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처럼 향기처럼 흔적 없이 다가가리
도정 권상호
댓잎에 바람 일고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할 철이다. 그런데 어느 해보다 심한 가뭄으로 온 누리가 타들어 갔다.
속절없이 흐르는 절후는 하지(夏至)를 지나 소서(小暑)를 향해 달리고 있다. 더위가 심할수록 대와 친해지고 싶은 계절이다. 방바닥에는 카펫 대신에 대자리를 깔고, 잠을 잘 때는 죽부인(竹夫人)을 안고 자며, 이따금 합죽선(合竹扇)이라도 펼치면 친환경적 여름나기로는 제격이리라.
대는 볏과 식물에 해당한다. 벼는 물론 옥수수, 보리, 밀, 갈대 등도 볏과 식물에 속한다. 볏과 식물은 생명력이 강하여 우리가 선호하지만, 무엇보다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곡류가 많아 인기 최고이다. 특히 대는 줄기가 목질화(木質化)되고 마디가 튼튼하며, 살아갈수록 속을 비움으로써 생명을 연장한다. 그리하여 비록 식물이지만 군자가 본받을 덕성(德性)이 많아 일찍이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부르고, 또 많은 문인묵객(文人墨客)의 입과 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데 대는 풀인가 나무인가. 이 논란은 오랫동안 이어왔다. 줄기가 딱딱하고 키가 크기 때문에 나무처럼 보여 흔히 ‘대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대는 풀이다. 대가 나무라면 나이테가 생기고 줄기가 두터워져야 하는데 대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대는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큰 풀이라 할 수 있겠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도 연시조 오우가(五友歌)에서 대가 나무인지 풀인지 궁금해하고 있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는다.
저러고 사시(四時)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키가 크고 단단한 걸로 보면 분명 나무인데, 식물도감에 의하면 상록성 여러해살이풀로 규정하고 있다. 키가 큰 왕대만을 대나무라고 일컫는 때도 있지만, ‘대’에다 ‘나무’라는 말을 덧붙이지 말고 그냥 ‘대’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삿대’, ‘장대’, ‘솟대’, ‘바지랑대’ 등의 예에서 보면 ‘대’는 ‘긴 나무 막대기’를 가리키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의 ‘-대’도 모두 ‘대’에서 왔다고 봐야 한다.
왕대는 높이가 30m, 지름이 30cm나 되는 것도 있다. 모든 대는 줄기가 꼿꼿하고 둥글며 속은 비어 있다. 죽절(竹節)은 해를 더할수록 단단해지고, 죽순(竹筍)은 땅속줄기의 마디에서 그야말로 ‘우후죽순(雨後竹筍)’ 돋아나며 식용으로 더없이 좋다. 잎은 좁고 길며 녹색(綠色)이다. 습기가 많은 땅을 좋아하고 생장이 대단히 빠르다. 우리나라에서는 왕대, 솜대(분죽), 오죽(烏竹), 조릿대(신우대) 등이 흔하고 중부 이남과 제주도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대는 실용(實用)과 식용(食用)은 물론 허심(虛心)과 견절(堅節)만으로도 우리의 사랑을 받을 만하다.
/대/라는 발음은 /다이/에서 왔고, 이는 옛날 중국 남방의 명칭 /덱/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일본말로 /다케/라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자로는 ‘죽(竹)’으로 쓰는데, 이는 줄기와 댓잎의 모양을 상형한 것이다.
순우리말 ‘죽죽’이란 부사어는 한자어 ‘죽죽(竹竹)’에서 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식물 죽(竹)은 땅에서 위로 죽죽 뻗으며 올라가지만, 음식 죽(粥)은 입에서 목줄기를 따라 거침없이 ‘죽죽’ 내려간다. ‘죽죽’은 ‘쑥쑥’과도 상통한다. 봄날 쑥이 쑥쑥 돋아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대는 속이 비었기 때문에, 탈 때에 공기의 팽창으로 요란한 소리를 낸다. 그리하여 선조는 정초(正初)에 사람 왕래가 드문 새벽에 문밖에서 대를 태워 잡귀(雜鬼)를 쫓곤 했다. 잡귀가 이 요란한 소리를 듣고 놀라서 도망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잡귀를 쫓고 복을 부르는, 이른바 ‘축귀초복(逐鬼招福)’의 전통 풍습이 우리에게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중국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설날에 해당하는 춘절(春節)로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실로 시끌벅적한 폭죽놀이를 한다. 그들은 아직 폭죽 행위가 귀신을 쫓고 평안을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폭죽(爆竹)’의 중국 발음은 ‘축복을 알린다’는 뜻의 ‘보축(報祝)’의 발음과 흡사하다.
오늘의 퀴즈...
‘방(房) 안에서 새가 날갯짓하는 글자가 뭘까요?’
‘戶(지게 호)에 羽(깃 우) 자를 쓴 扇(부채 선)’.
‘왜, /선/이라 발음할까요?’
‘부채로 부치면 선선하니까.’^^
우리말 ‘부채’는 ‘(바람이) 부는[吹)] 채> 불채 > 부채’로 분석이 가능하다. 부채를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는 동사는 ‘부치다’이다.
여름이면 방안에서 새처럼 날갯짓하며 선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부채에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 부채는 가볍고 멋있게 생겨 품위 있게 가지고 다니기에 좋고, 가격에 큰 부담이 없으며, 경제가 어려운 때에 에어컨과 선풍기를 대신하면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가 있다. 부채의 으뜸 멋은 대와 종이의 결혼에 있다. 당연히 신랑은 대요, 신부는 종이이다. 가끔 종이 대신에 비단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견오백 지천년(絹五百 紙千年)’이란 말처럼, 비단은 수명이 반천년 가지만 종이는 온천년이나 간다고 하니, 그놈의 결혼 한번 길기도 하다. 매일 바람을 피워도 떨어질 줄 모르는 ‘지죽열애(紙竹熱愛)’여!
紙與竹相婚(지여죽 상혼)
生其子淸風(생기자 청풍)
종이와 대가 서로 혼인을 하여
그 자식을 낳으니 청풍이로다.
부채의 버금 멋은 직선과 곡선의 절묘한 조화이다. 둥글부채든 쥘부채든 모두 직선의 대에 곡선의 종이가 어울려 만들어진다. 둥글부채를 단선(團扇) 또는 방구부채, 쥘부채는 접선(摺扇) 또는 접이부채라고도 한다.
개인적인 부채의 딸림 멋은 부채에 대를 치는 일이다. 지면이 우툴두툴하여 부채만의 질감이 있어서 더욱 좋다. 부채에 대 그림이 무엇보다 잘 어울리는 이유는, ‘대’ 하면 자연스럽게 ‘바람’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종이의 치마폭에 묻혀 지내는 대에 활기(活氣)를 불어넣는 일이기도 하다.
유럽발 불경기가 세계로 번지고 있다. 가뭄에다가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늘어나는 부채(負債)를 날려버리기 위해서도 부채질이 필요하다. 요새 세상에는 위로 임금이 안 계시니 단오선(端午扇)을 하사받을 일도 없다. 어려운 이웃에게 부채나 선물해야겠다. 그리하여 바람처럼 향기처럼 흔적 없이 그대에게 다가가고 싶다.
* 부채 작품 내용
마음 속 새 한 마리
바람처럼 다가가리.
바람 불어 좋은 날.
바람처럼 향기처럼 흔적 없이 다가가리.
綠風(녹풍) 녹색 바람.
淸風至心(청풍지심) 맑은 바람이 마음에 이른다.
扇風至遠(선풍지원) 부채 바람이 멀리 이른다.
淸風至遠堅節聳立(청풍지원 견절용립) 맑은 바람이 멀리 가고 굳은 마디 우뚝 섰다.
時間許多不要急(시간허다불요급) 시간이 많으니 급할 일 없다.
淸風徐來月自笑(청풍서래월자소) 청풍이 천천히 불어오니 달이 절로 미소 짓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