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마지막 잎새
도정 권상호
벽에 걸린 달력이 딱 한 장 남았다. 미국의 작가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에서와 같이 세찬 비바람에도 떨어지지 않는 노화가의 그림 담쟁이처럼 죽어가던 한 생명을 살려내는 그런 마지막 장이라면 참 좋겠다.
십이월, 추위가 영상에서 영하로 점점 더해가며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달이다. 1년 중 일조시간이 가장 짧아서 어두운 달이기도 하다. 이 어두운 달에 하늘에서 환한 눈이 내려 온 누리를 밝게 해 준다는 사실은 자연의 오묘한 이치이다.
십이월 초순에는 대설(大雪)이란 절후가 있다. 대설이란 눈이 많이 내리는 계절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눈이 많아서 연중 밤이 가장 긴 동지(冬至)가 뒤를 이어도 조도(照度)에 대한 걱정은 없다. 동짓날에 먹는 동지팥죽도 검붉은 색깔로 그 자체로는 어둡지만, 찹쌀가루로 빚은 하얀 새알심이 들어 있어 선명한 명도 대비에 의한 산뜻한 음식 분위기를 연출한다.
옳거니, 겨울의 어둠 때문에 밤공부의 어려움을 시사하는 형설지공(螢雪之功)이란 고사성어가 있것다. 여기에 손강과 차윤이란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중 손강은 집안이 가난하여 기름을 살 돈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늘 눈빛에 책을 비추어 글을 읽었고, 나중에는 어사대부(御史大夫)라는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다. 독서가 출세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어두워서 야독(夜讀)하기 어려웠던 옛 환경은 현란한 전기불빛 속에 파묻혀 사는 오늘날과는 사뭇 다르다.
춥고 어둡고 긴 겨울밤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고독한 사람에게는 야속한 밤이다. 연초에 계획했던 일을 이루지 못한 사람에게는 십이월의 하루하루가 아쉬움의 밤이다. 더구나 연평도 포격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주민에게는 두려움과 오한의 밤일 것이다.
십이월이 되면 모두가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 설(雪)이 내리면 설설 기어가야 하고 빙(氷)이 얼면 빙빙 돌아 미끄러지기 쉽다. 국회에서도 여야 간의 새해 예산안 시비 등으로 설설 기기도 하고, 빙빙 돌다가 얼음판 위처럼 미끄러지며 난장판 국회, 파행국회가 되어 썰렁하긴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십이월의 시비!
그러나 십이월이면 무엇보다 서민들은 가는 해가 아쉬워 송년회(送年會), 망년회(忘年會)란 이름으로 따뜻한 모임을 많이 갖게 된다.
송년회란 ‘보낼 송(送)’ 자가 말해주듯 한 해를 보내며 그해의 온갖 괴로움과 아픔을 잊자는 뜻에서 십이월에 베푸는 모임이다. ‘잊을 망(忘)’ 자 망년회(忘年會)도 비슷한 의미이다. 인터넷 사전 중에는 이를 일본에서 온 말이므로 송년회로 순화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미 우리 생활에 깊이 젖어 있고, 또 언어생활의 풍요로움을 위해서는 사용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차제에 망년회의 한자를 바꾸어 ‘바랄 망(望)’ 자 망년회(望年會)라고 하는 것도 좋겠다고 재치 있는 제안을 하는 분도 있다. 그렇다. 송년회든 망년회든 핑계 대고 과음하지 말고 지난 일 년을 돌아보면서 내년을 준비하는 희망적인 자리이어야 한다.
소속 모임이 많은 만큼 송년회의 종류도 많다. 학연 모임으로는 초, 중, 고, 대, 대학원 등의 총동창회, 지역동창회, 동기회, 반창회 등의 모임이 있다. 고향에 살든 타향에 살든, 지연에 의한 모임으로는 동회, 면민회, 군민회, 도민회, 구민회, 시회, 주민자치회, 동회, 부녀회 등이 있다. 또 축구회, 배드민턴회, 탁구회 등 운동을 바탕으로 하는 모임, 문학, 미술, 음악, 서예, 낚시, 골프, 수영, 등산 등의 취미를 바탕으로 하는 모임, 자녀로 말미암아 만나는 학부모회, 군대에서 만난 전우회 등, 무수한 사회단체, 문화단체, 정치단체, 환경단체, NGO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입산하여 세상과 떨어져 살지 않는 이상, 십이월은 겹치기 모임이 많아 곤혹스럽게 마련이다.
게다가 온라인 모임도 만만치 않다. 카페를 통한 온라인 만남으로 부족하여 오프라인 만남으로 이어지는 수도 있다.
시작하지 않았다면 마침도 없을 것을. 만나지 않았다면 헤어짐도 없을 것을. 오르지 않았다면 내려옴도 없을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좋은 때와 좋은 곳을 정하여 만나고 떠들어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김정일을 제외한 각국 정상들의 잦은 만남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외로운 존재이다. 고생(苦生)이란 말과 같이 삶은 고(苦, 괴로움)이자 고(孤, 외로움)이다. 고위(高位)에 올라도 고고(孤高)하다. 외로워서 만남이 잦고, 만남으로써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일은 당연한 귀결이다.
대학 동문회에 나갔을 때의 나이 팔십을 바라보는 대 선배님의 말씀이다. “나이가 들수록 모임에 적극적으로 나가야 한다. 한번 나가지 않으면 불러주지도 않는다.” 늙을수록 벗이 많아야 장수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가정이 행복해야 장수에 도움이 된다는 것 등, 나이가 들면 주로 건강과 장수에 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는가 보다. 선친(先親)께서 만년에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이젠 찾아갈 만한 친구가 다 죽고 없으니, 이번에 내 차례인가 보다.” 그리고 달포 후에 돌아가셨다.
이번 송년회에는 여생을 즐겁게 보내기 위하여 자신의 인생삼락(人生三樂)을 준비해 가 보자. 공자, 맹자의 인생삼락이 다 유명하지만, 동방의 서성(書聖) 추사 김정희 선생에게는 ‘추사삼락(秋史三樂)’이 있었다. 일독(一讀), 이색(二色), 삼주(三酒)가 그것인데, 일독(一讀)은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삶, 이색(二色)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변함없는 사랑, 삼주(三酒)는 벗과 더불어 술잔 기울이며 세상사 얘기하는 것이다. 곧, 독서와 사랑과 벗이 그것이다. 그에게 술은 수단일 뿐 목적은 아니었다.
과거의 많은 선택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듯이, 오늘도 나는 선택을 하고 있다. 오늘의 선택이 분명히 나의 미래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여러 모임이 겹쳐서 선택이 곤란할 때가 잦다. 바로 이때 자신이 정한 인생삼락이 있다면 그 기준으로 선택하면 되리라.
권상호
나의 경우는 외로울 때면 문방사우(文房四友)도 좋은 벗이니까 붓글씨를 쓰거나 친구를 찾아가 수작(酬酌)하며 덕담을 나누는 편이다.
이런 여담이 있다. “요즘 세상에 무작정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하는 등산(登山)하는 이는 많으나, 조용히 마음을 닦으려는 입산(入山)하는 이는 적다.”
인생 팔고(人生八苦)라는 것도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고통인 생고(生苦), 늙어감에서 오는 노고(老苦), 몸이 아픔에서 오는 병고(病苦), 죽어감에서 오는 사고(死苦),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애별리고(愛別離苦),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들과 만나야 하는 원증 회고(怨憎會苦), 구하고자 하나 얻지 못하는 구부득고(求不得苦), 오감은 각각 좋은 것을 추구하는 오온성고(五蘊盛苦) 등이 그것이다.
이번 연말에는 각자의 인생삼락을 정하고 여생 동안 실천해 보는 것이 어떨까?
一面如舊 첫 만남에서 의기상투(意氣相投)하다. 첫 만남에 옛 친구처럼 서로 마음이 잘 맞다. 이제 새해를 맞으면 또 신년하례(新年賀禮)를 위한 신년회를 가질 것이다.
사교(私交)는 사적인 만남
술 한잔 마시고 "신세상과 구세상의 중간이라고 할까? 처음 봤지만 처음 본 것 같지 않은 풍경이네요 一見如故라며 "드디어 영혼의 동반자, 소울메이트를 만났습니다"
오랜 만에 만난 친구(親舊), 친구(親舊)란 아픔을 함께 나눈 벗이란 의미와 오랜 벗이란 두 가지 의미가 들어있다. 친(親) 자 안에 ‘메울 신(辛)’ 자가 아픔을 나타낸다. 오랜 벗이란 음식으로 치면 잘 발효된 된장, 고추장, 김치와 같은 벗을 가리킨다.
제야의 종
우리는 아픔은 빨리 잊고, 행복은 오래 기억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