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질, 그 영적(靈的) 오르가슴
도정 권상호
나는 하나의 몸뚱이일 뿐이다. 그럼에도 여러 몸을 흠모한다. 명강사도 되고 싶고, 의사도 되고 싶고, 변호사도 되고 싶고, 성직자도 되고 싶고, 과학자도, 철학자, 요리사, 음악가, 시인도 되고 싶다. 더러는 철학 하는 거지로, 대의를 위한 감옥 속에서, 죽음을 체험하고 싶은 관 속에서도 살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 몸은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인(人)으로 살 것이 아니라, 인간(人間)으로 살아가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인간 사회의 다양성 속에서 개성적 자아로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 화단 속의 장미는 장미일 뿐이고, 화단 밖의 잔디는 잔디일 뿐이지, 장미가 잔디 될 수 없고, 잔디가 장미 될 수는 없다. 그냥 둘은 각각의 개성으로 살아갈 뿐이다. 잔디는 잔디의 속성으로. 장미는 장미 고유의 속성으로…….
인간이 만든 옷, 집, 자동차, 젓가락 등은 똑같은 것이 무수히 많지만, 무릇 자연이 만든 것은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산의 높이, 강의 흐름, 나무의 키, 손발 가락의 길이 등 어느 것 하나 똑같은 것이 없다. 이것은 자연의 화이부동(和而不同)이렷다.
사람의 직업도 자연처럼 동일한 것이 없이 오가지잡탱이어야 다양성의 사회, 신명 나고 활기찬 사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너는 너답고, 나는 나답고……. 직업이 거지일지라도 스스로 선택한 거지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때 행복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
그러나 세상은 신분적, 경제적 차이 등으로 인한 많은 갈등을 빚고 있다. 그것은 높은 지위나 돈 많은 부자를 행(幸)이나 선(善)으로 보고, 낮은 지위나 가난을 불행(不幸)이나 악(惡)으로 보는 이상 갈등과 싸움은 그치질 않는다. 이에 대한 대안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된 말로서,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프랑스어로 ‘Noblesse oblige’로 적으며 ‘The nobly born must nobly do.’로 풀이하고 있다.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 다. 쉽게 말해 ‘이름 값, 지위 값’을 하라는 말이렷다.
나는 붓질하는 먹탱이이다. 먹탱이는 철저하게 먹탱이일 뿐이다. 이렇게 믿을 때, 주변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먹탱이가 화려한 춤꾼을 갈망하거나, 재기 발랄한 사업가를 꿈꿔서는 안 된다. 먹탱이가 춤꾼이나 사업가를 넘겨다보면 그쪽 상대방으로부터 미움과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렇다면 먹탱이끼리도 서로 암투하고 밥그릇 싸움을 할 수 있지 않은가. 맞는 말이다. 방법은 있다. 먹탱이 중에서도 나만의 개성을 지닌 차별화된 먹탱이가 되면 되는 것이다. 이를 개성(個性)이라 하것다. 개성이 없는 사회는 인간사막(人間沙漠)과 다름없다.
그런데 먹탱이로서 춤꾼이나 사업가가 되는 방법이 있다. 그와 친하여지면 된다. 인간 대 인간의 MOU 체결이라고나 할까. 이것이 사람을 얻는 방법이요, 더불어 잘 사는 법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웃기는 얘기지만, 내가 즐겨 쓰는 말이 있다. ‘마음을 얻으면 몸은 덤이다.’
어떡하면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만물에 물이 스미듯 다가가면 된다. 사과의 86%, 배추의 95%가 물이지만 사람들은 사과와 배추를 보고 물이라 하지 않는다. 인간도 따지고 보면 3분의 2가 물이다. 그럼에도 물탱이라 하지 않고, 인간이라고 한다. 물의 흐름이 있는 곳은 어디나 상생(相生)이다.
바람처럼 다가가도 된다. 공기의 이동인 바람은 형체조차 없으면서도 산소를 공급해 준다. 빛처럼 다가가도 된다. 햇살도 태양의 화살이지만 아무리 내리꽂혀도 아프지 않게 생명을 준다. 물과 바람은 끊임없이 이동하기 때문에 썩지 않는다. 운동(運動)이라고 할 때의 ‘運(돌 운)’과 ‘動(움직일 동)’이란 두 글자를 보면, 군인[軍(군사 군)]은 주변을 계속 돌아야 하고, 무겁고 소중한 것[重(무거울 중, 소중할 중)]일수록 힘차게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지구도 우주도 잠시도 쉬지 않고 운동을 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도 움직이지 않으면 썩는다. 그래서 우리는 열정적 사랑과 훈훈한 우정을 나눈다. 가족 간, 사제간에도 마음이 오가지 않으면 썩는다. ‘왕따’ ‘찐따’ ‘밟따’여, 안녕. 우리가 밟은 것은 미운 사람이 아니라 ‘대지(大地)’이다. 아무리 짓밟아도 한 번도 짜증내는 일이 없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겸허하게 낮추며, 우리에게 먹을 것, 입을 것, 지을 곳을 제공하는 대지. 우리가 땅이라 이름 지어 주었지만 단 한 번도 땅땅거리는 일조차 없었다. 마치 내게 주기만 했지 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어머니와 같이……. 어머니란 이름으로 대변되기도 하는 대지는 관용(寬容)의 화신이다.
자, 여기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 있다. 감동을 주는 사람이어도 좋고, 좋아하는 사람이어도 좋고, 존경하는 사람이어도 좋고,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어도 좋다. 그 사람을 닮고 싶다. 하지만 그는 그일 뿐 결코 나는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닮고 싶고, 따르고 싶고,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아서라. 당장 포기하라. 절대 똑같은 사람이 될 수 없으니. 그건 자연이 탄생시킨 만물의 속성과 같다.
그럼에도 원한다면, 그 사람이 되는 방법이 있다. 벌이나 나비가 꽃에 다가가듯이 그에게 웃으며 다가가자. 그리고 정직한 나의 모습과 내 마음 꼴을 그대로 보여 준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과 자태를 경건히 바라본다. 조심스레 그의 이름과 별명을 여쭙고 또렷이 기억한다. 나중에는 생각과 취미, 하는 일 등을 물어본다. 그러면 내가 잘하는 일과, 그가 잘하는 일이 따로 있으리라. 벌, 나비와 꽃의 관계처럼 분명히 아름답게 주고받을 것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가 되고, 그가 내가 되는 이치리다.
오늘도 나는 붓질을 한다. 붓질만 하면 된다. 붓을 통하여 먹을 울리니 먹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손가락으로 쓰다가, 팔로, 이어서 다시 가슴으로 쓰는 글씨. 먹물이 무언(無言)의, 그러나 심장이 포효하듯 큰소리로, 아무도 건드린 적 없는 처녀지를 파고들면 내 영혼은 뜨겁고 숨차게 전율한다. 이른바 붓질의 영적(靈的) 오르가슴(orgasm)이다. 오르가슴이란 말은 마치 순우리말 같다. 벅찬 희열이 가슴에 차오르기 때문이다. 붓질의 느낌에서 오는 오르가슴이므로 ‘필르가슴(feelgasm)'이란 단어를 만들어 본다.
붓길은 인생길과 마찬가지로 일회성이다. 그러기에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 그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