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中國 紀行
塗丁 權相浩
1. 출발
1.1. 1995년 12월 30일 토요일, 한 해가 저물고 한 달이 다 가고 한 주일이 끝나 가는 때에 중국을 7박 8일간 방문하게 되니, 중국식으로 과장하여 말하자면 실로 '2년에 걸친 대장정'이요, 한국식으로 소박하게 말하자면 '유종의 미'와 '새로운 시작'이다.
1.2. 새벽 6시에 일어나 입을 것과 간식으로 먹을 것을 준비하고 30분에 집을 나섰다. 영하 8도의 제법 쌀쌀한 날씨였다. 지하철을 타고 시청역에 도착, 다시 공항버스를 타고 8시에 김포 국제공항 2호 청사에 도착했다. 공항버스 안에서 우리 부부의 대화를 듣고 상해에 보낼 서류를 부탁하는 분이 있었다. 귀가 보배로구나. 국내에서 송출인이 가장 많다는 온누리여행사에서 가방을 하나씩 나누어주고 이어 출국 수속을 밟았다. 여행사 가이드는 20대 후반의 최윤근씨다. 9시 40분발의 아시아나 항공, 中國民港의 服務員이 타고 있어서 사연을 물은 즉 두 회사가 서로 교류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는 스튜어디스, 웨이터, 웨이트리스, 보이 등을 모두 ‘服務員[푸우웬]’이라고 부른다. 비행기는 구름을 박차고 나가 지상 9천여 미터 상공, 바깥 공기 온도는 영하 40여 도, 항속은 시속 800여 킬로미터, 항로는 남으로 제주도 상공을 거쳐 남서쪽으로 상해를 향하여 방향을 돌렸다. 2시간도 채 지나지도 않아서 이미 상해 도착의 기내 방송이 있었다. 창공에서 내려다 본 상해 주변은 드넓은 평야에 물길이 이리저리 나 있고, 비슷한 모양의 회색 이층집만이 듬성듬성 눈에 띄고, 산이 보이지 않으니 나무가 적고, 논밭은 많되 겨울이라 사람 또한 보이지 않았다. 중국의 시차에 따라 시계를 한 시간 늦추니 우선은 한 시간을 번 샘이다. 태양을 따라 줄곧 서쪽으로 날아간다면 시간을 멈출 수도 있을 것을.
2. 上海
2.1. 상해 虹橋空港(홍교공항)에 착륙했다. 홍교란 무지개다리란 뜻인데, 공항 이름 한번 잘 지었구나. 공항 앞에는 또 虹橋大酒店(홍교대주점), 곧 홍교호텔이 있었다. 여기가 중국 땅이구나. 인구 1200만 명의 대도시 상해. 공항에서 대기 중인 관광버스를 타니 현지 가이드의 인사가 있고, 버스는 상해 시내를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간판의 모필 글씨는 한자의 복잡한 획을 줄이거나 생략하여 사용하고 있는 簡字體(간자체)로 쓰지 않고 주로 行書로 어찌나 멋들어지게 썼는지 메모지에 볼펜으로나마 臨書(임서)하기에 여념이 없다. 여기가 중국이구나. 여기가 서예의 본고장이구나. 간판 글씨에 넋을 잃고 있는 순간 버스는 어느덧 식당에 당도했다.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벽에 두루 걸린 書畵 작품이다. 朱熹(주희)의 勸學文을 비롯한 수십 품의 글씨와 그림이 손님을 반가이 맞이하고 있었다. 중국에서의 첫 식사는 칭기즈칸 요리였다. 출발에 앞서 3일간 열심히 복습한 중국어 실력을 발휘해 볼 깜냥으로 만나는 중국인마다 인사를 나누고, 먹어 보지 못한 요리들의 이름을 물어 보았다. 식당 아가씨의 안내로 평소에 맛보기 힘든 양고기[羊肉,양러우], 사슴고기[鹿肉,루러우]에 집중했다. 서비스를 잘 받고 나서는 선물로 가지고 온 모나미 볼펜을 그때마다 하나씩 주었다.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것을 골라서 주방에 갖다 주면, 방패를 뒤집어 놓은 듯한 넓은 철판에 부어 순식간에 볶는다. 다 익은 음식을 주걱으로 날려서 단번에 접시에 담는 모습이 일품이다. 중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은 어딜 가나, 이빨이 빠지지 않은 그릇은 찾기 힘들고, 재래종 과일은 맛보기 쉬웠다. 예상대로 기름기가 많아 먹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지만 여행의 참맛이란 서로 말이 다른 사람들과 마주하고, 또 그들의 경이로운 의식주와 접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던가.
입을 즐겁게 했으니, 다음 코스는 분명 눈요기 공장 견학이었다. 국가 경영의 옥, 비취 공장이라지만 폐허 직전의 시골 국민학교 건물 같았다. 우리가 점심을 먹은 곳도 사실 이 공장의 직원식당이었다. 수천만 원 호가하는 화려한 보석장식품들, 나에겐 그리 관심거리가 못된다. 차 한 잔 마시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거리엔 어디나 자전거 물결,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고, 횡단보도에는 사람을 위한 신호등이 없어서 대충 차량의 흐름을 보고 건너면 그만이다.
2.2. 첫 방문지는 상해 大韓民國臨時政府(1926~1932) 유적지이다. 식민지 시절의 우리 민족의 애환의 단면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 중국인들도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지내다가 돈벌이 직장이 마련되었으니 신경을 쓰는 듯하다. 김구 선생의 흉상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집무실과 침실을 둘러보고 나왔다. 기념품 판매는 기금으로 사용한다 하여, 동양화 물감인 棒彩(봉채) 한 통을 중국 돈 40원에 샀다. 첫 쇼핑이다. 중국 돈을 흔히 人民幣(인민폐), 곧 ‘런민삐’라고 한다. 인민폐 40원은 한국 돈으로 약 4000원에 해당된다. 물건을 살 때 가격표에 동그라미 두 개만 붙이면 한국 돈으로 가격을 짐작할 수 있으니까 이해하기 쉽다.
白凡 金九 선생의 친필인 ‘良心建國’과 ‘獨立精神’의 두 현판을 통하여 선조들의 애국정신과 독립 투쟁의 의지를 엿볼 수 있고, 石吾 이동녕 선생의 친필 ‘光明’은 그대로 우리 민족의 광명을 예언이라도 하듯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臥室에는 島山 安昌浩 선생의 ‘愛己愛他’와 安重根 의사의 ‘第一江山’도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퇴색해 버린 몇 장의 사진에서 그 당시 나라 형편의 어려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2.3. 복잡한 상해의 찬란한 진주인 豫園(예원)을 향하여 차는 달렸다. 예원은 명나라 후기 1559년~1577년에 걸쳐 지어진 거금 4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정원으로 중국 중요 문화재이다. 산이라곤 볼 수 없는 상해 땅에다 동산을 만들고 그 속에 태허 지방의 돌을 옮겨와 돌산을 만들었다. 시멘트가 없어서 찹쌀과 진흙 및 쌀뜨물을 섞어서 본드를 만들고 그것으로 돌을 붙여 12미터의 돌산을 만들었다고 한다. 만들던 당시에는 상해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다나? 이곳 예원이 명대에는 한 개인의 화원이었다 한다. 동산 안에는 點春堂(점춘당), 大假山(대가산), 원대에 만들어졌다는 거대한 鐵獅子(철사자), 玉玲瓏(옥령롱), 인조 돌산 위에 덩그렇게 지어진 유쾌한 놀이를 위한 快樓(쾌루), 內園靜觀大廳(내원정관대청), 옛날의 놀이 무대였던 古戱臺(고희대), 等亭臺, 樓閣, 假山, 池塘, 추녀가 하늘 쪽으로 치솟아 비를 몰아내는 卷雨樓(권우루), 헤엄치는 물고기를 감상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인 魚樂榭(어락사), 물 위에 지어진 九獅軒(구사헌) 등 30여 곳에 고대 건축물이 있다. 이곳은 明, 淸 兩代의 남방 건축 예술의 풍격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중국 사람들의 예술 감각과 자연을 다루는 지혜의 결정체를 보는 듯하였다.
점춘당은 1853년 태평천국의난 때에 상해 북부군 지휘소로서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장소이다. 점춘당 안에 점춘당이란 커다란 행서 현판이 있고, 그 밑에는 시원한 신선도, 그 좌우에는 五言 행서 對聯(대련) 작품이 호위하고 있고, 또 그 양편에 열두 폭의 족자가 그림과 글씨가 번갈아 가며 드리워져 있다. 일일이 감상할 시간이 없어 사진만 찍고 나서야 하는 아쉬움. 이백이 술에 취한 모습의 그림인 李白醉酒圖(이백취주도), 郭沫若(곽말약)의 친필. 정자의 창문과 의자의 정교한 조각, 강시가 따라오지 못하게 호수 위에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놓은 九曲橋(구곡교), 호수 한가운데의 湖心亭(호심정), 三穗堂(삼수당)은 현판 위에 靈臺經(영대경), 城市山 등의 두 개의 현판을 더 걸고도 천정은 높기만 하였다. 여지없이 용을 흉내낸 담인 龍墻(용장). 그 용의 꼬리 부분을 대숲이 덮고 있어서 보기에는 마치 한 마리 거대한 용이 예원의 우물에 살다가 대숲을 뚫고 승천하는 모양이었다. 이상하게도 용의 발가락이 모두 셋 또는 네 개였다. 알고보니 황제가 되고픈 미련을 벗지 못한 어느 신하가 낙향하여 지은 동산이라고 하는데, 황제의 용은 발가락이 다섯이므로 똑같이 할 수는 없었다 했다. 황제에 대한 예의일까 아니면 황제가 되고 싶은 야망에서 일까?
2.4. 다음 관광 코스는 상해의 북서쪽에 위치한 玉佛寺. 패션 거리를 지난다. 마네킹은 많았다. 어느 곳에서도 어울리지 않던 20대의 미니스커트 가이드가 여기에서는 어울렸다. 어드덧 차는 옥불사에 도착하였다. 미얀마에서 들여온 옥으로 만든 최대의 부처가 있다고 하여, 옥불사라 칭하였다고 한다. 사찰에 들어서자 향이 허공을 진동하고 많은 신도들이 절하기에 여념이 없으며, 법당 주위에는 온통 만장으로 휘감겨져 있어서 사연을 물은 즉 상해에서도 이름난 이곳 주지 스님이 열반하셨다는 소식이다. 법당 앞에는 ‘沈痛眞禪 大和尙 圓寂(침통 진선 대화상 원적)’이란 조문이 커다란 붓글씨로 씌어져 있는데 마치 먹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 하였다. 진선 큰스님께서 열반하심을 침통해 한다는 뜻이렷다. 大雄寶殿(대웅보전) 기둥에는 ‘佛道崇虛(불도숭허)’, ‘法壽無量(법수무량)’등의 현판 글씨가 돋보였다. 들어가서 옥돌로 조각한 아름답고도 자상한 옥돌부처를 보았다. 예술성도 뛰어나거니와 이 지구라는 땅 속에 저렇게 아름다운 돌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2.5. 다음 방문은 상해에서 가장 古色蒼然한 거리 外灘(외탄)과 黃浦公園(황포공원). 외탄 길가엔 근대사에 있어서 중국에 영향을 끼쳤던 많은 서구 열강 및 일제가 지어 놓은 다양한 건축 양식의 건물들이 즐비하여 중국 속에 중국이 아닌 곳이 바로 여기 외탄이로구나. 석양과 함께 어우러져 큰 배가 뒤척이는 황포강의 정경. 이 강언덕에서 일출시에 우슈와 산책을 즐기며 상해 사람들의 하루가 시작되겠구나 싶었다. 강 건너 浦東 항구가 보이고, 거기엔 아령 모양의 세계 最高의 텔레비전 탑이 상승감 있는 몇몇 빌딩들과 함께 거의 완공 단계에 있었다. 높이가 460미터라던가.
2.6. 상해 외탄 구경을 마치고 상해역에 도착하여 남은 시간은 우의상점에 들러 중국 공산품을 둘러보았다. 듣던 대로 중국에서는 일차산업의 상품 외에는 구매욕을 당길 만한 것이 없었다. 외제는 주로 일제였는데 그래도 사는 사람이 있는 가 보다. 빈부차가 심하다 하던데 돈 많은 사람이 사겠지.
3. 蘇州
3.1. 저녁에는 7시 50분 상해역 출발 소주 행 기차를 탔다. 차 속에서 일본인 여행객과 자리를 같이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78세의 일본 할머니의 여행 건강을 생각하니 돌아가신 어머님이 안타까웠다. 35세의 젊은이 구리다 산고[栗田三五]는 마이니찌 신문 여행사 소속 가이드였다. 그는 연중 30일 정도는 중국에서 몇 달은 유럽에서 보낸다고 했다. 지금 이 시간에 서울이 아닌 상해를 누비고 소주를 향하여 외국인들과 더불어 기차 속에서 대화를 나누며 가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진작 좀 해외 구경 시켜 줄 걸. 하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았으니 어쩌리. 소주 호텔에 체크인하고 휴식을 취했다. 호텔 안뜰의 분수는 손님을 환영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뿜어대고 있었다. 욕탕 물이 뿌연 것을 보니 물은 많되 좋은 물이 적음을 알 수 있었다. 錦繡江山 우리 국토에 대한 고마움 마음을 다시금 실감했다. 보존에 더욱 마음 써야지.
3.2. 12월 31일. 1995년의 마지막 날이다. 87만의 인구를 가진 비교적 작은 도시 소주, 빼어난 아름다운 江南, 곧 양쯔강의 남쪽의 유명한 성 소주, 정성들인 우아한 정원이 많아 천하의 문인묵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소주. 육로와 수로가 발달되었고, 연중 온화한 기후. 과거 왕조 시대에 높은 벼슬아치나 돈 많은 사람들이 정년 퇴임 후나 여생을 보낼 곳으로 이곳을 선택하고 개인 정원을 지었다. 소주에는 明, 淸 양조에 걸쳐 280여 개의 개인 정원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대부분이 아직도 잘 보존되어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유명한 정원이라면 송대의 滄浪亭(창랑정), 網師園(망사원), 원대의 獅子林(사자림), 명대의 拙政園(졸정원), 藝圃(예포), 청대의 留園(유원), 耦園(우원), 怡園(이원) 등이 있고, 그 중에 졸정원, 유원이 그 정미하고 탁월한 조경 예술로 말미암아 북경의 이화원, 승덕피서산장과 더불어 중국의 4대 名園으로 꼽히고 있다.
3.3. 우리가 둘러본 곳은 拙政園이다. 초기 당나라 시인 陸龜蒙(육구몽)의 주택으로, 원대에는 大宏寺(대굉사)라는 사찰로 되었다가, 명대에 이르러 御使인 王獻臣(왕헌신)이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이 절을 사 가지고 다시 정원으로 고쳤다. 그리고 晉나라의 潘岳(반악)의 ‘閑居賦(한거부)’ 중의 ‘灌園鬻蔬 是亦拙者之爲政也(관원죽소 역시졸자지위정야)’에서 ‘拙政’의 두 글자를 따와서 졸정원이라 이름하였다. 졸정원은 짓는데 16년이나 걸렸고, 명나라 때 유명한 서예가이자 화가인 文徵明(문징명)은 원내의 玉蘭堂을 書齋로서 삼고 서예와 그림의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졸정원은 수면이 약 5분의 3을 점유하고 대개의 건물은 물에 임하였고, 園林 전체는 東, 中, 西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동부는 蘭雪堂, 天泉亭, 放眼亭, 秋香館 등이 있고, 중부에는 연못, 山石, 수목 등으로 山水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이러한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 遠香堂이 있다. 서부의 중심은 鴛鴦廳(원앙청)이고, 이 오른쪽에 西宜亭, 왼쪽에 留聽閣이 있다. 이것들은 청조 말기 태평천국의 忠王府 시대의 유물이다. 졸정원은 강남 자연의 풍물을 공교하게 취했던 전형적인 원림이다. 현재 일부는 소주박물관으로서 사용하고 있다.
졸정원에 들어서자 멀리 드높이 솟아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며 어렴풋이 드러나는 북탑의 모습은 아직도 꿈속의 선녀처럼 눈에 선연하다. 태허 지방에서 가지고 온 구멍이 많은 돌, 곧 태허석과 연못이 음양 오행에 맞게 꾸며졌으며, 학처럼 깃을 올린 정자와 400년 정도 된 모과나무, 향이 정원 전체를 감싸고도는 향사나무, 그리고 수백 년 된 분재와 꼬불꼬불한 길, 잘 다듬은 산책로, 그 복잡하고도 미묘한 정원 설계는 속세를 잊고 선계에 들어온 듯하였다. 보기엔 그림이요, 느끼기엔 시였다. 곳곳에 편액 현판과 대련, 비에 새긴 시문, 역대의 명화가 골고루 비치되어 있었다. 특히 문징명의 현판과 글씨를 대할 때에는 그의 붓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어떤 정자는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사계를 느끼도록 설계되었고, 어떤 정자는 빗소리를 감상하기 위하여 지어졌다. 소주는 눈이 귀한 곳이라 설경으로 착각되는 파랑 색의 특수 유리를 사용하여 창을 장식을 한 곳도 있었다. 과연 소주는 중국 전통 문화의 심후 온화한 맛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사계가 뚜렷하지 않기에 망정이지 삼천리 화려강산이 하마터면 기죽을 뻔 하였것다.
3.4. 이어진 코스는 원대의 獅子林이다. 소주 4대 古名園 중의 하나이다. 사자림의 기원은 원나라 至正2년(1342), 千如禪師가 스승인 中峰禪師를 기념하여 세운 菩提正宗寺(보리정종사)로, 후에 이름을 獅林寺로 바꾸었다. 사자림은 이 절의 배후에 있는 화원을 가리킨다. 명․청 이래로 여러 번 흥망성쇠를 거쳐 貝氏라는 사람의 개인 동산이 되었다가, 1925년 전후로 중수되어 금일에 이르게 되었다. 태허석으로 쌓아 놓은 산이 특히 유명하다. 마치 구멍을 통과하는 듯한 문과 구불구불한 길이 미로 게임을 하는 듯하면서도 경관이 뛰어나 ‘桃園十八景’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동산 안에는 동남쪽은 산, 서북쪽은 물로 안배되어져 있으며, 줄곧 나타나는 기암괴석이 숲을 이루고 있어서 奇觀을 자아낸다. 그림에서만 보고 실제로 보지 못했던 비파나무도 인상깊었다.
指柏軒(지백헌), 眞趣亭(진취정), 問梅閣(문매각), 湖心亭(호심정), 臥雲室(와운실), 五松園(오송원), 燕譽堂(연예당) 등의 건물이 산수 사이에 교묘하게 배치되었고, 사방을 연결하는 회랑 벽에는 ‘聽雨樓法帖(청우루법첩)’ 등의 石刻이 방치되어 있다. 가운데에도 蘇軾(소식), 黃庭堅(황정견), 未芾(미불) 蔡襄(채양) 등의 송나라의 4대가의 글과 文天祥(문천상)의 ‘梅花詩(매화시)’가 주목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할아버지와 손자, 2명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자림에서 사자(?)에게 잡혀갔을 리가 없을 텐데 어디 갔을까, 나도 찾아 헤맸지만 허사였다. 나중에 이미 구경을 마쳤던 졸정원 입구에서 졸지에 찾아서 다행히 합류할 수 있었다. 복잡다기한 정원임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우리 아들딸이 여기에 왔으면 숨바꼭질하기엔 안성맞춤이렷다. 식후마다 대장의 불만을 해소하느라 상습적으로 늦게 나타나는 권익 선생은 그래도 걱정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동행을 잃어버린다면 어디 될 말인가? 모두들 얼마간의 긴장을 풀고 동행을 시작했다. 가이드 세 사람도 책임 불이행으로 꾸지람을 들었다.
3.5. 수나라 문제와 양제 두 황제가 30년에 걸쳐 만들어 놓은 인공 대운하가 천진, 북경을 거쳐, 여기 소주까지 이어진다고 했다. 물론 수나라는 이 거대한 운하를 건설하고 민심을 돌리기 위한 고구려 침공에 실패하여 망하고 만다. 민심은 천심이라 혹독한 군주가 있은 뒤에는 반드시 한 나라의 멸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침 버스는 9층 8각, 76미터의 북사탑을 지나가고 있다. 곳곳에 고여 있는 듯한 물길엔 주인 잃은 초라한 빈배만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출퇴근 시간에는 중국 인민을 싣고, 때론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을 싣기 위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배의 모습이었다.
조선족은 중국 전역에 200만 명이 살고 있고, 연변에 85만 명, 연길에 12만 명, 그러나 소주에는 50명만이 살고 있다. 소주의 현지 가이드는 이십대 후반의 남자인데 발음이 매우 어설프다. 국가에서 실시하는 가이드 시험에 합격하면 가이드증을 발급받고 본격적인 가이드 활동을 한다. 특별한 경우 준가이드도 있는데, 한국 가이드의 경우 날로 여행객은 늘어나고 가이드는 부족하여 어쩔 수 없이 준가이드라도 활용해야 할 형편이다. 이 가이드가 바로 거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하기야 여행이란 돈 쓰고 고생하는 것이 아닌가?
소주의 길거리에 한국의 삼성 휘장이 많이 보여 마치 한국의 거리처럼 보이는 곳도 있었다. 삼성 반도체에서 한중 합작사업을 많이 하고 있다고 했다. 소주의 생산품으로 유명한 것은 실크란다. 그 옛날 이곳 오나라 비단이 실크로드를 통하여 유럽까지 전해졌단다.
3.6. 이어서 1400년의 역사를 가진 寒山寺(한산사)에 들렀다. 梁(양)나라 天監(천감) 연간(502~19)에 창건되어 唐나라 貞觀(정관) 연간(627~49)에 寒山과 拾得(습득)이 이곳에서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한산사라고 이름하였다 한다. 大殿(대전), 藏經樓(장경루), 鐘樓(종루), 楓江樓(풍강루), 碑廊(비랑) 등의 건물은 淸末에 재건되었다.
입구부터 조각과 문이 요란하고 담이 높아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음이 중국 건축 양식의 특징이라 하겠다. 그러나 안에 들어가면 행랑 담에 구멍이 많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500나한상이 여행객을 인도하고 있었다. 마침 울리는 한산사의 종소리는 인간의 108번뇌를 씻어 주고 있다. 놀라운 일은 우리 나라와 일본에 불교를 전한 현장 법사를 비롯한 세 분의 큰 스님이 법당의 삼면에 모셔져 있었다. 현장 법사는 율사답게 글씨 쓰는 모습으로 조상되어 있어 위엄의 스님이라기보다는 친근감이 가는 거승으로 보였다.
한산사, 中唐 시인 張繼(장계)가 楓橋(풍교)에서 밤에 잠을 청하면서 나그네의 몸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심정을 노래한 시 ‘楓橋夜泊(풍교야박)’의 출처가 바로 여기 아니던가? 장계의 詩碑는 명나라 문징명의 글씨였으나 해를 넘기면서 비석은 손상되고 청말 光緖 연간에 兪樾(유월,曲園)이 다시 써서 재건하였다 한다. 몇 차례 비문 촬영을 시도했으나 여남은 사람들이 비를 빙 둘러서서 감상하고 있었기에 뒷모습이나마 찍고 마음을 달랬다. 절 안에는 그 밖에도 청대의 유명한 화가 羅聘(나빙)이나 鄭文焯(정문작)이 그린 한산․습득의 畵像(화상) 石刻(석각)이나 韋應物(위응물), 岳飛(악비), 陸游(육유), 唐寅(당인), 汪士愼(왕사신), 康有爲(강유위) 등 역대 명인이 한산사를 읊었던 詩文碑(시문비) 수십 점이 있고 절은 여러 번의 興廢(흥폐)와 戰禍(전화)를 거쳐 장계의 시에서 구가되었던 옛날의 종은 일찍이 없어지고 명대의 嘉靖(가정) 연간에 주조된 종은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그것도 이미 없어졌다고 한다.
月落烏啼霜滿天(월락오제상만천)하니
달은 지고 까마귀 울며 서리는 온 누리에 가득한데
江楓漁火對愁眠(강풍어화대수면)이라.
강둑의 단풍 사이 고기잡이 불은 내 시름처럼 반짝인다.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외한산사)에
고소성 밖의 아득한 한산사에서는
夜半鐘聲到客船(야반종성도객선)이라.
한밤중에 종소리가 나그네의 뱃전에 들려오누나.
楓橋 : 江蘇省 蘇州府의 서쪽 7리쯤에 있음. 뒤는 산을 등지고 앞은 물을 임하고 있음.
姑蘇省 : 吳越 시대의 吳나라 도읍지로 지금의 蘇州府에 있음.
여기에 나오는 한산사가 바로 눈앞에 펼쳐지다니! 내가 구름 잡는 식으로 마음으로만 좋아하던 시의 현주소가 바로 여기라니. 사찰이 시인을 만든 게 아니라 시인이 사찰을 유명하게 만들었다고 하겠다. 여행의 고마움과 문학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다시금 음미하게 되었다.
집에 돌아가서 사마천의 史記를 다시 읽어 봐야지. 오나라 부차와 월나라 구천 사이에 일어난 臥薪嘗膽(와신상담), 吳越同舟(오월동주)라는 고사성어가 바로 여기에서 발생하지 않았는가.
3.7. 이어진 관광 코스는 虎丘(호구). 춘추시대 말기의 오왕 夫差가 아버지 闔閭(합려)를 여기에 묻고 3일 후, 그 위에 白虎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호구라고 이름하였다 한다. 또 일설에는 언덕의 모양이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느낌과 닮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고도 한다. 실로 간만에 본 큰 산이다. 높이라야 30미터 정도이므로 멀리서 바라보면 들판 속의 하나의 작은 언덕이다. 그러나 숲을 잠시 휘돌아 천 명이 올라설 수 있는 드넓은 千人石에 일단 다다르면 그 속세를 떠난 아늑한 경치에 놀라게 되고, 가파른 절벽 사이를 오르다가 보면 바로 옆에 칼처럼 생긴 劍池(검지)가 있어, 오싹함이 든다. 석벽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는 다양한 글씨가 여러 색상으로 치장하고 정겹게 길손을 붙잡는다. 단풍이 우리 나라처럼 산뜻하지 않으니 글씨를 새기고 색깔이나마 넣었다면 지나친 억지 발상일까?
호구 꼭대기에 동방의 피사 斜塔(사탑)이라는 별명을 가진 15도 기울어진 높은 탑이 있었다. 이름하여 虎丘塔(원명은 雲岩寺塔)이었으니 높이는 47미터요 중량은 2천여 톤. 이 탑 밑이 오왕 합려의 무덤이고 그가 3천 근의 금을 묻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는 일. 五代十國 중 周나라의 顯德 元年(959)에 세워지기 시작하여 北宋 建隆(건륭) 2년(961)에 완성되었다. 평면은 8각형이고 7층으로 된 전탑누각이다. 수차례의 화제를 만나 정상 부분과 각층의 차양 부분이 무너져 벽돌로 쌓은 몸체만 남아 있었는데 1989년 4월에 소주시인민정부가 안팎을 수리하고 비를 세워 雲岩寺塔重修碑記(운암사탑중수비기)를 漢(한)나라 초기의 글씨체인 古隸(고예) 스타일로 써 놓았다. 내부는 불탄 흔적이 역력하고 탑에는 오르지 못하도록 鐵索(철삭)이 쳐져 있었다. 호구탑 뒤로 돌아가니 아담한 소주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밖에도 호구의 고적으로서는 試劍石(시검석), 白蓮池(백련지) 등이 있다.
당나라 시인 白居易(백거이)는 소주자사 재임 중 호구에 자주 놀러 와서 詩想에 잠기곤 했다 한다. 너럭바위 위에서 올라앉아 검지의 물을 떠다가 먹이나 갈고 싶지만 가족 같은 일행이 있으니 어찌하랴.
길섶에 교자 놓고 사진 손님 기다리나 찍는 이 없고,
명색이 겨울인데 부채 장사 팔 길 없네.
길가의 비단 장수는 호객에 여념 없고,
구멍가게 참새구이는 애처롭기만 하여라.
중국에 와서 왜 이리 학교가 보이지 않나 싶었더니 마침 소주 공예 미술학교가 시야에 들어왔다. 길거리에 가구점이 보이지 않는 것도 특색이랄까.
3.8. 점심으로는 정통 중국요리가 나왔다. 咕咾肉(고로육)과 三絲淸湯(삼사청탕 = 川菜, 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