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우주를 품은 빛선과 소리선 - 김갑진 개인전 평문

우주를 품은 빛선과 소리선

 - 김갑진 개인전 -

 

작가 김갑진은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한 철학적 화가이다. 전업 작가의 길을 선택한 이래 끊임없는 독서와 명상을 통한 구도적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지금까지의 전시 타이틀을 보면 자기실현으로 가는 이정표와도 같다. 그 이정표의 키워드를 살펴보면 초창기에는 ()’ ‘()’ ‘()’ 등의 깊이 있는 색채에 대해 치열하게 탐구했다. ‘까마귀를 통하여 기록되지 않은 신화를 들려주기도 하고, 때론 깊은 사색에 빠져 존재(存在)’의 의미를 찾아 방황하기도 하더니, 급기야 규정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사고의 카오스에 빠져들어 침류(沈流)’ 또는 회닉(晦匿)’과 같은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근년에는 물지정(物之情)’을 모색하며 사물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더니, 이번에는 만다라 블루라는 새로운 화두를 세상에 던지고 나왔다.

필자는 작가의 나무와 까마귀의 변주시절에 지인들과 함께 전남 곡성에 있는 그의 작업실 김갑진갤러리와 그의 제씨가 운영하는 시사교육박물관 로제에 들러 신화와 원시성에 대하여 밤늦도록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신비하게도 이튿날 그의 안내에 따라 동리산 태안사에 들렀는데, 선원 주련 중에 김갑진 작가의 작업 세계를 대변하는 값진 구절이 번개처럼 눈에 들어왔다.

 

一粒粟中藏世界(일립속중장세계) 낟알 좁쌀 속에는 온 세계를 감추고

半升鐺裏煮山川(반승쟁리자산천) 반 되들이 솥에는 산천을 넣어 삶는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갤러리의 밤엔 하늘의 별이 꽃밭을 이루고 있었고, 갤러리의 낮엔 너른 마당의 꽃들이 별밭을 이루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다. 신비로운 천지의 조화가 하모니를 이루며 빛선과 소리선으로 사정없이 그의 화폭에 내리꽂히고 있었다. 우주의 씨앗인 빛과 소리가 그의 화면 위에서 서로 만나 오묘하게 씨앗으로 뿌려지고 작품으로 영그는 것이었다. 당시 그가 읽고 있던 책은 <산책자를 위한 자연수업><지식의 대통합 통섭>이었다. 그윽한 시골에서 고독과 자신의 그림자를 벗 삼아 전업 작가로 살아가는 그였지만 시대 흐름을 직시하고 현실을 꿰뚫어 보는 깨어있는 작가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만다라(曼陀羅)이다. 작가는 만다라 작업을 통하여 우주 생성의 본질을 캐고 있다. 그의 우주 탐색 도구는 언제나 빛이다. 그 빛을 형상화한 것이 명주 실낱같은 세선(細線)으로 나타나는데, 그 끝없는 세선의 중첩이 빅뱅을 일으키며 마침내 만다라를 창조해 내고 있다. 낟알 좁쌀 속에 온 세계가 감추어져 있듯, 그의 수없이 중첩된 세선은 묘한 파동을 일으키며 평면을 입체 공간으로, 입체 공간을 우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이처럼 구도자적인 그의 작업을 보노라면 바늘구멍으로 우주를 본다는 말이 어울릴 듯하다.

만다라(曼陀羅)는 산스크리트어 ‘maṇḍala’의 역어(譯語)로 본질(本質)이나 정수(精髓)를 뜻하는 ‘mandal’과 소유를 뜻하는 ‘la’의 합성어이다. 만다라는 깨달음으로 가는 내비게이션이다. 그 목적지는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것이고, 그 접근 방법은 명상(冥想)이다.

만다라는 그리기 전도 명상이고, 시작과 과정도 명상이며, 결과도 명상이 세계이다. 더 나아가 감상자도 명상 속에 빠져든다. 만다라라고 하면 힐링 효과를 빼놓을 수 없다. 만다라는 머리보다 가슴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그래서 만다라는 심리치료에 많이 사용된다. 코로나 19,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검증되지 않은 정보의 홍수 등으로 상처 난 지구와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나서야 할 때이다. 만다라를 그려보거나, 타인의 작품을 감상하면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전통적인 오색은 청((((() 등이다. 그러나 만다라 구성의 오색에는 백() 대신에 록()이 들어간다. 만다라 오색은 오 대륙을 색으로 상징하는 오륜기(五輪旗)의 청((((()과 일치한다. 흔히 오대양·육대주라 하지만 오륜기에서는 남북아메리카를 하나로 취급하였다.

작가는 만다라 5색 중에서 청()을 택했다. () 중에서도 만다라 블루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울트라마린 블루(ultramarine blue)’로서 이는 황금보다 더 귀한 靑金石(청금석)에서 나온 염료로 서양에서는 르네상스 화가들이 사용했던 가장 아름답고 값비싼 안료였다. 군청색(群靑色)으로 번역되는 울트라마린 블루는 거룩함과 겸손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성화(聖畫) 재료로 많이 사용되었다. 불교에서는 청금석을 극락정토의 칠보(七寶)의 하나로 여겼으며 청색이 밖에서 안으로의 귀의또는 묘관찰지(妙觀察智)’ 등을 상징하므로 울트라마린 블루를 고귀하게 여김은 당연한 귀결이다. 청색의 일반적 상징도 희망을 비롯하여 , 동방, 나무, 쓸개등이 있다.

만다라(maṇḍala)는 우주의 본질이 가득한 둥근 바퀴를 말한다. 원형 바퀴 이미지는 해, , 연꽃 등이 그러하듯이 인류의 보편적인 종교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작가의 만다라는 구성에 있어서 원()을 근간으로 하되 방()이 더해지기도 한다. 프레임이 사각형임을 고려한다면 모든 작품에 방원(方圓)이 나타나는 셈이다. 방원은 티베트 만다라에서 기본적으로 나타나는 구성이기도 하다. 하늘과 땅에 대한 동아시아의 전통 우주관도 천원지방(天圓地方)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는 보편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 작가의 만다라는 신비로운 우주를 연상케 하는 울트라마린 블루를 배경으로 하여 무수한 빛이 스쳐지나감으로써 파동이 발생하는 동적 우주 질서로 표출된다. 우주에 퍼져나가는 빛을 응시하다가 보면 우주를 유영하는 자아를 발견하기도 하고, 때론 마음속 깊숙이 내재해 있는 내면의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만다라 작품에 켜켜이 쌓인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응시하다가 보면 블랙홀 속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 우주를 유영하다가 보면 어느덧 달과 별이 아스라이 나타나기도 한다. 가끔은 운석이 느닷없이 나타나 화들짝 놀라 깨어나기도 한다. 김 작가의 만다라는 분명 이차원의 평면에 구현된 그림이지만 삼차원의 공간과 사차원의 시간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만다라를 내면으로 끌어들이면 일종의 깨달음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스위스 태생의 분석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은 만다라의 심오한 의미와 영적 치유력을 서유럽에 소개했다. 다음은 융의 명언이다.

 

밖을 바라보는 자는 꿈을 꾸고안을 바라보는 자는 깨어난다.”

 

이제부터 만다라 작가 김갑진은 세계 미술계의 새로운 정보 생산자로서, 남의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각을 캐내는 일이 일상일 것이다. 만다라를 창조한 작가이지만, 이후는 만다라가 그를 꿈꾸게 하고 깨어있도록 인도할 것이다. 이제 그의 롤 모델은 사람이 아니라 만다라이다. 특히 그만의 만다라 블루는 공유라는 이름으로 시간상으로 영원하고 공간상으로 무한하리라 믿는다.

 

2021. 5. 15.

권상호(문예평론가,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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