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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아로새긴 한민족의 꿈
- 반구대 암각화 -
도정 권상호
누군가 나에게 “한국의 역사가 반만년이라며? 뭘 보고 그래? 증거를 대 봐.”라고 한다면 나는 거침없이 빙긋이 웃으며 “반구대 암각화(盤龜臺巖刻畵)”라고 대답할 것이다.
태초에 하늘이 열리고, 이어서 땅이 지어졌다. 계절의 순환이 이어지고, 마침내 한반도가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끄트머리에 자리매김하였다. 동해를 앞마당으로 하고, 일본열도를 담장으로 둘렀다. 그러고 보니 대륙을 드나드는 현관문이 바로 한반도이다. 한반도의 등줄기 태백산맥이 등지느러미를 세우면 동해에서는 아침 해가 태평양을 건너 찬란하게 떠오른다.
원래 사람이 살지 않던 이 땅에 북방에서는 먼저 깨인 자들이 매서운 칼바람을 피해 이주해 오고, 남방에서는 모험심이 강한 자들이 구로시오 해류를 따라 이주해 왔다. 지혜로운 씨족과 의지 강한 씨족이 서로 만나 아이 낳고 더불어 살면서 한민족이란 특별한 종족을 만들었다. 어쩌면 그 터전이 울산 반구대 주변이었는지도 모른다. 더러는 산악 호랑이의 무서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더러는 바다 고래 떼의 장관에 대하여 얘기한다. 폭 10m, 높이 3m의 ‘ㄱ’자 모양으로 꺾인 절벽암반 반구대에는 이런 얘기들이 새겨져 있다.
오래전, 글자를 만들어 사용하기 전을 선사시대(先史時代)라 한다. 한민족에게도 물론 선사시대가 있었다. 여름이 오면 더위와 다투고 겨울이 오면 추위와 싸우며, 가족과 더불어 살 집을 짓고, 배고프면 먹을거리를 찾았다. 공동생활을 하던 그들에게도 자연히 소망이 생기고, 그 소망을 바위에 새겨놓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울산(蔚山) 대곡리(大谷里)의 태화강(太和江) 지류 천변에 새겨져 있는 반구대 암각화이다. 반구대는 지명이요, 암각화란 바위그림을 일컫는다.
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 서예전공 학생들과 함께 답사 여행으로 울산을 다녀왔다. 울산의 명물인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서석(書石)에 대한 공부가 주목적이었다. 울산의 명필 서호 이권일 선생의 도움으로 용의주도하게 접근하고 또 탐색할 수 있었다.
반구대 암각화는 고 최경환옹등의 마을 사람들이 물속에 그림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이 말을 듣고 본격적인 탐사는 1971년 12월 25일부터 1977년까지 동국대학교 문명대 교수를 중심으로 한 불교사적 조사팀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에 대한 최초의 보도는 1972년 1월 27일 자 중앙일보(中央日報)에 실렸다. 반구대 암각화는 우리나라 선사시대 바위그림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귀중한 유적으로 국보 제285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234-1에 소재한다.
반구대(盤龜臺)는 울산 12경의 하나로 반구산(盤龜山, 265m)의 끝자락에 기암절벽이 솟아 있는 곳을 말하는 데, 마치 호수 위에 떠있는 산의 모습이 거북이가 넙죽 엎드린 모습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반구대는 고려 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언양에 유배되었을 때 자주 찾아와 경관을 즐기며 귀양살이의 괴로움을 달랬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은 조선 시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33)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와 같은 학자들도 주변 경관을 즐기며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니 반구대와 그 주변을 아끼고 사랑하는 일은 신석기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반구대 암각화는 소중한 인류문화유산의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울산시민의 식수원인 사연댐이 지난 1965년에 축조된 이래, 반구대 암각화는 댐에 물이 차면 침수되고 댐에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등 반복된 침수 현상으로 마모와 균열 등의 훼손이 심각해지고 있다. 따라서 바위그림이 옛날엔 선명했는데 점차 흐릿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다. 반구대 암각화가 물에 빠진 사람처럼 무자맥질하고 있다. 혹여 숨이 차올라 암각화의 목숨이 다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연 많은 사연댐으로 말미암아 우리만의 것이 아닌 귀중한 인류문화유산 하나가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강바닥보다 높은 암반 위에 새겨져 있어 원래는 물에 잠기지 않았으나 댐 건설 이후에는 물속에 잠기기 일쑤여서 가뭄 때가 아니면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강 건너편 언덕에 설치된 망원경으로 이맛살 찌푸리며 뜯어 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비록 가까이서도 무심하면 못 알아보고 지나치겠지만, 바위 면에는 분명히 육지와 바다 동물, 사람과 배 등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지금은 방문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망원경 옆에 커다란 그림판을 세우고 해설까지 붙였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사연댐이 식수원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던 울산시가 간헐적인 침수로 훼손이 빨라지고 있는 국보를 잘 보존하기 위해 태도를 바꾸었다. 댐의 수위를 낮추어 암각화가 항상 물 밖으로 드러나도록 조치한 것이다. 사연댐 수위를 52미터로 낮추면 반구대 암각화가 물속에 잠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3월 김황식 국무총리, 최광식 문화재청장, 박맹우 울산시장 등이 방문하여 암각화 보존과 대체수원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고민한 바 있다. 식수원 확보와 문화유산 보호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식수원 일부 손실을 감수한 문화유산 보호 쪽에 손을 들었다. 옳거니. 반구대 암각화 보존 덕에 울산은 인류 최초의 고래 도시로, 인류 최초의 대륙문화와 해양문화가 만난 곳으로 그 명망을 더할 것이다. 아무렴.
세계문화유산 등재조건이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다. 과거에는 문화유산 자체만 보존하면 되었는데 현재는 유산을 있게 한 문화 환경까지 보전해야 한다. 더구나 지자체장의 보존 의지가 평가목록에서 가장 중요하단다. 늦었지만 울산시의 반구대 암각화 보호 의지에 갈채를 보낸다. 한국인의 자긍심인 반구대 암각화가 지구인의 소중한 문화재로 거듭나서 제 위치를 영원히 지키는 계기가 되길 바랄 뿐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선사시대의 모습 300여 점이 새겨진 바위그림으로 한민족 반만년 역사의 살아 있는 증거물이다. 한국역사의 첫 장면의 그림으로, 우리 조상이 이렇게 살아왔다는 삶의 현장을 보여 주는 한국미술의 원형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그림은 반만년 전 선사유적으로서 중국, 유럽의 암각화와 조형원리가 서로 통한다. 그러기에 이는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사실 암각화의 제작 시기에 대한 설은 매우 다양했는데, 황상일, 윤순옥 부부 교수의 논문 ‘반구대 암각화와 후빙기 후기 울산만의 환경변화(1995)’에 의해 6,000~5,000년 전으로 확실시되고 있다. 후빙기 바닷물이 밀려왔을 때 현재의 울산 시가지는 바다였고, 그 바닷물의 가장자리가 지금의 반구대 아랫부분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부산 영도구 동삼동 패총에서 발굴한 유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두 마리의 사슴이 그려진 빗살무늬 토기 조각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이는 반구대 암각화의 사슴 그림과 일치한다. 시대마다 유행하는 대표적 문양이 있는데, 이 토기 제작자와 반구대 암각화를 새긴 사람은 동시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토기가 묻혀 있는 토층의 탄화물을 소재로 반감기를 따져 연대를 정밀 측정한 결과 기원전 3,000년 전, 곧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이라는 사실이 나왔다. 그렇다. 반구대 암각화는 반만년 역사를 안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반구대 암각화는 어쩌면 국내 문화재 중에서 가장 높은 가치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림과 글씨는 인간의 영혼을 담는 그릇이다. 다양한 그림과 글씨는 그릇의 모양이요, 작가의 영혼은 내용물이다. 무뚝뚝한 바위 위에 불꽃 튀는 칼질이나 평온한 화선지 위에 용트림하는 붓질, 그것은 인간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심원한 놀이요, 예술 활동이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선사시대 우리 선조의 영혼이 그대로 담겨 있다. 종이가 아직 발명되기 전, 암벽이 종이를 대신하였고, 따라서 붓 대신 칼과 정으로 아로새긴 현존 최고의 그림이다.
말은 가장 기본적인 의사 전달 수단이다. 그다음이 글과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소리를 기록하는 녹음기와 움직임을 기록하는 동영상 녹화기의 발명은 근래의 일이다. 글과 그림은 쓰고 그리는 과정이 말보다 훨씬 어렵지만 오래 보존되는 장점이 있다. 종이 위에 쓰는 일보다 돌에의 새김질은 생명력이 강하여 더 오래간다. 반구대 암각화는 단단한 돌에 새겨져 있고, 또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강 건너편의 석벽에 새겨져 있어서 다행히 지금까지 오롯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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