부평 지역이고, 다른 하나는 강화군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20세기 인천 대표하는 서예가 2인은 원인천 출신이 아니다. 辛亥生(신해생) 劍如(검여) 柳熙綱(유희강, 1911~1976, 66세 졸)은 부평 출생이고, 乙丑生(을축생) 東庭(동정) 朴世霖(박세림, 1925~1975. 51세 졸)은 강화도 출생이다. 동정은 14년의 시간적 거리를 두고 검여보다 늦게 출생했지만, 안타깝게도 1년 먼저 逝世(서세)했다. 따라서 동정의 일생은 오롯이 검여와 함께 호흡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1949년에 일제 식민지문화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미술을 고취하기 위해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가 개최되었다. 전쟁 발발로 공백을 두었다가 1953년에 제2회 국전이 열리고, 官(관) 주도의 전시로 잡음도 많았지만 1980년까지 이어졌다. 여기에서 1,2회 서예부 문교부장관상은 김기승(1909~2000), 3,4회 수상자는 최중길(1914~1979), 5,6회 수상자는 <七言聯(칠언련)>을 쓴 인천 출신의 유희강이었다. 검여는 앞서의 작가들과는 확연히 다르게 황정견 서풍에 북위 서풍을 가미하여 자신만의 개성을 살려서 썼다. 그리고 9회 문교부장관상 수상자도 인천 출신의 박세림이었는데 그는 구양순의 필의에 황정견 서풍을 더한 해서와 북위풍의 해서를 나란히 쓴 <七言聯(칠언련)>을 출품했었다. 물론 출품 제목을 같아도 내용은 서로 다르다. 두 분 서예의 공통부분은 황정견인데, 당시는 지금보다 시원한 필세의 황정견 글씨가 인기가 있던 시절이었다.

아호가 주는 느낌으로 볼 때, 劍如(검여)는 칼과 같이 날카롭지만 東庭(동정)은 뜨락처럼 평화롭다. 검여가 서예계의 붓자루 劍客(검객)이라면 동정은 서예계의 다정한 園丁(원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인생으로 볼 때, 두 사람 모두 아픔이 크다. 검여는 중풍이라는 병마로, 동정은 가족력이라 할 수 있는 같은 짧은 인생으로 아쉬움이 있다.

올해로 검여, 동강 선생께서 下世(하세)하신지 각각 45년, 46년이 되지만 두 분의 먹빛은 해가 갈수록 더욱 빛나고 있다. 현 시점에서 인천을 대표하는 검여와 동정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2020년의 비중 있는 두 전시회를 통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2020년 3월에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50년 역사상 처음으로 서예기획전 ‘미술관에 書(서) - 한국 근현대 서예전’이 열렸다. 코로나19로 관람이 중단된 경우가 많았지만  서예가의 역할과 의미가 무엇인지 모색해 볼 수 있는 뜻깊은 전시였다. 이 전시회는 ‘조선미술전’(일제강점기)과 ‘국전’(해방 후 정부 주관)을 거치면서 현대서예로 다양하게 변화하는 과정을, 한국 근·현대 1세대 서예가 12인 소전 손재형(1902~1981), 석봉 고봉주(1906~1993), 소암 현중화(1908~1997), 원곡 김기승(1909~2000), 검여 유희강(1911~1976), 강암 송성용(1913~1999), 갈물 이철경(1914~1989), 시암 배길기(1917~1999), 일중 김충현(1921~2006), 철농 이기우(1921~1993), 여초 김응현(1927~2007), 평보 서희환(1934~1995)

의 작품으로 보여주는 자리였다. 공간의 제약과 지역 안배 등이 작용하기는 했겠지만 이 중 인천을 대표하는 작가는 검여 유희강이었다. 손재형, 배길기, 고봉주는 인천 사람은 아니지만, 인천의 서예가들을 길러낸 작가들이다.

같은 해 비슷한 시기에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개최된 ‘韓國近代書藝名家展(한국근대서예명가전)에는 붓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서예가 23인 석봉 고봉주, 원곡 김기승, 영운 김용진(1878~1968), 여초 김응현, 일중 김충현, 효남 박병규(1925~1994), 동정 박세림(1925~1975), 시암 배길기, 죽농 서동균(1902~1978), 석재 서병오(1862~1935), 평보 서희환, 소전 손재형, 강암 송성용, 검여 유희강, 철농 이기우, 갈물 이철경, 월정 정주상(1925~2012), 학남 정환섭(1926~2010), 동강 조수호(1924~2010), 남정 최정균(1924~2001), 어천 최중길(1914~1979), 소암 현중화, 석전 황욱(1898~1993)

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여기에는 검여와 동정이 함께 초대되었다. 사실 검여와 동정은 20세기 인천을 대표하는 서예가라기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서예가에 든다. 

검여와 동정은 광복 이후 국전을 발판으로 명망을 얻어 인천 서단은 물론이고, 한국 서단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다. 양인의 학서 과정은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검여는 중국에 유학하여 회화를 전공하고 이를 서예에 도입하여 새로운 조형어법을 추구하였지만, 동정은 私塾(사숙)에서 한문과 서예를 수학했다. 

인천은 두 대가의 예술혼을 불러일으킨 토양이자 길러낸 고향이다. 만약 인천이 外緣(외연)을 넓히지 않았더라면 검여는 경기도 富平郡(부평군) 石串面(석곶면) 始川里(시천리)(지금의 인천시 서구 시천동) 태생이고, 동정은 경기도 江華郡(강화군) 內可面(내가면) 黃淸里(황청리) 태생이므로 두 작가를 경기도 출신으로 미룰 뻔 했다.

해방 후 인천시립박물관이 창립되고 자연히 이곳을 중심으로 많은 미술인들의 만남과 교류가 시작되었는데, 당시 이경성 관장을 중심으로 서예가로는 검여와 동정을 비롯하여 송석 정재흥, 무여 신경희, 우초 장인식 등이 주축이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일제 강점기부터 서예에 조예가 깊었고, 전통이 있는 집안에서 자라나서 해방의 공간에서는 이미 일가견을 갖추고 있던 작가들이었다.

4. 불굴의 예술혼, 검여 유희강

검여의 본관은 晉州(진주), 雅號(아호)로는 ‘칼과 같이 견고하고 날카롭다’는 뜻의 劍如(검여)를 즐겨 쓰고, 柴溪外史(시계외사), 不咸道人(불함도인) 외에, 당호로 蘇阮齋(소완재), 夢鶴仙館(몽학선관) 등을 사용했다. 1911년 5월 22일, 경기도 富平郡(부평군) 石串面(석곶면) 始川(시천리, 현재 인천시 서구 시천동) 57번지에서 부친 性茂(성무, 1856~1911)와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검여의 인생은 성장기, 중국 유학기, 인천 활동기, 우수서예 절정기, 좌수 서예기 등의 5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 성장기(1~27세): 검여가 태어난 지 불과 28일 만에 부친이 작고하는 바람에 백부 正茂(정무)의 가르침 속에 성장했다. 4세 때부터 가학으로 서예의 토대가 되는 한문을 배우고, 16세(1926)에 3살 연상의 전주이씨 李玉種(이옥종)과 결혼했다. 24세(1934)에 신학문을 배우고자 성균관대학교 전신인 明倫專門學院(명륜전문학원)에 입학, 27세에 졸업한다. 장남 桓圭(환규) 출생한다.

2) 중국 유학기(28~36세): 28세(1938)에 중국 유학길에 올라 북경, 상해 등을 전전하면서 8년간 체류한다. 이때 북경 동방문화학회에서는 중국서화 및 금석학을 연구하고, 상해 自由洋畫硏究所(자유양화연구소)에서는 서양화를 연구하였다. 이 시기는 검여 서예의 특성을 규정짓게 하는 중요한 시기로 北魏楷書(북위해서)의 골격과 회화적인 공간구성은 이때의 서화와 서양화 공부 과정에서 생성되었다고 본다.

3) 인천 활동기(37~45세): 36세(1946)에 귀향하고, 이듬해에 장녀 小英(소영), 그 다음해에 차남 信圭(신규) 출생한다. 39세(1949)에 인천예술인협회 창립에 참여하고 충무부장에 선임, 40세(1950)에 미술연구회 회원, 인천문총 미술 부문에 주동적으로 참여, 42세(1952)에 박세림, 장인식 등과 함께 대동서화동연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제1회 서도예술전에 처음으로 서예 작품을 출품했다. 43세(1953)에 대한미술협회 회원으로 선임, 인천문총 주최 제3회 미술전에 양화와 서예를 동시에 출품하고, 제2회 국전에 처음으로 서양화 ‘念(념)’과 서화 ‘古詩(고시)’를 출품하여 입선했다. 44세(1954)에 인천미술협회가 탄생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제2대 인천시립박물관장에 취임하여 7년간 재직했다. 제11대 인천시립도서관장직을 잠시 겸직한 바 있고, 인천시문화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45세(1955)에 문총 인천지부 심의위원장에 선임되고, 인천시문화위원회 예술분과위원장에 선임된다. 국전 특선. 46세(1956)에 제2회 인천시문화상 미술부문 수상, 제6회 미협전에 유화 출품(이때까지 출품된 유화작품은 모두 22점) 이후에는 서예에만 몰두하였다. 이 시기는 다양한 비첩 연마와 국전 출품을 통하여 서예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한 시기였다. 송대의 황정견과 소동파, 청대의 등완백, 조지겸, 유용, 오창석, 조선 말기의 김정희 등의 서예를 공부하며 전서와 예서, 해서와 행서 등의 다양한 장르를 실험적으로 학습해 보던 때이다.

4) 우수서예 절정기(46~58세): 46~47세에 연속으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고 ‘白江熊州聯‘- 白馬江聲通百濟 古熊州路拱三韓(백마강 소리는 백제와 통하고, 옛 공주 길은 삼한과 두 손을 맞잡고 있다.) 황정견 서풍에 북위 서풍을 가미한 작품이다.

, 48세에 국전 추천작가로 선정된다. 49세(1959)에 <모범중고등글씨본> 2책을 일지사에서 발행하고, 국전 초대작가에 피선된다. 제1회 개인전을 인천 은성다방에서 개최, 모두 50여 점의 작품을 출품하였는데 그 동안의 여러 서체를 섭렵, 연구한 결과물이라 본다. 51세(1961)에 문총 인천지부장에 피선, 국전 서예부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6년 동안 역임함. 재건 인천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에 선임, 초대 경기미협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52세(1962)부터 6년간 인천교육대학 강사로 서예 지도, 검여서예원을 종로 관훈동에 개설하여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54세(1964)에 동경올림픽 한국현대미술전에 2점 출품.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제2회 개인전을 개최했다. 55세(1965)부터 홍익대 바로 앞서는 소전 손재형이 1963년부터 이듬해 1964년까지 홍익대학교 전임교수 역임.

, 명지대 3년간 강사 역임. <중학서예>, <고등서예> 저술함. 56세(1956)에 서라벌예대, 동덕여대 강사 2년 역임. 한국서예가협회 창립상임위원에 피선되었다. 57세(1967)에 1년 여간 월전 장우성 화백과 교유하며 사군자 등 동양화 기법을 습득하였다. <사상계>에 ‘완당론’ 발표, 제1회 검여서원전에 30여 명 참여 50점 출품하였다.

주변 서예가들의 이력에 비춰볼 때 43세 국전 등단은 늦은 감이 있지만, 간단없는 입, 특선, 문교부장관상 연속 수상,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까지의 과정은 그의 실력을 인정받게 되는 계기가 된다. 특히 54세(1964) 때의 서울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개최한 제2회 개인전을 통하여 검여체라 할 수 있는 북위해서풍의 행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송대 첩학이 주는 미려, 노련함과 청대 비학이 주는 질기고 강인함이 조화를 이룬 독자적인 서풍은 우리나라 근대 서단에 검여의 존재를 뚜렷이 각인시켰다. 54세 전후부터 이른바 우수시대를 마감한 58세(1968)까지가 어쩌면 重厚(중후), 質朴(질박)으로 대변되는 검여 서예의 절정기라 할 수 있다.

5) 좌수 서예기(59~66세): 58세이던 1968년 9월 7일 새벽,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불명, 2주일 만에 깨어났다. 그러나 오른쪽 반신불수와 실어증 증세이후 이후에도 각고의 노력으로 좌수서의 새로운 경지를 이룬다. 59세(1969) 6월 제4회 한국서예가협회전에 최초의 좌수서 작품 출품, 60세(1970)에 국전 초대작가로 좌수서 출품, 61세(1971)에 제4회 검여서원전 좌수작품 출품 등 불굴의 의지로 작품 활동을 이었다. 문인 및 기타 저명인들이 발기가 되어 신세계에서 제3회 회갑기념 개인전을 개최하고, 62세(1972)에는 서울특별시문화상 예술부문을 수상한다. 63세(1973)에 제4회 개인전을 서울화랑에서 개최, 좌수서의 경지를 한층 높여 상형문자를 주로 하는 새 작품을 선보인다. 65세(1975)에 제5회 개인전 ‘검여 유희강 자수전’을 신세계화랑에서 전시함과 동시에 <검여유희강서예집> 제1집(일지사)을 출간하고, 국제서도연맹 일본전시에 2점 출품했다. 66세(1976) 4월에 중국 대화선지 34장에 달하는 대작 ‘石北詩(석북시) 關西樂府(관서악부)’ 가로 98cm, 세로 175cm, 길이 34m, 총 3024자에 이르는 대작 ‘관서악부’에 대한 애착은 70년대 초부터 나타났다. 작고 해인 76년에 발문을 다 쓰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임창순 선생이 지은 발문(총 20행, 매행 20여 자)을 8행까지 쓰고 세상을 떠났다. 나머지 12행은 임창순 선생이 채웠다. 劍光이 번뜩이는 작품. 險絶(몹시 험함)한 붓끝. 마라톤서예. 遒勁舒展(주경서전: 씩씩하고 굳세게 펼쳐나감), 險峭爽朗(험초상랑: 험하고 가파르지만 爽快하고 明朗함). 圓熟無碍한 경계.

를 쓰기 시작하였으나 題跋(제발)을 끝마치지 못했다. <신동아>에 ‘좌수서도고행기’를 발표하고, 대구시립박물관 초대전 형식으로 제6회 개인전 개최한다. 그러나 10월 16일, 간송미술관의 사군자전을 관람하고 귀가 후, 절친한 화가 배렴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제문을 쓰다가 17일 새벽 고혈압에 의한 뇌출혈증이 재발하여 18일 한마디 유언도 없이 운명하기에 이른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2남 1녀를 남기고 있으며, 묘소는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오류리이다. 선생의 생가는 인천광역시 서구 시천동에 위치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1990년대 중반에 철거되고 말았다. 지금은 아라뱃길 옆 매화동산에 검여 유희강 선생 생가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탄신 100주년 기념으로 2011년에 조성

 

이 시기는 강인한 정신력이 육신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인간 승리의 모습을 보여준 때이다. 우반신 불수의 몸으로 左手書(좌수서)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불굴의 예술혼은 누워서 그린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나, 루게릭병을 극복한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을 연상하게 한다. 좌수서는 일체의 기교나 속기를 배제한 순진무구의 서체라 할 수 있다. 이때는 중풍을 맞기 직전에 장우성 화백과의 교유 영향도 있겠지만, 중국 유학기에 학습된 서양화 잔영을 끄집어내어 이른바 ‘癸丑墨戱(계축묵희, 계축년의 붓 장난)’ 뛰어난 미감, 감각의 확장성이 시대를 앞섬. 서양화 기법을 접목한 모더니즘의 절실한 표현. ‘반드시 죽은 후 공개하라’는 유언.이 있어 더욱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시대를 앞선 자신의 작품에 대한 몰이해를 염려했기 때문으로 본다.

라는 장르를 연다. 묵희에는 甲骨文(갑골문)과 鐘鼎文(종정문)을 통하여 문자 추상을 즐기기도 하고, 문인화로서 물고기 觀魚圖에는 시천동 굴포로 흘러드는 개울의 遊魚를 보고 자란 검여의 유년기 모습이 떠오른다. 진지함보다 자유분방함에서 일탈의 즐거움이 나타나 있다.

를 글씨처럼 단순화하여 표현하기도 하며, 단순한 묵선으로 추상적이면서도 기하학적인 화면구성을 시도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이 시기에 검여는 서화의 경계를 단숨에 무너뜨리고 새로운 조형질서를 창조했다고 볼 수 있다.

아호 劍如(검여)에는 검여가 추구한 삶과 예술의 궁극적 지향점이 들어있다. 곧 ‘劍如(검여), 石如(석여), 瓢如(표여)’의 三如(삼여)이다. 곧 ‘칼같이 날카롭고, 돌처럼 단단하고, 박처럼 둥글게’는 검여의 인생철학이자 예술목표였다. 호 중에 蘇阮齋(소완재)가 있는데, 이는 그가 흠모하고 지향하던 蘇東坡(소동파)와 阮堂(완당)을 당호로 사용한 예로서 1965년부터 1976년 사이에 주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강유위의 ‘광예주쌍집’ 서론과 소동파의 ‘神氣骨肉血(신기골육혈)’ 苏轼是宋代著名的书法家, 他与黄庭坚,米芾,蔡襄并成为“苏黄米蔡”,书法造诣极高。苏轼有一则关于书法的著名论断,那就是“书必有神,气,骨,肉,血,五者阙一,不为成书也”, 这句话表达了苏轼对于书法需要具备的条件要求.

 이론에 공감하였다. 蘇阮齋(소완재) 뒤에 主(주), 主人(주인), 主人左手(주인좌수)를 추가하기도 했다. 검여를 일컬어 추사 이후의 최고 서예가라고 칭하는 이유는 그의 호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검여는 사후 이듬해인 1977년 10월에 현대화랑에서 유작전을 기념하여 <검여유희강서예전> 제2집이 출간되었다. 1979년 10월에는 문화공보부에서 문화훈장을 추서하고, 1980년 5월에는 서화가, 문인 등의 친우와 문하생들이 묘소에 묘비를 건립하였으며, 1983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전으로 유작전 개최 및 <검여유희강서예집> 제3집을 출간했다. 1992년 10월에 인천시립박물관에서 검여 유희강 서예전을 개최하고, 2006년은 검여 서거 30주년이 되는 해로 검여의 뜻을 잇는 후학들의 모임인 ‘시계연서회’(회장 유기청)가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전시장에서 ‘제11회 시계서회전’을 개최하였다. 그리고 11월에는 인천문화재단에서 ‘인천 문화예술 대표인물 조명사업’ ‘인천문화예술대표인물조명사업’(인천문화재단) 첫 번째 인물은 2005년 우현 고유섭(1905~1944, 한국 최초 미학자. 탄생 100주년 기념), 두 번째 인물은 2006년 검여 유희강(1911~1976, 서거 30주기), 2007년 ‘남생이’ 소설가 현덕(1909~?), 2008년 훈맹정음 창안자 송암 박두성(1988~1953, 송암 탄생 120주년 기념), 2010년 시인 한하운, 2012년 인천시립박물관 초대 관장 석남 이경성. 2006~2012년에는 원로 문화예술계 관계자들의 구술을 채록하는 아카이빙 자료구축 실시하여 20여 인물들의 구술채록 완성.

의 두 번째 인물로 선정하여, 검여 유희강 서거 30주년 기념 특별전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전시장에서 개최하였다. 또한 ‘검여 유희강 선생 서거 3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주제: 검여 유희강의 생애와 예술세계

   劍如 柳熙鋼의 생애 - 이희환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강사) 

   劍如의 藝術形成과 特質 - 선주선 (원광대학교 서예과 교수) 

   劍如와 中國 近代書藝 - 곽노봉 (경기대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근현대서예사에서의 검여의 위치 -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도 열렸다.

2019년에는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서 '검여 유희강' 선생 특별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이는 현대 한국 서예를 대표하는 검여의 유족들(유환규ㆍ유소영ㆍ유신규)로부터 수백 점의 작품을 기증받은 기념으로 ‘검무(劍舞) - Black Wave’ 주제의 특별전시회를 개최했다. 유족들은 성균관대에 작품 400점과 습작 600점 등 1천 점과 생전에 사용했던 벼루, 붓 등을 아무 조건 없이 기증했다.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 명륜전문학교(성균관대 전신)를 졸업한 바 있다.

제자로는 하촌 류인식(夏村 柳寅植, 1921~2007, 87세, 경기 이천 출생) 하촌은 기운 넘치는 선비정신을 행서 예술로 승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행서를 잘 썼다.

, 송천 정하건(松泉 鄭夏建, 1939~ , 경기 연천 출생), 남전 원중식(南田 元仲植, 1941~2013, 73세, 인천 출생) 등이 있다.

 

5. 열혈 문화운동가, 동정 박세림

동정의 본관은 密陽(밀양), 雅號(아호)는 동정(東庭), 東民(동민), 南觀(남관), 우관(又觀)이며, 佛名(불명)은 玄覺(현각)이다. 부친 東觀(동관) 朴憲用(박헌용)과 모친 柳氏 (유씨) 사이에서 1925년 4월 20일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동정의 일생은 크게 4단계로 나누어 성장기, 단체활동기, 성숙기, 완숙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성장기(1~20세): 동정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21세가 되어서야 광복을 맞이한다. 동정은 6세 때부터 祖母(조모)로부터 천자문과 한글, 童蒙先習(동몽선습)을 배웠다고 한다. 지금도 남아있는 조모의 한글 글씨는 궁체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동정의 부친도 鄕土史(향토사) <江都誌(강도지)> 박헌용(朴憲用)이 편저한 강화도의 지지(地誌). 기존의 6종의 강도지를 종합하고, 그밖에도 누락된 자료를 수집하여 1932년 간행함. 상·하 2책으로 엮었다. 모두 19장 60절로, 연혁·지세(地勢)·토지·호구·부세(賦稅)·기후·해류·물산·풍토·명소·고적·인물·문화 등으로 나누어 기술함. 江都란 四都의 하나로 지금의 江華. 고려 23대 高宗 때, 蒙古의 침입으로, 高宗19(1232)년 6월부터 24대 元宗 11(1270)년 5월 還都할 때까지 39년 동안의 임시 수도였음. 이곳으로 서울을 옮긴 후부터 이 이름이 생겼음

를 저술할 만큼 당대의 文豪(문호)로서 시문에 능했으며,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8세에 조모를 잃은 뒤에는 부친을 따라 한문과 서예학습을 시작했다. 한편 인천 海星中學校(현 인천남중학교)에서 현대적인 학문도 접하고 또 무사히 졸업하지만, 이해 15세(1939)세에 부친(60세)마저 잃게 된다. 동정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때부터 더욱 발심하여 19세(1943)까지 私塾(사숙)에서 한문과 서예에 정진하였다. 

이때는 구양순과 안진경 해서를 주로 썼다.

2) 단체활동기(21~28세): 21세(1945)에 해방을 맞이하고 李意男(이의남)을 만나 결혼, 22세(1946)에 독자 泰丙(태병)을 낳는다. 동정은 23세(1947)에 인천예술인협회 총무부장, 대동서도협회 회장 취임, 대동서도협회 주최 공모전 심사 및 동 전람회에 8점을 출품할 정도로 단체활동과 작품활동에 적극적이었다. 27세(1951)에 문총구국대 인천지부 총무부장을 역임, 28세(1952)에 대동서도협회를 대동서화동연회로 개칭하고 사무국장에 취임하여 34세(1958)까지 봉사한다. 이해에 인천미술협회, 대한미술협회에도 가입하고 제1회 대동서화동연회전에 5점, 제2회 종합전시회에 7점을 출품했다. 

3) 성숙기(29~40세): 동정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서예 스승은 是菴(시암) 裵吉基(배길기, 1917~1999) 선생이다. 시암은 吳世昌(오세창)으로부터 전서를 주로 사사 받았지만 동정에게는 歐陽詢(구양순) 해서 위주로 가르쳤다. 시암은 8년 연장밖에 되지 않지만 동정은 29세(1953)부터 지도 받았다. 그해 가을 제2회 국전부터 출품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古琴名帖’을 출품하여 첫 입선.

하기 시작하여 6회(30세,1956)까지 국전에 연속 입선, 7~8회(31~32세,1957~1958) 국전에서는 특선하는 영광을 안게 된다. 이 과정에 다니던 서울한의과대학 일제강점기까지 억눌려 있던 한의사들은 해방과 함께 한의학 교육기관의 설립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1948년 설립된 '東洋大學館(동양대학관)'이 그 노력의 결실이다. 이 학교는 부산 피난 시절인 1951년 서울한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고 1955년 동양의약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다. 이후 1965년 경희대학교에 흡수 병합되어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한의학과가 된다.

은 30세(1954년 6월)에 중퇴하기에 이른다. 

동정은 34세(1958)부터 3년 동안 매년 개인전을 개최하고, 그 이후 7회의 개인전을 더한다. 개인전을 개최하면서 동정은 자신의 서예세계를 넓혀나갔는데, 이 때, 鄧石如(등석여)와 趙之謙(조지겸)의 글씨도 익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학서 과정에서 연배인 검여와는 자연스럽게 교유하게 되고 또 그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여기에서 북위풍의 맛을 곁들이면서 동정체가 완성되었다고 본다. 

8차례의 국전 출품과 이후 매년 10월의 국전 초대 출품, 대동서예협회전, 대동서화동연회전, 동정서숙전, 경향 각지의 크고 작은 동인전, 초대전, 한중일 합동서도전 등 실로 성실한 작가로서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36세(1960)에 동정서숙 창설 지도, 인천문총 대표최고위원 역임, 그리고 인천시 문화상을 수상한다. 이해 10월 제9회 국전에서 마침내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게 되는데, 이때 동정은 출품할 당시 素筌(소전) 孫在馨(손재형)으로부터 첨삭지도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당시의 작풍은 黃庭堅(황정견)과 歐陽詢(구양순)의 필의가 가미된 北魏書風(북위서풍)의 글씨이다. 이후 동정은 왕희지 集字聖敎序(집자성교서)를 익혀 유려하고 활달한 행서를 즐겨 썼으며, 만년의 北魏書風(북위서풍)의 글씨는 독학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38세(1962)에 예총 경기도 지부 부지부장, 39세(1963)에 경기도 문화상 수상을 수상한다.

4) 완숙기(41~51세, 1965~1975): 동정은 41세(1965)에 예총 경기도지부장을 맡으면서 급격히 많은 심사와 작품 출품으로 바빠진다. 그는 성실성을 인정받아 5회나 연임하게 되며, 인기가 많아 대학, 회사, 은행, 방송국 등에 출강 요청이 쇄도한다. 급기야 인천에서 동정서숙을 운영하면서 서울 종로에도 서실을 낸 배경에는 전각가 褱亭(회정) 鄭文卿(정문경, 1922~2008)이 있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그의 단명의 단초(端初)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상황에도 그의 유작 대부분은 이때 이루어진다.

이해에 인천시사 편찬위원, 경기연감 편찬위원 역임, 제14회 국전 서예분과 심사위원, 제5회 동정서예개인전 등을 모두 소화해 낸다. 42세(1966)에 파월장병지원 대책위원, 인천시향 운영위원, 5.16민족상 이사 역임, 인천시 행정자문위원, 불교단체통합회 지도고문, 석림회 고문, 43세(1967)에 반공연맹 경기도지부 운영위원, 인천시 감사장, 경기도 문화상 심사위원, 44세(1968)에 인천시 행정자문위원, 한국미술협회 경기도지부장, 45세(1969)에 대한불교 화엄종 고문, 경기도 가정의례실천 추진위원, 경기도 교육위원회 장학위원, 경기도 관광자문위원회 위원을 역임한다.

46세(1970)에 동정서숙을 개칭한 ‘동정한묵회’ 이사장 취임, 인천시 감사장, 인천교육대학 강사, 경기도 감사장, 소성완석회 회장, 인천시 행정자문위원, 47세(1971)에 인천소년교도소 재소생 서예지도위원, 인천문화원장, 국전 서예분과 심사위원장, 민주공화당 중앙위원회 농어촌분과위원회 위원, 대학미전 서예분과 심사위원장, 인천시 도시공원위원회 위원, 경기도 장학회 위원, 강화문화재 고문, 중학교 무시험추첨 관리위원, 48세(1972)에 전국문화원연합회 이사, 기서문화 향토사연구회 회장 역임, 인천시 행정자문위원, 중앙선원중창불사 추진위원회 위원, 49세(1973)에 인천문화원 이사, 한전인천지점 서예부 지도, 인하대 서예반 지도, 중등교원자격연수회 강사, 경기도 교육감 감사패, 50세(1974)에 한국은행 인천지점 서예반 지도, 인천시장 감사패, KBS방송국 서예반 지도, 인천시장 감사패 등 실로 바쁜 일생을 보냈다. 

어떻게 보면 서예 외에도 종교, 문화, 시정, 교육, 정치, 봉사활동까지 鐵人(철인)이라는 별명이 그에게 어울릴지 모른다. 조심스럽게 회고해 보면 너무나 많은 일을 사양하지 않고 최대한 수용하다가 보니 이것이 안타깝게도 단명의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동정의 생애는 비교적 짧았지만 해방 이후부터 1975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의 약 30여 년간은 치열한 서예가로서, 사숙 및 대학 강의를 통하여 많은 후진을 길러낸 스승으로서, 민족의식이 투철한 참전 애국자로서, 많은 단체활동을 통한 문화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제1회 동정서예개인전(34세, 1958, 강화군청회의실)을 고향에서 개최한 것과, 이 전시가 강화 초유의 미술행사라는 점에서는 애향심 또한 매우 깊다고 본다. 

동정 하면 큰 체격(182cm의 키와 95kg의 몸무게)에 호방한 성품으로 만약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정치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자신의 물건은 자기 스스로 정리 정돈해야 하는 깔끔한 성미는 그의 해서 취향과 닮았다. 

父慈子孝(부자자효)의 정은 부자의 아호에 잘 나타나고 있다. 부친이 자신의 호, 東觀(동관)에서 ‘東(동)’ 자를 따서 東庭(동정)이란 호를 지어준 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요, 후에 동정 스스로 만들어 사용한 호, 東民(동민), 南觀(남관), 우관(又觀) 등에 부친의 호에 나오는 ‘東’이나 ‘觀’ 자를 그대로 사용한 것은 부모에 대한 효심의 발로이다. 아버지는 觀(관)하고 아들은 庭(동정)에서 뛰어노는 모습이 연상되는 호이다. 동정은 이에 더하여 庭(정) 자에서 庭試(정시)를 찾고 있는데, 이는 조선 시대에 경사가 있을 때에 대궐 안에서 보이던 과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동정은 평생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처럼 분주히 살았다.

제자로는 인천의 서맥을 잇고 있는 청람 전도진(靑藍 田道鎭, 1948~ , 평북 철산 출생), 대전대학교 교수 송암 정태희(松巖 鄭台喜, 1951~ , 충남 공주 출생) 등이 있다.

 

6. 나가며

인천의 슬로건은 ‘살고 싶은 도시, 함께 만드는 인천’이다. 살고 싶은 도시의 절대적 조건은 문화와 예술의 인프라가 구축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인천은 지금까지보다, 예술가들을 더 수용하고 아끼고 지키기 위한 노력과 실질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본다. 

검여와 동정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공간의 혼란과 남·북 분단, 6.25전쟁과 민주화 시련 속에서도 인천과 경기도 문화발전을 위하여 헌신한 분들이다. 전란에도 인천의 혼이 담긴 박물관과 도서관을 지킨 분들이다. 특히 서예교육을 통하여 후진을 양성하고 죽어서도 작품 기증을 통하여 아낌없이 헌신한 분들이다.

검여 유희강은 추사 김정희를 잇는 서·화의 대가이고, 동정 박세림은 검여와 어깨를 나란히 한 행서의 대가이다. 이들 외에도 인천을 빛낸 서예가로 송석 정재흥(松石 鄭載興, 1918~1988, 경기 화성 출생)은 초서로, 무여 신경희(無如 申卿熙, 1919~2000, 한의사, 강원도문화재로 지정된 고려태사 장절공 신숭겸의 묘비문, 서울장충단 공원에 있는 사명대사 동상의 글, 한의신문 제호)는 안진경체로, 우초 장인식(又樵 張仁植, 1928~1993, 66세)은 한글 궁체와 篆隷(전예)로 유명했다. 검여 유희강은 소전이 국전 심사를 하면서 발굴한 작가라 할 수 있고, 동정 박세림은 시암 배길기와 소전 손재형 양인의 영향을 받은 작가이다. 이외 우초 장인식은 시암의 문하이며, 송석 정재흥과 무여 신경희는 동정의 가르침을 받았다.

 

검여의 예맥은 하촌 류인식, 송천 정하건, 남전 원중식으로 이어지고, 동정 박세림의 예맥은 청람 전도진, 송암 정태희로 이어졌다. 청람은 지금도 인천을 지켜며 전각과 서예로 유업을 계승하고 있다.

검여와 동정의 筆痕(필흔)을 감상하다 보면 묘하게도 인천의 미래가 얼비친다. 이는 이들이 인천에서 형제처럼 나타나 인천의 예맥(藝脈)을 이으며 20세기를 풍미하다가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삶도 예술이었다. 점으로 꼬집고 획으로 간질이며, 농묵으로 포옹하고 갈필로 긁어주던 삶이었다. 인천이 그들을 버리지 않는 한 사랑의 먹, 인묵(仁墨)은 인천 시민의 가슴에 정서적 공감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인천은 한국의 제3의 도시로 발전했다. 도시 규모에 걸맞게 포용과 베풂의 문화도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인천은 두 작가를 제대로 포용하지 못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인천이 지키지 못한 두 작가의 작품을 각각 성균관대학교

와 대전대학교에서 지키고 있다. 부끄럽지 않은 예향으로서의 인천이 되기 위해서는 이들의 영혼이 찾아와 쉬고, 시민들이 공감하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랑방과 같은 상설전시장을 어떤 식으로든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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