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한국문학신문> 칼럼 28- 신묘년(辛卯年) 신묘담(神妙談)

신묘년(辛卯年) 신묘담(神妙談)

 

도정 권상호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로서 평화운동, 핵무장 반대운동으로 유명한 B. Russel이 날린 멋진 말 한마디가 있다. “성공한 인생을 위해서는 첫째, 하고 싶은 일을 하라. 둘째, 좋은 친구를 사귀라.”라는 것이다.

  신묘년 토끼해를 맞아 지나온 길과 열어갈 길을 생각하며 설악산관광호텔을 향해 떠난다. 하고 싶은 일인 라이브 서예를 하고 좋은 친구 두 명과 함께 새해를 열고 싶어서이다.

  라이브 서예 가방을 챙기고 붓털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붓털이 되어 본다. 심필불이(心筆不二)라고나 할까.

 

나는 본디

착한 동물의 체온을 지키던

숲 속의 자유 영혼.

 

꿈길에서도

선비를 만나리라는 다짐으로 지내다가

운 좋게도 붓대를 만나

부활을 꿈꾼다.

 

먹을 머금는 순간

온 몸에 묵향(墨香) 어린 피가

돌기 시작한다.

 

화선지, 너를 기다리며

지금까지 붓대 속에서 꼼짝도 않고

자리를 지키며 지냈노라.

 

눈 내린 평원에 먹 씨알을 뿌린다.

바위처럼 거친 언덕도 있고

구름처럼 부드러운 밭도 있다.

 

돋아나는 순

더러는 점이라

더러는 획이라 이름 붙인다.

 

서예 세상이 열린다.

 

  그렇다. 겨울이라 힘겹지만 웅크리고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신묘년(辛卯年)의 신() 자는 ‘매울 신’이다. 매운 고초를 뚫고 나가야 ‘행복 행()’이 온다. 가는 길에 많은 터널을 뚫고 지나가자 멀리 속초 행복동이 시야에 들어온다. () 자는 ‘버들 류()’에서도 보듯이 양쪽으로 열어젖히기 쉬운 주렴의 모양이다. 만물이 겨울의 문을 열어젖히고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음력 2월이 묘월(卯月), 하루 중에는 막 햇살이 올라와 어둠을 열어젖히는 오전 5~7시가 묘시(卯時)에 해당한다. 우리는 바쁜 일상의 시간을 절묘하게 열어젖히고 일탈을 꿈꾸며 라이브 서예 여행을 떠난다.

  토끼는 12지 중에서 네 번째 동물로 방위는 동쪽을 가리킨다. 토끼는 잘 토끼기도 하지만, 토실토실하고 끼가 많아서 토끼라고 불리지 않나 생각한다. ‘토끼다’는 말은 ‘도망가다’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어형은 ‘토끼+다’로 분석되는데, 이와 비슷한 조어 방식으로 이루어진 말은 ‘고[, 코의 옛말]를 골다’, ‘갈[, 칼의 옛말]을 갈다’, ‘신[]을 신다’, ‘띠[]를 띠다’, ‘자[]를 재다’, ‘잠[]을 자다’ 등이 있다.

  토끼에 해당하는 한자 발음도 ‘토()’이다. 토끼의 특징은 ‘토끼 토()’ 자에 잘 나타나 있다. 두 귀는 길쭉길쭉, 두 눈은 동글동글, 앞발은 짧고 뒷발은 길며, 꼬리는 댕그랑 점으로 붙어 있다. 만일 꼬리만 끊기고 목숨을 면하면 ‘면할 면()’ 자가 되고, 또 하나의 극적인 위기 모면 방법으로 토끼면 되나니 ‘편안할 일()’ 자가 그것이다. 얼씨구.

  토끼는 귀가 길고 커서 남의 말을 잘 들을 줄 아는 덕을 지녔다. 계수나무 밑에서 약을 찧는 달 속의 토끼는 무병장수를 상징한다. 토끼는 달과 관계가 있고 네 번째 동물이므로 음양으로 보면 음에 해당한다. 따라서 다산과 다복의 동물이기도 하다. 1년에 4번에서 6번까지 임신하고 한 번에 스무 마리까지 새끼를 낳을 수 있다 하니 과히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할만도 한다.

  이야기 속의 토끼는 지혜와 재치의 화신이며, 대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별주부전에서는 불로장생의 보약인 자신의 간으로 말미암아 죽을 위기를 맞지만, 지혜로 목숨을 건진다. 동화에서도 잡아먹으려는 호랑이에게 웅덩이에 꼬리를 넣고 기다리면 많은 물고기를 낚을 수 있다고 하며, 호랑이 꼬리가 얼어붙은 뒤에 도망치는 똘똘한 토끼의 모습이 나타난다.  

  장수와 다산, 거기에다 지혜까지 주는 토끼. 저 출산 시대의 고 인기 동물은 단연 토끼로다. 이쯤이면 올해에는 아이들을 쭉쭉 낳을 만하지 않은가. 절씨구.

  그러나 토끼에게도 약점은 있다. 토끼는 앞발이 짧고 뒷발이 길어서 오르긴 잘해도 내리 달리기에는 매우 약하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 난로용 솔방울도 딸 겸 토끼 사냥을 할 적이면 반드시 산등성이에서 아래쪽으로 몰았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눈이라도 제법 쌓이면 딱히 몸을 숨길 곳도 없고 미끄러져서 달릴 수도 없다. 이리하여 어린 학생에게마저 쑥스럽게 사로잡힌 토끼는 겨울철의 보양식이 되고 털은 귀마개나 토시용으로 쓰였다.

 

  사실 진작부터 알고 지내던 설악산 신흥사 석스님으로부터 라이브 서예 초대를 받은 터였다. 설악산관광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가장 넓은 특실이라 밤에는 누워서 별들의 쇼를 보고 낮에는 권금성 등의 외설악을 조망할 수 있는 아름다운 방이었다. 십여 명이 넉넉히 잘 수 있는 방에 벗 셋이서 둥지를 틀어 본들 쉬이 잠이 들 리 없다. 문무 수련에 대화와 시서(詩書)로 취침은 매번 새벽 4시쯤이었다. 이키, 에크.

  눈 속에 찾은 설악산 신흥사(新興寺). 우송 주지스님을 배알하고 덕담도 들었다. 신흥사는 외설악 설악동에 자리하며 태평양의 파도와 바람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사찰이다. 설다원(雪茶院)에 들러 다례를 즐기며, 여러 스님을 모시고 라이브 서예를 펼쳤다. 스님께서 화두로 운을 내면 그에 따라 즉흥적으로 흥얼거리며 글씨를 썼다. 남북통일을 기원하여 만들었다는 거대한 청동대불 옆에 자리하고 있는 설다원. 눈을 녹여서 차를 끓어 먹는다는 의미가 아닌가.

  이튿날 낮에는 호텔 앞 설악식당에서 황태구이, 황태해장국, 더덕구이, 생선 자반 등, 산과 바다 냄새 물씬 풍기는 맛을 즐겼다. 저녁에는 태평양을 조망하면서 웅지를 펴며 멋진 회를 즐길 수 있는 남북횟집행이었다.

  영하 10도 안팎의 설악동을 산책하다가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에 오르기도 했다. 산 위에서는 두 팔 벌려 천기를 받으며 지인들의 행운을 기도했다. 설악산은 눈이 와도 하얗고, 눈이 오지 않아도 눈이 온 것처럼 하얗다. 그래서 설악산이다. 정상까지 계단으로 잘 정비되어 오르는 길이 옛날처럼 두렵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조심 내려왔다.

  설악산을 떠나기에 앞서 옹달샘커피숍에 들렀다. 커피를 직접 갈아보고 해설이 있는 클래식 음악까지 즐길 수 있는 오감 만족의 순간이었다.

  여행 내내 선(), 삼매(三昧), 무위자연(無爲自然), 화두(話頭), 공유(共有), 독선(獨善)이 아닌 독존(獨存), 파도타기, 깍두기 등의 단어가 뇌리를 스친다.

  조용한 겨울 설악에 매료되어 1 2일을 계획했으나 3 4일로 끝났다. 하고 싶은 일과 좋은 벗이 함께한 라이브 서예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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