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사(4인의 글)
조윤제. 신동욱. 정병욱. 김윤식
조 윤 제
우리 나라 고전 문학의 역사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분야의 사적(史的) 전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를 몇 단계로 나누어 보는 것이 편리하다. 그런데, 그 나누는 방법은 국문학사를 보는 눈에 따라 다를 수가 있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보고자 한다.
1. 고대 문학(古代 文學)
전기: 삼국(三國). 신라(新羅)
후기: 고려(高麗)
2. 근세 문학(近世 文學)
전기: 조선 초(朝鮮初)~임진왜란(壬辰倭亂)
후기: 임진왜란~갑오경장(甲午更張)
이 구분은 단순히 정치적 변동과 같은 문학 외적인 면만 고려한 것이 아니고, 국문학 자체의 변화에도 유의한 것이다. 그럼, 이 구분에 따라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고대문학 전기
이 시기는 우리의 민족 문화가 싹터 오다가 이를 바탕으로 하여 중국과 인도 등 외래 문화를 흡수하게 되는 때다.
따라서, 국문학도 태동, 형성되어 가는 때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의 태동
원시 시대 사람들은 아직 인지(人知)가 발달되지 않아 모든 것을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존하고자 했다. 이것이 형식화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제사의 의식이다. 이것을 예술이란 각도에서 보면, 음악, 무용, 시가(詩歌)가 일체된 종합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삼한의 농공시필기(農功始畢期)의 가무 등이 다 그러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국문학은 위와 같은 제사 의식에서 태동했다고 할 것이다.
시가 문학
시가 문학은 제사 의식에서 싹텄다 함은 이미 말한 바와 같거니와, 이것이 분화되어 비교적 정제된 정형을 이룬 것은 신라 유리왕 5년에 된 도솔가에 와서인 듯하다. 그러나, 이 작품이 아직 발견되지 않아서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구지가도 정제된 정형시에 가까운 듯이 보인다. 그 한역밖에 볼 수 없다. 따라서 아직은 우리 나라 시가의 최고(最古)의 완성된 모습을 향가에서 찾는 것이 좋을 듯하다.
향가는 현재, 득오곡의 모죽지랑가, 어느 노인의 헌화가, 충담사의 안민가, 찬기파랑가, 처용의 처용가, 월명사의 제망매가 등 14수가 삼국유사에, 그리고 균여대사의 보현십원가 11수가 균여전에 향찰로 전해질 뿐이다. 진성 여왕 때, 위홍과 대구가 삼대목이라고 하는 향가집을 엮어 냈던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퍽 융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존하는 25수를 살펴보면, 4구체, 8구체, 10구체의 정제된 형식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소박한 사상과 순수한 감정을 엿볼 수 있다. 향가는 참으로, 우리 고유의 것을 바탕으로 하여 외래의 것을 소화한 데서 피어난, 우리 문학의 정화라 아니할 수 없다.
서사 문학
여기서 서사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신화, 전설, 설화 등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신화와 전설은 대체로 조국의 위업을 말하고 선조의 위대함을 기리는 것으로, 신성미(神聖美)가 차 있었다. 단군 이야기를 비롯하여, 해모수, 금와, 동명왕, 박혁거세, 수로왕 등에 관한 것들은 그 좋은 예다.
설화는 신화, 전설의 신성미가 사라지고 흥미 본위로 전환된 이야기다. 이 설화는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동안에 첨삭되기 때문에 본래의 개성이 사라지고 민족 전체의 뜻이 담기게 된다. 민족 문학으로서의 가치가 여기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설화는 우리 나라 소설의 기원이 되었다. 구토지설, 방이 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것이며, 이 밖에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
한문학
한문이 우리 나라에 전래된 것은 기원전 2세기경으로 추측된다. 아직 문자를 가지지 못했던 우리 선조들은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말을 적기도 하고, 직접 한문으로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의 한문학은 일찍이 발달하게 되었으니, 이미 조선 때 여옥(麗玉)이 공후인을 짓고, 고구려 유리왕이 황조가를 지었던 것이다. 그리고, 좀 내려와서 을지문덕이 지은 여수장우중문시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시기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문학의 대가는 최치원이다. 그는 12세에 당으로 건너가 18세에 당의 과거에 급제하고, 문명을 떨치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토황소격문이 유명하고, 문집인 계원필경이 남아 있다. 강수, 김인문, 설총 등도 뛰어난 한문학자였다.
고대문학 후기
고려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신라를 계승한 나라였다. 그리고, 불교를 국교로 했기 때문에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 피웠다. 이와 아울러 과거 제도를 실시하는 등 중국의 문물 제도를 많이 받아들여서, 한문학에 관한 한 문운(文運)이 대흥(大興)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문학의 융성은 상대적으로 순수한 국문학을 위축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이 시기에 이르러 향가가 소멸된 것은 그 안타까운 예라고 하겠다. 다만, 이 시기의 말기에 우리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가 제 모습을 나타내게 된 것은 기쁜 일이다.
설화 문학
고대 문학 전기의 설화 문학은 고려에 그대로 계승되어서 박인량의 수이전과 같은 설화집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러니, 이 책은 전하지 않고, 그 내용의 일부가 다른 책에 전재된 것이 있는데, 호원, 연오랑세오녀 등은 그 예다.
설화는 본래 항간에 떠돌다가 채록되는 것이기 때문에, 채록자의 창의(創意)에 따라 다분히 윤색된다. 설화에 나타나는 이러한 창의는 곧 소설의 싹이라고 할 수 있다. 임춘의 국순전, 이규보의 국선생전, 이곡의 죽부인전 등이 다 창의성이 강한 예로서, 이미 소설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물건을 의인화한 가전체로, 계세징인을 목적으로 하는 작품이다. 이들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으므로, 한문학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장가(長歌)
이 시기에 들어와 입에서 입으로 유전(流傳)되는 시가가 생겼는데, 이를 장가라고 한다. 이것은 신라의 시가를 계승한 것이지만, 표기 수단이 없었던 까닭으로 구전(口傳)되다가 한글 창제 이후에 기록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분절체이며, 후렴구가 발달되어 있고, 리듬이 매끄럽다. 또 주로 평민층에서 향수(享受)된 것이었으므로 그 내용이 매우 진솔하다. 특히 남녀간의 뜨거운 사랑을 읊은 것이 많고, 그 가운데 더러는 표현이 노골적인 것도 있어서, 조선조 학자들이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고 비방하는 바 되었다. 오늘날 더 풍부하게 전하지 못한 까닭이 여기에도 있다 할 것이다.
정과정곡, 동동, 서경별곡, 청산별곡, 정석가, 가시리, 정읍사 등은 현존하는 작품의 몇 예다. 이 가운데 정서의 정과정곡은 10구체 향가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한문학의 발달로 순수한 국문학이 위축되었다 함은 전술(前述)한 바거니와, 이 시기의 국문학은 실로 장가에 의하여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고 할 것이다.
경기체가
대체로 평민층이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