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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탁 한글영비(靈碑)
도정 권상호
父德母恩(부덕모은) 부모님의 은덕은
天高地厚(천고지후)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두터워라.
旣孤且哀(기고차애) 아버님을 잃었는데 어머님마저 여의니
天呌地叩(천규지고) 하늘 향해 절규하고 땅을 치며 울부짖노라.
宅兆固安(택조고안) 이곳 묘지는 굳고도 편안하거니
天長地久(천장지구) 하늘처럼 땅처럼 영원하리로다.
哀祝此已(애축차이) 애달프게 축원하는 이 마음을
後人其負(후인기부) 후대사람이여 저버리지 마소서.
이 시는 효심으로 가득 찬 후손이 돌아가신 부모님의 영전에 바친 시로 보물 1524호인 ‘이윤탁 한글영비(靈碑)’에 새겨진 내용이다. 부모님의 은덕을 온몸으로 감사하고, 불효에 대한 애통함과 묘지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축원문이라 할 수 있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애틋한 효심(孝心)에 감동한 때문인지, 지금도 빗돌에는 눈물이 흐르는 듯하다.
나는 서울시 노원구에 27년째 살고 있다. 물론 그 사이에 새 아파트 입주를 위한 중도금 마련을 위하여 이웃 미아동에서 2년간 전세살이를 하면서 보낸 적도 있다. 1988년도에 새로 태어난 노원구는 서울문화의 오아시스 역할을 하고 있다. 집 앞으로는 불암산이, 옆으로는 수락산이, 뒤로는 북한산과 도봉산이 늠름하게 지키고 있다. 노원의 지형을 살펴보면 벼루 모양을 하고 있다. 노원에는 이 한글영비를 비롯하여 ‘붓골’ · ‘먹골’ · ‘벼룻마을’ · ‘문필봉’ 등과 같이 서예와 관련한 지명이 많다. 따라서 노원은 서예 인프라가 구축된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계, 중계, 하계동은 벼루의 얼굴인 연면(連綿)을 이루고, 월계, 공릉동은 연지(硯池)를 이룬다. 월계동의 달빛과 공릉동의 솔바람을 연상하면 노원의 별명은 가히 월송연(月松硯)이라 이름 붙일 수 있겠다.
이 대목에서 노원을 찬양하는 ‘노원8경(蘆原八景)’을 지어본다.
堂峴杜鵑(당현두견) 당고개에는 진달래 피자
三溪霞紅(삼계하홍) 상계, 중계, 하계동에는 놀이 붉구나.
蘆原飛鶴(노원비학) 마들엔 비상하는 학이요
漢川漁翁(한천어옹) 한내엔 물고기 잡는 늙은이로다.
月溪彈琴(월계탄금) 월계에서 거문고 타자
孔陵松風(공릉송풍) 공릉엔 솔바람 일어난다.
水落雪滿(수락설만) 수락산엔 눈이 가득하고
佛巖淸鐘(불암청종) 불암산엔 맑은 종소리 울리네.
이 시구에는 노원에 속해 있는 5개 동명과 수락산, 불암산, 당고개, 마들, 한내 등의 명칭을 모두 들었다. 그리고 두 구절씩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노래했다.
각설하고, 이 비는 1974년 1월15일 ‘한글고비’란 이름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9월 18일에 문화재청에서 보물로 지정하면서 ‘이윤탁 한글영비’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새 이름으로 부르기가 어려워 인근에서는 아직도 ‘한글고비’로, 이 비석의 앞길은 ‘한글비석길’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 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까닭은 위의 한시(漢詩) 구절 때문이 아니라, 한글 창제 이후에 한글로 새겨진 비석 중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이라는 점 때문이다. 대부분이 일반 비석과 비슷하지만 이 비석 측면에 ‘한글’ 명문이 있기 때문이다. 무덤의 훼손을 막기 위하여 비석의 한 측면 위에는 ‘靈碑(영비)’라 새기고, 그 밑에는 누구나 알기 쉬운 한글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새겨 넣었다.
‘녕 비라 거운 사 화 니브리라 이 글 모 사려 알위노라.’(이 비석은 신령한 비석이다. 비석을 깨뜨리거나 해치는 사람은 재화를 입을 것이다. 이는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바로 이 한글 명문 때문에 이 비석은 여느 사대부집 비석과 달리 ‘보물’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비석을 세운 이문건은 한글을 새겨 넣음으로써 효자 소리를 듣고, 비석의 문화재적 가치도 업그레이드 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이문건은 문화재의 미래를 내다 볼 줄 아는 안목을 지닌 사람이라고나 할까. 꿩 먹고 알 먹고, 일석이조(一石二鳥)로구나. 잘한다.
한글영비는 1536년(중종31년) 묵재(黙齋)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이 부모의 묘를 합장하고 세웠다. 부친은 승문원(承文院)의 종9품 부정자(副正字)의 벼슬을 지낸 이윤탁(李允濯)이고, 모친은 고령(高靈) 신씨(申氏)이다.
한글영비는 훈민정음 반포 후 90년 뒤에 세워졌다. 이로써 우리는 16세기 중반에 한글이 민간에 일반화되어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비는 훈민정음 창제 후의 한글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국어학적 자료이기도 하다. 한글 서체는 <훈민정음 해례본>과 <용비어천가> 서체의 중간 정도로 보인다. 특히 당시에 벌써 순우리말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이 비석을 세운 이문건은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직(李稷)의 손자로 1494년(성종 25년)에 출생하여 1567년(명종 22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중종의 시책을 쓰도록 발탁되었을 만큼 이름난 서예가였다. 그는 통정대부 승정원좌부승지를 지냈으나, 사화에 연좌되면서 성주로 유배당하고, 1567년에는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비를 세운 이문건의 높은 효심에 하늘도 감동을 받았는지 5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 비는 전혀 훼손되지 않고 원상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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