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브 서예도 마임이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 춘천마임축제 ‘미친 금요일 밤’ -
도정 권상호
8일간 이어진 소리 없는 몸짓의 향연 춘천마임축제. 15만 명의 ‘왁자지껄’. 물의 도시 춘천에 불의 신 ‘깨비’들이 나타났다. 개막식은 물의 난장 ‘아!水라장’, 폐막식은 불의 난장 ‘아!우다마리’. 그 사이에는 발광 난장 ‘미친 금요일’이 있었다.
아주 먼 옛날, 우주에 살던 깨비들이 여행 중 블랙홀에 뼈져 들어가 춘천의 공지천에 불시착하면서 ‘우다마리와 공지어 9999’ 신화는 시작된다. 깨비들은 이곳을 ‘우다마리’라 지명을 붙이니, ‘우주로 다시 돌아가는 마음으로 만나리.’라는 뜻이다. 깨비들은 지구촌에 흩어져 살다가 매년 5월 우다마리에 모인다. 그런데 물의 도시 춘천을 지키는 수호신 수신(水神)과 수신을 질투하는 화신(火神)들이 싸워 ‘아水라장’을 만든다.
깨비들은 공지천에 살고 있는 전설의 물고기인 ‘공지어 9999마리’를 만들어 불에 태우면 우주로 가는 길이 열린다는 믿음으로 매년 5월 말 춘천에서 만나 축제를 벌이게 되니, 이것이 바로 ‘춘천마임축제’이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로 손꼽히는 ‘미친 금요일’과 ‘도깨비 난장’은 우주 귀환을 앞둔 깨비들의 지구촌 마지막 파티. 미친 금요일의 행사 시작에 ‘라이브 서예’가 있다. 붓지랄을 기다리는 120미터의 기다란 카핏은 깨비들이 우주 귀향을 위하여 모여드는 길목이다. 발광하는 붓질을 통하여 방황하는 깨비들을 불러 모아야 하는 것이 나의 임무이다.
마임(mime)이란 팬터마임(pantomime)의 준말이다. 원래 연극 용어로서 몸짓과 표정으로 하는 연기를 말하며, 우리말로 ‘무언극(無言劇)’으로 번역할 수 있다. 마임은 본디 고대 그리스 및 로마에서 성행하였는데, 확성기(擴聲器)가 없던 시대이니 만큼 많은 군중에게 육성으로는 전달이 어려웠을 것이고, 따라서 몸짓과 표정으로 의사 전달을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라이브 서예도 몸으로 하는 퍼포먼스이다. 그래서 라이브 서예도 마임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몸이 붓이 되어 액션으로 글씨를 써 보이기 때문에 공연을 마치고 나면, 등산의 뒷자락처럼 온몸이 기분 좋은 땀으로 범벅이 된다.
성공적인 라이브 서예를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공연 또는 행사장을 미리 확인해야 하고(무대 넓이를 확인해야 천이나 종이의 크기가 나옴), 현장 조사를 마친 후에는 콘티를 짜야 하고(음악과 함께할 것인지, 무용과 함께할 것인지, 아니면 혼자서 보여줄 것인지, 멘트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함), 마지막으로는 리허설까지 해 보아야 실수가 없게 된다. 이 외에도 공연 시간, 배경 음악, 쓸 내용, 붓의 선택, 복장, 액션 등을 고려해야 한다. 새까만 먹물뿐만 아니라 주묵(朱墨) 등의 색깔의 사용 여부 - 이를 색서(色書)라 함 -도 결정해야 한다. 라이브 서예도 음악, 무용과 같이 공연 시간을 정확히 지키도록 힘써야 한다. 연주에 들어가기 전에 악기를 튜닝하듯이 붓 연주를 위해서는 문방사우의 조율(調律)도 필요하다. 붓을 미리 물에 축이고, 먹의 양과 농도를 맞추어야 하며, 종이나 천과의 조화 등도 미리 검토해야 한다.
이날의 라이브 서예 공연은 밤 10시에 시작이다. 캄캄한 밤에 운동장에는 몇몇 깨비들이 플래시를 들고 나타난다. 그 희미한 전깃불에 의지하며 깨비들을 유혹하는 붓질을 시작한다. 여기저기에서 깨비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수변공원과 어린이회관 사이에는 운동장이 있다. 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붓 마임이 펼쳐진다. 부지런한 도우미 깨비들이 낮에 깔아 놓은 기다란 천위에 밤이슬을 맞아가며 붓질은 계속된다. 때론 춤추기도 하고 때론 절규하기도 한다. 라이브 서예 중에도 주변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그야말로 도깨비 난장판이다.
이번 라이브는 글자 대신에 이미지로 승부를 걸었다. 세계인들이 동참하는 행사이고, 깨비들 간에 소통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글씨보다 그림을 선택했다. 떠가는 구름과 흐르는 물결, 작열하는 태양과 그 밑에서 솟구치는 산, 창공을 나는 새와 물속에서 유영하는 물고기, 무성하게 자란 솔숲과 그 사이를 달리는 동물 등을 다이내믹하게 그려 나갔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 깨비들도 그렸다. 깨비들의 특징은 빨간 뿔에 있다. 하늘을 나는 깨비, 물속에서 빠끔 얼굴을 내민 깨비 등등……. 긴 대막대기 위에도 붓을 꽂아 놓았으니 영락없이 도깨비처럼 출렁인다. 열정보다 감동적인 것은 없다. 땀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순간, 관객 깨비들도 분위기에 동화되어 붓방망이를 잡고 싶어 안달이다. 깨비들의 아부가 시작된다. 성공이다. 깨비들이 주는 생수와 음료수, 더러는 땀을 닦아 줌에 힘을 얻은 도정 도깨비. 그는 너다.
라이브 서예 후반부는 관객 깨비들과 함께하는 소원 쓰기 순서. 젊은이들의 소망은 ‘사랑과 결혼’, ‘합격과 취직’이 대세였고, ‘건강과 행복’은 가끔, ‘효도와 충성’은 전혀 없었다. 젊은이들의 생각이 우리가 젊었을 때와는 완연히 다르구나.
라이브 서예를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많은 외국인 깨비들이 머리 위에 뿔을 달고 나타났다. 축제 광장 중심에는 티베트의 산꼭대기처럼 화려한 깃발이 사방을 압도하듯 펄럭이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 시골 마을에서 보았던 곳집이나 성황당처럼 귀신이 금방이라도 나올 듯하다.
마임광장은 여전히 카오스 상태. 밤을 잊은 마임축제는 빅뱅처럼 여기저기서 폭발과 뭉침을 반복하지만 무언의 우주 질서를 만드는 것은 역시 깨비들이었다. 무박 72시간의 대장정 페스티벌, 지명(知命)을 넘은 나이라 밤샘은 못하고 새벽 3시쯤 객실로 돌아왔지만 한참 잠을 이루지 못했다.
별자리와 신화를 들려주는 ‘별 아저씨의 별 이야기’, 신비로운 ‘자궁방 & 콘돔아트 갤러리’, 상여 속에서의 저승 체험, 무선헤드셋과 함께 하는 야외 ‘사일런트 디스코’ 등 다양한 체험이 슬라이드처럼 뇌리를 스친다.
창문을 열고 의암호 호수바람으로 놀란 가슴을 다시 쓸어내린다. 광란(狂亂)의 뒤에 오는 이 카타르시스, 이를 평화(平和)라 하는가.
Young Mime Festival for Pe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