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신문> 칼럼 31- 설국(雪國)의 필몽(筆夢)

설국(雪國)의 필몽(筆夢)

도정 권상호

  미시령 긴 터널을 통과하자 그곳은 설국이었다. 태어난 이래로 이렇게 많은 눈은 처음 본다. 지천이 눈이다. 눈이 부시다. 눈에 눈을 맞으니 눈물이 나온다. 눈에서 나오는 눈물인가, 눈~이 녹아 흐르는 눈~물인가.

  지난 2월 11일 저녁 신흥사에서, 설악산 대청봉을 이고 살아가는 속초 사람들을 위한 신춘 음악제를 펼치기로 했다. 이 행사의 사회를 부탁받고, 대금을 연주하는 ㄱ씨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ㅈ씨, 그리고 그녀의 두 딸까지 넷이서 지프를 타고 미시령까지는 잘 올라왔다. 그러나 미시령 터널을 통과하자 눈밭이었다. 우리 차는 쇠사슬에 묶인 노예처럼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설국 여행이란 신비감이 긴장 속에서도 행복감을 안겨다 준다.     순간 우리가 탄 차가 뒤뚱뒤뚱하더니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차체가 옆으로 돌면서 빙그르르 내려간다. 10여 미터쯤 내려가다가 길가에 멈췄다. 휴~ 살았다. 다행히 우리 앞에는 다른 차가 없었다. 눈은 여전히 반갑지 않은 환영의 춤을 추고 있다. 저주의 눈이라기엔 너무나 순수하고 곱게 빛난다. 낭만의 눈, 축복의 눈에서 시작하여 나중엔 대설을 지나 눈 폭탄으로 바뀌었다.

  설악의 눈은 정직하게, 착실하게, 성실하게 내린다. 공연장에 수백 명 오리라던 관객이 40여 명에 그쳤고, 출연하기로 되어 있던 두 팀의 합창단 공연도 눈 폭탄을 맞아 전원이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기타와 만돌린, 바이올린, 대금, 피리, 가야금 연주 등으로 자축 파티처럼 음악회는 소략하게 치러졌다. 눈이 오면 모든 사람의 발이 묶이는 탓에 ‘묶을 속(束)’ 자 ‘속초(束草)’라 하는가 보다.

  설악의 눈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리더니, 다시 저녁부터 아침을 향해 내리고 있다. 설악 사람들은 산 위에도 설(雪)이요, 산 아래에도 설(雪)이니 설설 길 수밖에 없구나. 어둡고 긴 겨울밤을 밝히기 위해 하늘의 별이란 별은 모조리 눈으로 변신하여 땅에 몰래 떨어지나 보다. 어지럽게 내려와 조용히 자리 잡는 눈의 모습은 인자(仁者)의 거동을 닮아서 속인(俗人)의 발을 묶을지라도 나무랄 수가 없다.

  음악회의 끝자락엔 무릎까지 차던 눈이 자고 일어나니 허리에까지 차올랐다. 통일을 기원하는 뜻에서 만든 청동대불은 하얀 파카를 두툼하게 걸치고, 내리는 눈을 열반의 경지에서 바라보며 조국의 복된 앞날을 기원하고 있는 듯하다.

  어렵사리 좁은 눈 통로를 지나 지친 몸으로 옹달샘 커피숍에 올랐다. 에티오피아의 커피로 몸을 녹이고 러시아 농부의 노동요로 귀를 씻으니 마음이 누그러진다. 주인은 맥주 두 상자를 거침없이 내놓는다. 장사를 포기하고 철학을 선택했나 보다.

  설악의 눈은 또 그렇게 내리고, 사람의 마음을 적신다. 설악의 눈은 밤이 이슥하도록 뒤풀이 자리에도 떠날 줄 모른다. 설악의 눈은 잠도 없나 보다. 수루룩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