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보기나 했어
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추모작품전에 붙여
도정 권상호
라이브 서예는 때와 곳을 가리지 않는다. 선행 조건은 쓰고 싶은 글귀가 있어야 하고, 또 하나 중요한 것으로 붓 설렘이랄까, 붓 떨림이랄까, 붓 목마름이랄까, 붓 끌림이랄까, 아니면 붓 꼴림이랄까? 하여간 잘 생긴 붓을 부여잡고 하얀 천이나 종이 위에 농탕(弄蕩)질이라도 치고 싶은 생각이 가슴을 뜨겁게 달구어야 제격이다.
붓도 계절을 타는가 보다. 봄이면 산새들이 춘기(春氣)를 이기지 못하여 더욱 요란하듯이 붓 또한 얼음 녹아 흐르는 맑은 봄물에 샤워하고 충일(充溢)한 먹물을 흐드러지게 쏟고 싶은 때가 있다. 허얼.
때마침, 울산 현대미술관에서 초대전 참가 및 라이브 서예 요청이 왔다. 고(故) 아산(峨山) 정주영(鄭周永, 1915.11.25~2001.3.21) 현대 명예회장 10주기 추모작품전에 초대한다는 것과 이왕이면 개막식 때 라이브 서예도 한판 벌이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당연히 시원하게 승낙했다.
평소 ‘해 보기나 했어?’라는 한 마디로 내 감정을 들끓게 했던 정주영 왕회장님, 불우했던 시절에 희망을 잃지 않도록 우리 가슴에 불을 지피신 선생님, 일제에 타협하지 않고 순수한 용기와 의지를 자본으로 불멸의 업적을 남기신 경제인, 회장님의 향기에 내 영혼은 이미 춤추기 시작했다.
4월 1일 금요일, 일찌감치 인터넷으로 남행(南行) KTX 승차권을 예매했것다. 이른 아침부터 여행용 가방에 문방사우(文房四友)를 챙겼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한복 바지저고리 위에 짙은 남색의 두루마기도 걸쳤다. 가슴을 쫙 편 양반 자세로 긴 붓대를 잡고 의젓하게 길을 나서니 행인들의 아프지 않은 눈총을 맞을 만도 했다. 지하철을 벗어나 서울역에 오르는 순간, 한치구이와 참치김밥도 동행했다.
객실에 오르자 기차는 성큼 다가오는 봄의 품속으로 달려들었다. 봄과 대나무 및 소나무를 유난히 좋아했던 정주영 회장님을 생각하며 라이브 서예를 위한 시 한 수를 지어보는데, 제목은 추모작품전 제목이기도 한 ‘당신을 기억합니다.’로 잡았다.
당신은 바다이십니다.
자신을 낮추고 넓혀
세상을 온몸으로 받아들이시나니.
당신은 대나무이십니다.
자신을 죽죽 높이 세워
올곧은 의지를 보이시나니.
당신은 소나무이십니다.
늘 푸른 청년 정신으로
일생을 정진하셨나니.
당신은 촛불이십니다.
자신을 태워
이 나라에 희망의 빛을 드리우시나니.
당신은 소금이십니다.
자신을 녹여
이 세상에 살맛을 우려내시나니.
오, 당신은 배[舟]이십니다.
우리 모두를
태우고 가시나니.
정녕, 당신은 먹[墨]이십니다.
자신을 갈아
이 땅에 새 역사를 쓰시나니.
아산 정주영 회장님,
당신을 기억합니다.
축지법을 쓰지 않아도 서울역을 뒤로한 기차는 2시간 15분 후에 정확히 울산역에 도착했다. 울산(蔚山), 이곳엔 반구대 암각화가 있어 우리 겨레의 선사시대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다. 남쪽에서 고래와 싸우며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과 북쪽에서 호랑이와 싸우며 대륙을 넘어온 사람들이 매듭처럼 어울려 살아온 곳이 울산이다. 현재의 울산은 조국 근대화의 메카로서 한국 경제의 수도라고 할 수 있다.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던 제자 덕분에 다시 1시간을 달려 현대예술관(관장 윤석준)에 도착했다. 예술관 입구에는 ‘당신을 기억합니다 전(展)’이란 현수막이 펄럭이며 우리를 환영하고 있었다. 현대예술관은 고품격 공연장과 미술관, 레저와 스포츠시설 등을 갖추고 1998년에 복합문화센터로 문을 열었단다. 개관한 해에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고, 현대중공업의 지원에 따라 10년 동안 꾸준하게 메세나 사업을 펼쳐 온 결과 2007년에는 ‘한국메세나대상’까지 받았단다. 박수로다.
그리고 우리의 작품이 전시된 현대미술관은 몇 가지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2007년도에는 7주간의 ‘이탈리아 판화 400년 전(展)’에서 유료관객 2만 7천 명을 기록하여, 지방에서 한 전시로는 최다 관객을 기록했다는 후문이다. 궁금하던 차에 미로를 돌듯이 미술관을 슬쩍 둘러보고 참가자들끼리 인사와 더불어 다담(茶談)을 나눴다.
곧 이어 준비된 관광버스에 올라 세계 최대의 조선회사 현대중공업 관광이 시작되었다. 벽에는 아산 선생의 말씀이 쓰여 있어 눈길을 끈다.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되는 길이다.”
2만 5천 명의 사원들의 가슴에 일하는 기쁨은 자신의 보람이자 애국하는 길임을 말해주고 있다. 작은 어촌이 인구 110만의 거대 도시로 바뀐 것이나, 작은 백사장이 30여 년 만에 세계적인 조선기업으로 성장한 것은 아무래도 신화처럼 들린다.
그래, 한국의 발전 원동력은 울산이고, 울산 발전의 원동력은 현대중공업이다. 그 현대중공업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불세출의 경영인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이 아닌가. 엄청난 공장의 규모와 열정적으로 일하는 분들의 모습을 볼 때 당신의 육신은 돌아갔지만, 정신은 오롯이 살아있는 듯하다.
지난해 기준으로 수만 톤 급의 배를 3일에 한 척 정도를 만들고, 자동차는 3초에 한 대를 생산한다니 놀라운 일. 명예회장의 무한 긍정의 힘과 진취적인 기상이 돋보이는 순간이다.
드디어 전시회 개막식이다. 라이브 서예가 첫 순서이다. 명예회장을 기리는 시를 경건하게 낭송하고 나서, 붓을 곧추세우고 중앙 무대로 들고 나와 가슴을 뜨겁게 달군 다음, 힘찬 음악과 함께 용트림하는 바다, 배, 촛불 등을 역동적인 붓질로 춤추듯 그리고 나서 ‘당신을 존경합니다.’라고 몸을 날리며 휘호했다.
이어 당신의 말씀과 시낭송 및 가곡도 소개되었다.
“신용은 나무처럼 자라는 것이다.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바른 생각으로 성실하게 자신의 인생을 운영해 나가다 보면 신용은 저절로 싹이 터 자라기 시작해서 부쩍부쩍 크고 있을 것이다.”
몽돌해수욕장 옆 횟집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현대호텔에 돌아와 밤늦도록 참여 작가들과 어울려 덕담을 나누며 휘호를 즐겼다.
이튿날은 울산의 1호 공원, 역사가 숨 쉬는 신비의 공원, 대왕암공원 관광이다. 남한의 해금강이라 할 만큼 바람과 파도에 씻긴 바위가 선계(仙界)처럼 다가왔다. 곰솔 숲의 호위를 받으면서 공원을 둘러보는 맛도 별미이다. 봄을 연 길가의 동백은 꽃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마 수선화의 수수함에 밀리고, 진달래의 요염함에 기죽고, 개나리의 집단 공격에 상처받은 때문이리라.
권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