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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91>제105화문학동네에살고지고...:1. 空超와의 운명적 조우
게재일 : 2003년 01월 01일 [27면] 기고자 : 이근배<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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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꽃은 명동(明洞)에 피리
마음의 꽃은 청동(靑銅)에 피리니…(공초)
어디나 사람의 마을이 있고 어디나 꽃은 피지만 세상이 춥고 눈 바람 불 때 혼자서 봄인 듯 꽃피는 동네가 있었다. 불빛이 유난히 밝고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다고 해서 이름도 명동이었던가. 저 동족상잔의 피비린 연기가 국토를 휩쓸고 간 뒤인 1950년대의 뒤안길에서 육체거나 마음이거나 꽃 같은 거에 목마른 이들이 찾아 쉴 곳은 명동뿐이었다.
글입네, 그림입네, 또 무슨 예술입네 하는 쟁이들과 쟁이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명동은 다방, 술집 같은 작은 둥지를 틀어 쉴 곳을 내어주고 있었다. 내가 그 골목길에 첫발을 들여놓은 때는 1958년 봄이었다. 충청도 산골에서 춘원․소월 등의 몇 권 안되는 소설, 시집을 읽고 글쟁이가 되어보겠다고 서울로 올라와서 어딘지도 모르고 학교 친구들을 따라나선 곳이 명동이었고 문을 열고 들어간 첫 집이 청동(靑銅)다방이었다.
거기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선생이 앉아계셨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읽은 `짝 잃은 거위를 곡하노라`의 명문 한 편 머릿속에 남아 있을 뿐 그때만 해도 저 큰 바다처럼 넘실대는 그분의 시를 미처 알지 못했었다.
청동다방은 길가의 1층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좁은 공간이어서 담배연기와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겨우 비집고 공초 앞에 앉자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시며 큰손을 내밀어 잡아주셨다. 스님처럼 머리를 깎고 낯선 봉의 눈에 갸름한 얼굴에서 숨은 위엄과 인자함이 함께 배어 있었다.
"한마디 해라." 테이블 위에는 검은 표지에 A4 용지 1백장 쯤 묶은 백지 노트가 있었고 벌써 많은 사람이 제각각의 화두를 하나씩 써놓고 있었다. 그 노트 이름이 `청동문학(靑銅文學)`이었고 나도 무어라고 수줍게 몇 자 적었던 것인데 그 첫만남이 질긴 끈으로 이어져 오늘토록 마주 잡고 있게 될 줄은 공초도 나도 미처 몰랐던 일이다. 얼마 뒤 공초는 내게 필명으로 사천(沙泉)을 지어주셨다. 그저 좋은 뜻으로 지어주셨겠거니 하고 받아썼지만 왜 그런 이름을 주셨는지 한번도 묻지 않은 것이 지금 생각하면 잘못한 일이다. 글자의 뜻으로 보면 `사막의 샘`이니 오아시스를 말하는 것이겠는데 내가 이 사막 같은 세상에서 오아시스가 될 싹수는 없었을 것이고 보면 그저 사랑으로 덕담을 나눠주신 것이라고밖에는.
공초는 담배를 좋아하셨다. 그래서 어린 소녀들은 꽁초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손에 든 파이프에 연신 연기가 피어오르고 연기는 삭발한 긴 머리 위로 감돌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비록 저잣거리에 나와 앉아 있어도 높은 경지에 든 선승을 연상케 하였다. 아예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아내와 자식이 있을 리 없고 셋방 한 칸도 없이 동가식 서가숙(東家食 西家宿)한다고 했다. 그 무렵 스님들이 거처하는 종로의 선학원에서 겨우 잠자리를 얻으신 것 같았고 뒤에는 다시 조계사의 구석방 하나를 얻어 기거하셨다.
1894년에 태어나서 개화기의 시인으로, 사상가로, 선각의 구도자로 험난한 시대를 지나면서 일제나 그 밖의 어떤 권력, 어떤 이익에도 굽히지 않고 초연했던 우리 시대의 달인(達人). 그래서 아호도 시공을 넘어서는 공초(空超)라 했던가.
"앉은 자리가 꽃자리이니라." 공초가 앞에 앉은 우리에게 주는 화두였다. 해방 전이나 이후나 세상의 배에 사람들이 높고 편안한 자리에 몰려 기울 때 공초가 한 몸으로 다른 쪽 빈 자리에 앉아 지켰다고 구상 선생은 가르쳐 주었다. 무소유(無所有)의 그 자리, 꽃자리인 줄도 모르고 나는 지금 진흙밭에서 뒹굴고 있다.
◇필자 약력
^1940년 충남 당진 출생
^60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입학
^61~64년 서울신문․경향신문․동아일보․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월간 『한국문학』 주간․편집인 역임.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장․재능대 초빙교수
^가람시조문학상․육당시조문학상․월하시조문학상․편운문학상․현대불교문학상 등 수상
^시집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 『노래여 노래여』 『동해 바닷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 『한강』 등. 시조집 『불작란(不作蘭)』. 산문집 『독도통신』 『시가 있는 국토기행』 등
<5492>제105話 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2 화두집 `청동문
게재일 : 2003년 01월 03일 [24면] 기고자 : 시인 이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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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불평하기 보다는
차라리 한 자루의 촛불을 켜라-펄벅
꽃자리는 정해진 곳이 아니었다. 청동다방은 공초 오상순을 만나러 오는 문인들이나 사회인사들, 그리고 문학청소년과 소녀들을 앉히기에는 비좁아서 공초는 길 건너 서라벌다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설 『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읽혔고 193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 여사가 서울에 왔을 때 서라벌다방으로 공초를 만나러 온것은 1960년 11월 4일이었다. 공초보다 두 살 위인 펄벅은 공초가 담배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사슴`담배 두 갑을 내놓고는 "어둠을 불평하기 보다는 차라리 한 자루의 촛불을 켜라"는 화두를 악필의 영문으로 써놓고 갔다.
공초의 둘레엔 불빛을 찾아드는 날것들인 양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와서는 `한 마디 하고`가는 것이 의무이기도 했다. `청동문학`은 삶의 길목에서 문득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 `한 마디`를 적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그냥 사인 북으로 부르기보다는 나는 `화두집(話頭集)`으로 이름 짓고 싶은 것이다. 1백10권까지는 `청동문학`으로 하다 1백11권부터 `청동산맥`으로 바뀌었는데 마지막 1백95권까지 쌓인 화두는 높은 산과 겨룰 만한 것이었다. 거기에서 얼핏 눈에 뛰는 몇몇의 사리(舍利)들을 내뵈어 본다.
생화(生花)속에 노는 공초
자네 것이 되었구나
청산의 범 나비
네 멋대로 날아라
-월탄 박종화
서라벌 옛 성터에
청동의 새 탑을 깎는
석공이 있어
공(空)을 부정하며
공을 긍정하며
공을 초월하며
공을 잉태하며(하략)
-일석 이희승
오고 싶지 않은 곳으로 온 공초여
가고 싶은 곳도 없는 공초여
그러길래 공초는 오지 않았고
가지도 않을 것이다
-노산 이은상
안녕하시었는가 백인의 번뇌
내 고향의 그리운 벗들
-미당 서정주
공에 젓가락이 있고
무에 약주술이 넘친다
-김동리
지금 이 책을 받아 들었습니다
이 책의 종잇장을 쓸어 봅니다
공초선생의 살갗이 쓸려 집니다
우리의 살갗입니다.
-황순원
어찌 다 헤아리랴, 이름 있는 사람들과 이름을 감춘 사람들과 이름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공초와 주고받은 선문답들을. 구상․서정주 같은 분들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공초를 따로 대접하거나 자주 집으로 모셔갔다. 대통령선거에도 나섰던 국회의원 김준현은 전매청에서 국회의원이나 장관들만 피우라고 따로 만들었던, 금빛으로 무궁화가 찍힌 담배를 들고 왔다.
공초는 내게 오아시스를 뜻하는 사천(沙泉)이라는 호를 주셨지만 실은 공초가 계신 곳이 우리들 오갈 곳 없는 명동의 떠돌이에게는 꽃도 새도 물도 있는 오아시스였다. 나는 따뜻한 차 한잔 국밥 한 그릇 제대로 못해드렸는데 어느 때는 내 옆자리에 와서 슬그머니 몇 백원을 손에 쥐어 주시기도 했다.
시 `방랑의 마음`에서 `흐름 위에 보금 자리친 나의 혼`을 노래한 시인 공초는 가진 것 아무 것 없이도 늘 넉넉하게 명동의 한 복판에서 영혼의 밝은 촛불을 밝히고 계셨던 것이다.
<5493> 제105話 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3 `휴전선`의 시인 박봉우
게재일 : 2003년 01월 06일 [21면] 기고자 : 시인 한국시인협회장 이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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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한번은 천둥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휴전선`중
새해 첫날 문학동네에는 여러 신문사들이 쏘아올리는 신춘문예의 불꽃잔치가 하늘을 수 놓는다.
문단 등단의 길은 문예지의 추천과 신춘문예의 두 갈래가 있는데 추천제도는 대개 소설은 2회, 시는 3회를 거쳐야 하는 긴 여로가 기다리고 있기도 했거니와 그나마 등단의 문이 열려 있는 문예지는 `현대문학``자유문학`정도여서 뚫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높은 상금과 큰 신문에서 대문짝만하게 작품도 싣고 얼굴도 내어주는 신춘문예가 이 땅의 문학지망생에게는 최고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 공간의 혼란과 6․25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끊겨있던 신춘문예가 부활한 것은 1956년이었다. 우리 문학을 신인에 의해 한 단계씩 높여왔던 신춘문예의 부활을 기다리는 뜨거운 시선들 앞에 조선일보가 터뜨린 시 당선작은 추봉령(秋鳳嶺)의 `휴전선`이었다.
"언제 한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날 꽃은 시방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 길뿐인가."
전문을 다 인용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거니와 그 때만 해도 신춘문예는 1월 1일자 신문에 발표되어야 비로소 당선자도 알게 되는 때라 필명 추봉령은 전남 광주의 정치학도인 박봉우(朴鳳宇)였다. 그는 하루 아침에 기린아가 되어 서울에 올라왔고, 광주고의 후배인 서울대 국문과의 박철․임보씨, 그리고 나와 서라벌 문예창작과의 한반이었으며 지금 역사학자로 활동이 왕성한 이이화씨 등과 동인을 하던 우리는 명동에서 박봉우와 자주 만나며 신춘문예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세기사적 비극인 동족상잔의 참화와 그로 인해 산하를 갈라놓은 휴전선 1백55마일을 모국어로 소스라치게 노래한 `휴전선`의 시인 박봉우는 4․19혁명이 일어나자 다시 한번 `4월의 화요일`을 시로 승화시킨다. 가장 절박한 민족사의 중심에서 치열한 모국어의 불꽃을 피우던 박봉우는 어찌된 셈인지 현실생활에서는 그 기백을 발휘하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열심히 시를 쓰고 잡문을 썼지만 그것으로는 생활의 뒷받침이 되지 못했던 것이고 직장도 뜻대로 안되던 때였다.
신춘문예 당선 시인들끼리만 하는 `신춘시`동인지를 같이하면서 다방․술집에서 자주 어울리는 편이었는데 평소에는 말이 없다가도 술만 마시면 웬 용기가 하늘을 치받던지 술집에 앉아 있다가도 갑자기 명동파출소로 달려가서 오줌을 눈다든지 통행금지가 지나서 광화문 네 거리를 건너다 "누구냐!"고 경찰이 부르면 "나 박봉우시인이다"하고 큰 소리 치든지도 했다.
그러나 한없이 여린 성격이 현실과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점차 정신적으로 쇠약해져서 가까운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몸도 마음도 지친 그는 친구의 도움으로 전주에서 요양하다가 56세의 나이로 분단의 아픔, 광주의 아픔을 안은 채 잠든 화산이 되었다. 나라와 겨레 생각이 얼마나 깊었으면 아들 이름은 `겨레`, 두 딸은 `하나`와 `나라`로 지었을까!
통일이 되는 날 다시 한번 `천둥같은 화산`으로 터지는 시를 저 하늘에서 쓰겠지.
<5494> 제1052話 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4 `대한민국 시인` 김관식
게재일 : 2003년 01월 07일 [22면] 기고자 : 한국시인협회장 이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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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씻고 세상 일 듣지 말꺼나
피에 젖은 아우성-김관식
저 바람 찬 농촌에서는 겨우 삼동이 지나면 더 무서운 보릿고개가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던 1950년대, 썩고 무능한 자유당 정권에 맞선 민주당의 구호는 `못살겠다, 갈아보자`였다.
그러나 한강 백사장에서 50만 인파를 모았던 야당의 신익희 후보가 급서하고 이승만 정부 아래의 서울의 명동은 가난뱅이들의 집합소였다. 명동골목에 들어서면 아는 얼굴과 부닥치고 돈이 없어도 다방이나 술집에 따라 들어가면 되고, 하는 맛도 있었지만 들어앉아 책 읽고 글쓸 방 한 칸이 제대로 없거나 있어도 가난이란 놈이 마음을 못붙이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은 시인․소설가의 면허장을 받은 문인이거나 아직 면허장을 받지 못한 문학도이거나 그저 만나면 반갑고 이내 십년지기나 되는 듯 흉허물이 없는 사이가 됐다.그렇게 만나서 등단도 하지 않은 내 습작을 처음으로 신문에 활자화 해준 사람이 시인 김관식이었다.
그는 김광섭 시인이 사장으로 있던 당시 세계일보의 논설위원으로 있을 때였는데 어느 날 공초 선생을 찾아왔다가 내가 `청동문학`에 쓴 글들을 보더니 신문사로 놀러오라고 했다. 세계일보사는 남대문에 있었고 나는 마침 그 뒤쪽의 삼촌댁에 얹혀 살 때여서 겁도 없이 논설위원실로 찾아갔다.
그 방에는 고깔모자에 장삼을 입은 스님과 지팡이를 짚은 두 사람이 와 있었다. "근배야, 내가 좋은 시인을 소개해주지"하고 인사시켜준 한 사람은 `현대문학`에 서정주의 추천으로 갓 등단한 고은이었고, 한 사람은 `문학예술`로 나온 박희진이었다.
나는 `기적 이야기`라는 원고지 15장 분량의 3부작의 긴 시를 김관식에게 주었더니 바로 신문에 실어주었다. 뒤에는 콩트도 실어주는 등 내 없는 글재주를 사주는 것이 너무 고마웠다. 세상에서는 `양주동군!``박종화군!`하고 문단 대선배를 얕잡아 부른다 해서 객기를 부리는 기인(奇人)쯤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가 본 김관식은 당시 20대 후반의 젊은이답지 않게 조선조의 선비가 지녔던 정신적 체통을 담고 있었다.
육당 최남선에게서 한문을 배워 시를 1천수나 외는 신동이라고 했고, 서정주댁에 갔다가 그 집 처제에게 반해 음독소동을 일으키며 장가를 들었다는,그래서 서정주와 동서가 된 일화도 그다운 것이다.
4․19혁명 뒤의 어느 날 돌체음악실 앞에서 만난 김관식은 "근배야, 나 용산 갑구에서 장면군과 국회의원 대결하기로 했다.지금 석계향이 집에 정치자금 가지러 가는 길이다"하고 큰 소리를 쳤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헌법은 대통령 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바뀌었고,차기 정부의 강력한 수상후보는 장면 박사였다.
설마 농담이겠지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용산갑구에 출사표를 던졌고 `대한민국 시인 김관식`을 명함에 박아 돌리며 한 표를 호소했다. 아홉 명의 출마자 중에 7등을 했으니 돈 없는 대한민국 시인의 체면은 살린 셈이다. 역사적인 `장면군`과의 대결은 패배로 끝났지만 요즘 같으면 대통령선거에 뛰어든 셈이니 그 패기와 오만은 보통 사람은 엄두도 못낼 일이요, 우리 같은 졸개들에게는 은근히 어깨가 으쓱하는 화젯거리이기도 했다.
"근배야, 서정주 추천을 받거라. 서정주가 제일이다."돌체로 나를 찾아와 일러준 말이다. 말술을 사양치 않는 호주가였고, 사람들은 기고만장하는 품만 기억하지만 내게 있어 김관식은 자상하게 손을 잡아주는 배울 것 많은 시인이었다.
<5495> 제105話 문학동네에서 살고 지고...:5 서라벌서 만난 金東里
게재일 : 2003년 01월 08일 [25면] 기고자 : 한국시인협회장 이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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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망한 뒤의 폐도(廢都)에 떠오른
기묘하게는 아름다운 무지개여-서정주
금빛 날개를 치는 우리 옛 문화예술의 자랑거리가 어디 한 둘일까마는 그 중에서도 저 신라의 고도(古都)서라벌의 천년 영화로움의 장엄에 비할 바는 따로 없다. 그 이름을 따서 서라벌예술대학이 문을 연 것은 1953년이었고 더불어 문예창작과라는 낯선 학과가 생겨났다. 전쟁 통에 서울 유학은 꿈도 못꾸고 충청도 당진 산골에서 꼬박 고등학교까지 마치고(사실은 고1 때 서울로 튀어 올라왔다가 쫓겨 내려갔지만)어떻게든 넓은 바다로 나가서 헤엄을 쳐보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내게 `장학생 모집`이라는 광고가 잡혔다. 그것도 문예창작과가 있는 서라벌예술대학이었다.
학과시험은 없고 내신성적과 창작실기만으로 전형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방 사범대학을 가라는 할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장학생이 되겠다는 구실로 지망을 했다. 소나 논밭을 팔아야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던 시대였으니 장학생으로 대학을 갈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을 잡는 일이었다.
서울 미아리고개 너머 산을 깎은 언덕에 새로 들어선 캠퍼스에는 문예창작과 말고도 음악․미술․무용․연극․영화 등 예술가를 지망하는 전국의 천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누가 누구인지를 알지는 못하지만 서로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실기고사장에서 어떤 주제가 나올까 긴장하고 있었다.
이윽고 키가 작달막하고 다부진 얼굴의 교수가 들어와서 칠판에 `아버지의 얼굴`이라고 쓰는 것이었다. 산문은 `아버지의 얼굴`이고 시는 자유제라고 했다. 그 분이 김동리(金東里)선생이었다. 나는 소설지망생이었는데 산문보다는 시에 더 자신이 있었던지 시를 써냈고 을류 장학생으로 뽑혔다.
갑류는 등록금 전액 면제로 한두 명뿐이었고 을류는 여러명이었을 것이다. 함께 응시했던 한 학생은 장학생에 낙방해 다음해 서울대 철학과에 합격했으니 응시자들의 면면과 경쟁이 치열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내가 을류 장학생이 된 것은 하느님의 동아밧줄을 잡은 것이었고 그 밧줄은 나를 샛길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고 오늘토록 글쓰기에 묶어매 옴쭉달싹 못하게 하고 있다.
서라벌예대의 교수진으로는 당대 최고의 소설가 김동리, 시인 서정주를 비롯해 안수길․박목월․곽종원․이광래․정태용․김구용․양원달 등 어느 명문대학보다도 앞서 있었다. 입학을 하고 보니 신춘문예 당선․입선자가 3명이나 있었고 학원문학상 우수작․전국백일장 장원 등 전국 고교문단의 스타들이 총집결해 있었다. 김민부․천승세․박경용은 신춘문예 관록파였고 송상옥․서영수․오재철․이재령․권영근 등은 이미 스타가 되어 있었다.
학과장인 김동리교수는 창작실기와 문학 전반의 해박한 이론으로 강의실의 안과 밖에서 제자들을 키워냈고 그 결과 우리 반에서만 소설에 천승세․송상옥․유현종․김문수․김주영․백도기․오찬식․이재백 등이 쏟아져나왔고 시․평론․희곡․아동문학 등 각 분야에서 40명을 헤아리는 문학 인재들을 배출하는 대기록을 세운 것이다.
동리선생은 서라벌 캠퍼스에서만이 아니라 해방 이후 우리 문학동네의 촌장으로 한국문학의 한 시대를 번쩍 들어올린 거인이었다. 동리선생은 1995년 6월 16일 세상을 뜨셨고 문학 생애에 맞수이던 미당 서정주선생은 1주기를 맞아 세운 산소의 비문을 이렇게 썼다.
`무슨 일에서건 지고는 못 견디는 한국문인 중의 가장 큰 욕심꾸러기, 어여쁜 것 앞에서는 매양 몸살을 앓던 탐미파 중의 탐미파, 신라 망한 뒤의 폐도에 떠오른 기묘하게도 아름다운 무지개여`.
<5496>제105話문학동네에살고지고... : 6. 순수문학 고집한 김동리
게재일 : 2003년 01월 09일 [21면] 기고자 : 이근배<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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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 왜 자네 사회주의문학 안 하나!-정지용.
`무슨 일에서건 지고는 못 견디는 한국문인 중의 가장 큰 욕심꾸러기`라고 미당 서정주 시인은 소설가 김동리의 비문에 썼다. 그렇다. 동리 만한 욕심꾸러기를 나는 본 일이 없다. 대하소설로도 다 쓰지 못할 동리의 크고 넓은 생애를 이렇게 짧게 담아 낼 수 있는 이는 오직 미당뿐이겠거니와 더 짧게 줄인다면,`욕심꾸러기`와 `기묘하게는 아름다운 무지개`로 남게 된다.
1970년대 초 내가 편집일을 맡고 있던 동화출판사에서 일본 동수사(冬樹社)와 공동으로 한국문학전집 5권을 일본어로 번역 출판하기 위해 편집위원회를 열었었다. 그 자리에서 미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에에. 나는 노벨상을 탈까 하는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리가 받았다. "노벨상이라면 나도 생각이 있지…." 이 두 분의 느닷없는 노벨상 다툼에 함께 있던 김소운․백철․황순원․이어령 등은 두 분의 얼굴만 번갈아볼 뿐이었다.
동리와 미당 두 쌍벽(雙璧)의 문학 욕심을 읽을 수 있는 장면을 나는 보았던 것인데,특히 동리의 문학 욕심은 순수문학에 대한 투철한 문학관과 함께 한국문학의 오늘을 있게 한 버팀목이 되었던 것이다. 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가 입선, 35년 조선 중앙일보에 소설 `화랑의 후예`가 당선, 다시 36년 동아일보에 소설 `산화`가 당선되어 화려하게 등단한 동리는 태평양전쟁을 전후하여 일제의 강압과 회유에 동시대의 문인들이 훼절을 하는 험난한 고비에서도 붓을 꺾고 도피 행각으로 자신을 지켜냈었다.
해방이 되자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로 뭉쳐 일제하 카프를 형성했던 임화 등 좌익문학의 기수들과 홍명희․이태준․이기영․한설야․오장환․이용악 등 문단의 대표적 시인․작가들이 거의 `조선문학가동맹`의 깃발 아래로 합류할 때에도 신인이나 다름 없는 동리는 박종화․유치환․서정주․조지훈․곽종원․조연현․최태응․이광래 등과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취임, 우익문학의 대열을 정비한다.
특히 좌파의 문학이론은 카프로부터 무장해온 맹장들이 포진하고 있는 데다 시대적 설득력마저 얻고 있어 이론적 투쟁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동리는 좌파 논객인 김동석(金東錫)등과 당당하게 맞서 나갔다.
"자본주의적 기구의 결함과 유물 변증법적 세계관의 획일주의적 공식성을 함께 지양하여 새로운, 보다 더 고차원적 제3세계관을 지향하는 것이 현대문학 정신의 세계사적 본령이며 이것을 가장 정계적(正系的)으로 실천하려는 것이 시방 필자가 말하는 소위 순수문학 혹은 본격문학이라 일컫는 것이다."
이렇게 동리가 내세운 논리는 오늘에 와서도 적중하는 것이고 동리는 그 논리를 꺾이지 않고 일관되게 펼쳐왔었다. 그 좌․우 문학논쟁이 불꽃을 튀기던 46년 경향신문의 창간을 앞두고 주간으로 취임한 정지용 시인은 편집국장을 물색하던 중 소설가 횡보 염상섭에게 다리를 놓아달라고 동리에게 부탁한다. 동리는 횡보의 대답을 얻어냈고 정지용은 그 고마움을 갚을 양으로 동리 집에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다른 반찬은 필요 없고 그저 된장찌개면 되네." 정지용은 쇠고기 한 근을 사들고 동리댁에 가서 저녁상을 받고 술상을 받아도 쇠고기는 그림자도 안 보였다.
"내가 쇠고기 한칼 사왔었는데…." 혼자 중얼거리자 그제서야 동리가 생각이 난 듯 "여보 정선생이 고기 사오셨잖소"하고 아내를 불러 세웠다. 부인은 "제가요, 한번도 쇠고기로 반찬을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요"하고 고개를 떨군다. 그날 밤 "참으로 적빈여세(赤貧如洗:가난하기가 마치 물로 씻은 듯하여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음)로구나"라며 정지용은 술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동리!왜 자네 사회주의 문학 안 하나?" 라고 소리쳤다.
순수문학의 고집쟁이 동리와 지용이 남긴 아이러니의 한 장면이다.
<5497> 제105話 문학동네에 살고지고...: 7 김주영의 절필여행
게재일 : 2003년 01월 10일 [17면] 기고자 : 시인 한국시인협회장 이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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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소림사 무술대회에 참가하는 천하의 협객들처럼 저마다 벼르고 담금질해온 글솜씨를 뽐내며 김동리․서정주로 대표되는 문단의 핵우산 아래 모여든 우리 서라벌예대 문창과 58학번들은 입학하자마자 등단의 문부터 두드리기 시작했다.
졸업을 전후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춘문예며 문예지 추천을 통해서 모두들 얼굴을 내뵈는데 키가 껑충하고 촌티나는 경상도 청송 출신의 김주영은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대기만성이라던가,동료들보다 십년 늦게 `월간문학`신인상에 당선되어 서울로 올라오더니 이내 스타군단에 합류하고 서울신문에 연재소설 `객주`를 5년이나 끌어가는 괴력을 발휘했다. 그 입담과 필력을 얻기 위해서 기초공사기간이 길었던 모양이다. 대하소설`객주`는 연재가 끝나자마자 출판되어 서울의 종이값을 올렸고 덩달아 김주영은 대형작가가 되어 상한가를 쳤다.
뚝심과 끈기의 김주영은 `객주`를 넘어서는 글감을 찾더니 마침내 한국일보에 `화척`을 들고 나왔다. 잘나간다 싶었는데 1989년 10월 하순 무렵 느닷없이 `김주영 절필선언` 기사가 터졌다.
그 무렵 김주영과 나는 뻔질나게 뭉쳐다니던 터라 영문도 모르는 나까지 까닭을 묻는 전화에 시달려야했다.무언가 심경의 변화와 함께 글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 부닥치는 작가적 고뇌에서 나온 일시적 해프닝이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그 `절필`이 한창 화제가 되고 있을 때 우리 가까운 친구들은 이미 짜놓았던 가을여행을 떠난 것이다. 황동규․김주영․김원일․정진규․김종해․정규웅․이만익․정현기․김선학 등과 거기에 내가 끼어 우리는 봄․가을로 1박2일 혹은 2박3일로 산천경개를 구경하는 나들이를 하고 있었는데 바로 가을 여행을 앞두고 그 `절필`이 터진 것이다.
그래서 `절필여행`으로 이름이 붙게 되었고 우리들은 마음 속으로 "지가 어떻게 소설을 안써?"하면서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주영이를 속으로 토닥거리며 속인들은 발을 들여놓지 못한다는 문경 봉암사에 가서 발목까지 빠지는 낙엽을 밟고 있었다.
글쟁이들치고 역마살이 안 낀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김주영은 `객주`를 쓰면서 팔도강산의 장터거리를 모두 뒤졌고 더러 외국여행이라도 할라치면 난장을 꼭 보아야겠다고 성화이다. 여기서 역마살의 원조를 놓칠 수 없는데 시인 황동규형이다.
나는 그를 고산자 김정호의 이름을 따서 아예 `황정호`라 부르기도 하는데 처음 만나는 후배 시인에게 고향을 묻고는 그 곳 태생도 모르는 문화지도를 가르쳐준다. 글감사냥은 책상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발톱이 닳도록 걷고 또 걷는 일임을 나는 황동규․김주영에게서 배웠다.
그렇게 우리 나들이 동아리는 선운사로 동백꽃도 보러 가고 주왕산 단풍도 보러 가고 동해에 고기도 낚으러 갔었다. 늦가을 절필여행이 있은 다음 해 여름 8월 한가운데에 나는 김주영이 운전하는 옆에 앉아 노닥거리며 동해안에 가서 이틀간 함께 있다가 헤어져 돌아왔다. 올라와 보니 김주영이 `집필여행`을 떠났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려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하면서도 참 묘한 인연도 다 있다.
김주영의 절필여행도 함께 가더니 집필여행까지?하고 그가 다시 선보일 다음 작품을 머리 속에 그려보았었다.
김주영은 다시 붓을 들어 소설 `화척`을 마무리했고 1995년 8월 인사동 선천집에서 그 완간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김주영은 방에 들어서더니 오다가 즉흥시를 한 편 썼노라고 읊어댔다. 제목은 `인사동 산책`이라나. "그 여자 젖꼭지 한번/참 토실토실하다"고. 그때 황동규형이 한 수 거들었다.`토실토실하다`는 빼! 소설가와 시인의 불꽃이 `화척`에서 한번 번쩍 일어났다.
<5498>문학동네에서 살고지고...:8 시의 스승 미당 서정주
게재일 : 2003년 01월 13일 [21면] 기고자 : 시인 한국시인협회장 이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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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미당
이 나라 모국어의 꽃밭은 눈이 부시다. 신라 향가로부터 큰 물살로 뻗어온 시의 장강에 나를 겁없이 뛰어들게 한 스승은 미당 서정주 선생이었다. 소설을 쓰겠다고 잔뜩 벼르고 문예창작과를 지망한 나는 『서정주 시선』을 펴들면서부터 나도 모르게 시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미당 선생은 시 창작 첫 시간에 시를 써오라고 과제를 내주셨고 그 과제물을 대상으로 작품평을 하실 때 내가 쓴 `창과 꽃밭`을 들고 나오셨다. 이미 등단했거나 등단 문턱을 넘어서는 강적(!)들을 뒤로 하고 무명의 내 작품이 먼저 올라온 것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내 작품이 그중 뛰어나서가 아니라 어쩌다 손에 잡혀서 일 수도 있는데, 그 우연은 내게 어떤 필연으로 작용해서 나는 끝내 소설가가 되지 못하고 시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미당 선생 댁은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있었다. 담장도 대문도 없이 안마당은 바로 꽃밭이었고 그 사잇길로 유리창 미닫이를 열고 들어서면 선생의 사랑방이다. 그 사랑방은 시도 때도 없이 붐비고 있었다. 시를 들고 찾아오는 제자들이나 시 지망생뿐 아니라 시인․소설가․평론가 등 명동에 드나드는 사람들 중 많은 이가 미당 댁에 찾아가서 술과 밥을 축내는 일이 예사였다. 그렇다고 과일 봉지나 술 한 병이라도 사가지고 가는 형편도 아니었다.
대학교수의 월급과 약간의 원고료와 심사료 등의 넉넉지 못한 수입이었을텐데 그런 것은 헤아릴 겨를이 없는 우리들이었다. 누구보다도 애쓰셨을 것은 손님같지 않은 사랑방 손님들을 뒷바라지하느라 있는 반찬 없는 반찬 장만하시는 사모님 방옥숙 여사였다. 미당선생 팔순 잔치가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열렸을 때 황동규 시인이 일어나서 외쳤다. "미당 시를 읽지 않고 시를 쓴 사람 나와봐라!"고. 나는 그 말을 받아서 "저 1950~60년대 방옥숙 여사의 술과 밥 안 먹은 사람 나와봐라!"고 말하고 싶다.
그 시대엔 문학의 밤도 많았다. 각 대학, 각 고등학교에서 다투어 시낭송회 등이 열렸다. 우리 반에서도 몇 개의 동아리가 생겼고 `문예창작회`라는 동아리에서 `문학의 밤`을 명동 돌체음악실에서 가졌다. 사회를 맡은 나는 `시성 서정주`라고 미당을 소개했더니 미당은 "내가 제자를 잘못 두어서 근배가 실언을 했다"고 꾸지람을 했다.
신문학 이후 공초․만해․소월․정지용 등 모국어의 새벽을 개척한 시인이 한둘이랴만 나는 미당의 시에 눈이 멀어 있었다. 외려고 한 것도 아닌데 『서정주 시선』 한 권이 저절로 외워질 만큼 낱말 하나 토씨 하나에도 나는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방학 때면 고향 당진에 내려가 여름이면 콩밭을 매면서 시를 썼고 겨울이면 눈밭에 소나무가지 찢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시를 썼다. 노트에 한권도 되고 두권도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것이 못되는 남의 흉내일 터이나 나는 그 노트가 아까웠다. 공부는 된둥만둥하고 친구들은 졸업이다, 다시 진학이다 바쁠 때 나는 원고뭉치를 들고 공덕동 미당댁을 찾았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시집을 내겠다며 서문을 써달라고.
"근배가 시를 나하고 같이 하려 책상을 마주 한 지 벌써 두 해나 된다. 그 동안 그는 시와 정신을 가지고 누구보다도 애쓴 사람 중의 하나였고 또 이 밖의 어느 외도도 하지않은 사람 중의 하나였다"는 미당의 서문을 받아 나는 첫 시집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를 60년 봄에 펴냈다. 미당선생은 그렇게 나의 시의 입산에 머리를 깎아주셨다.
<5499> 제105話 문학동네에 살고지고...: 9 화사집 50년제
게재일 : 2003년 01월 15일 [21면] 기고자 : 시인 한국시인협회장 이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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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사랑하는 사람의 재앙됨이여!-오장환.
내 나라의 언어를 가장 아름답게 빚을 수 있는 시인의 탄생은 그 시인만의 것이 아니요 역사와 문화와 더불어 겨레의 축복인 것이다. 1991년 10월 24일 저녁 서울 동숭 아트센터에서 `미당 서정주 화사집 50년 기념시제`가 열렸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라는 `자화상`의 싯귀를 내건 이 시의 축제는 반세기 전 23편의 시로 첫 시집 『화사집』을 내 우리 시문학사에 새 장을 연 것을 기념하는 잔치로 신문학 이후 어느 시인의 어느 시집도 받아보지 못한, 문학동네에서는 처음 있는 아주 뜻깊은 행사였다.
큰 시인의 업적을 기리고 받드는 일은 마땅히 문학동네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야 하는 법인데 못난 우리 제자들이 정신 못차리고 허둥대고 있는 사이 그해 6월 3일자 한국일보에 김성우의 칼럼 `화사집 50년`이 나왔다. 문단이 눈을 감고 있는데 언론인이 나서서 그 뜻을 기리자는 제의를 하고, 이어서 기념시제마저도 김성우가 나서서 큰 무대에 올린 것이다. 시를 배웠거나 추천받았거나 학연이나 혈연 어느 것도 걸릴 것이 없는 문단 밖의 인사가 생각해주는 것도 고마운 터에 적지 않은 경비가 드는 행사를 맡아서 하는 것이 우리 제자들이나 시단은 그저 부끄러울 뿐이었다.
여기서 이제는 반세기가 아닌 62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미당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돼 등단하자마자 곧 그의 놀라운 시재로 시단의 박수 갈채를 받기 시작한다. 그해 미당은 김동리․오장환․함형수․이성범․이용희․김상원 등과 동인을 결성, `시인부락`을 창간하였는데 발행 겸 편집을 맡아서 2집까지 낸다.
동인 중에 오장환은 특히 미당의 시에 홀딱 반해서 갓 신인인 데다 시가 몇 편 되지 않는데도 그의 시집을 자기가 경영하는 남만서고(南蠻書庫)에서 내겠다고 나선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미루고 있던 차에 동인인 남대문약국 주인 김상원이 5백원을 내놓아 41년 2월 10일 1백부 한정판으로 출간했다.
제1번에서 15번까지는 저자 기증본, 16번에서 50번까지는 특제본, 51번에서 90번까지는 병제본, 91번에서 100번까지는 발행자 기증본이었다. 특제본 35권의 표지는 유화용 캔버스로, 등때기는 비단에 `花蛇集`세글자만 붉은 실로 수를 놓고 본문은 전주 태지를 여러 겹 붙여 다듬이질 했으니 책의 호사를 있는 대로 부렸다. 특제본은 5원, 병제본은 3원인데 약주 한 사발에 안주 하나 곁들여 5전이었다니 특제본 한 권 팔아서 선술집 돌아다니며 1백잔의 술을 마셨다고 한다.
서문이나 저자의 후기도 없고 오장환이 "그여코 내 손으로 화사집을 내게 되었다. 내가 붓을 든 이후로 지금에 이르도록 가장 두려워하고 끄리든 이 시편을 다시 내 손으로 모아 한 권 시집으로 모아 세상에 전하련다. 아, 사랑하는 사람의 재앙됨이여!"하고 붓을 놓고 만 것을 제작비를 댄 김상원이 받아서 "정주가 `시인부락`을 통하야 세상에 그 찬란한 비늘을 번득인지 어느듯 5~6년, 어찌 생각하면 이 책을 묶음이 늦은 것도 같으나 역(亦), 끝없이 아름다운 그의 시를 위하야는 그대로 그 진한 풀밭에 그윽한 향취와 맑은 이슬과 함께 스러지게 하는 것이 오히려 고결하였을는지 모른다"고 발문을 쓴다.
미당도 못가지고 있는 특제본을 화사집 50년을 맞아 복간했고 축제무대에는 김남조․김윤성․이형기․박재삼 등 10여명의 시인과 김동원․백성희․장민호․손숙․윤정희 등 원로 연극인․영화인이 나섰다. 가수 송창식은 `푸르른 날`을 불렀다. 나는 `자화상``수대동시`같은 18번을 다 뺏기고 `밀어`를 낭송했다.
구랍 스무사흘은 미당 2주기 제삿날, 화사집 50년을 맡았던 김성우 명예시인은 혜화동 재능교육빌딩에서 또 한번 `미당시제`를 올렸다. `아, 사랑하는 사람의 재앙됨이여!`오장환의 저 찬란한 탄식을 오늘은 내가 씹으며 울먹인다.
<5500>제105話문학동네에살고지고...: 10.『불꽃』의 작가 선우휘
게재일 : 2003년 01월 16일 [21면] 기고자 : 이근배<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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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가 없고 읽을 거리가 없는 산골 마을에서 오직 하나뿐인 즐거움은 이 집 저 집으로 책을 빌리러 다니는 일과 빌려 온 소설을 밤을 새워 읽는 일이다.
그러다가 문예지를 만나고 거기서 서울 문단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알기 시작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그것도 당진읍내 서점에는 문예지가 오지도 않거니와 학교공부가 아닌 군책을 살 형편도 아니던 터라 이웃 대처로 유학간 문학소녀의 책을 빌려다 읽었던 것이다.
1957년 `문학예술` 7월호에는 어린 눈을 확 틔워 주는 두 편의 소설, 선우휘의 `불꽃`과 송병수의 `쑈리․킴`이 실려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문예지에 실리는 소설은 대체로 2백자 원고지 70장 안팎의 단편이었는데 `쑈리․킴`은 매운 맛 나는 단편인데 비해 `불꽃`은 3백장이 넘는 중편으로 3․1운동에서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3대가 겪는 수난과 이데올로기의 충돌을 주인공인 손자 고현으로 하여금 증언케 한다. 휴전이 되어 총성이 멈췄다고는 하나 아직도 화약냄새가 가시지 않은 잿더미 위에서 낳은 소설이어서 읽는 가슴이 더 뛰었다.
더구나 선우휘가 누구인가. 현역 육군대령의 신분이었다. 그는 192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경성사범을 나온 뒤 신문기자, 중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1949년 육군소위로 임관, 6․25 전쟁 중에 정훈장교에서 특수유격대를 지원, 1․4후퇴 때는 대동강철교가 끊어지자 가교를 설치하여 피난 행렬을 돕는다. 그러니까 `불꽃`은 고현이라는 주인공을 내세웠지만 선우휘 자신의 체험이 짙게 밴 아주 뜨거운 감자를 삼킨 야심작이기도 했다.
선우휘는 1955년 `신세계`에 `귀신`을, `사상계`에 `테러리스트`를 발표했음에도 `무면허 운전`이었다고 생각했는지 `문학예술`에 투고, 당당히 신인당선으로 소설가의 신분증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불꽃`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신인작품으로 발표된 두 달 뒤인 1957년 `사상계` 9월호에 제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으로 재수록된 것이다. `문학예술`7월호와 `사상계`9월호 사이에는 분명 두 달의 시간차가 있지만 9월호는 7월쯤 편집이 되는 것이 잡지의 생리이다.
요즘처럼 문학상이 지천이던 때도 아니고 많은 선배 중견 작가군이 목을 빼고 있는 동인문학상을 아직 원고지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신인작품이 따낸 것이다. 백철․김동리․최정희 등의 심사위원들이 설마하니 현역 육군대령의 계급장에 겁먹었을 리는 없는 것이고 보면 `불꽃`이 무거운 주제를 잘 다룬 역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군복을 벗은 그는 한국일보의 논설위원으로 있다가 1962년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많은 칼럼과 논설을 쓰는 한편으론 창작의 불꽃을 멈추지 않는다. 1966년에는 중앙일보에 `물결은 메콩강까지`를 연재하면서도 `띄울 길 없는 편지`를 비롯한 여러 편의 소설을 발표, 그의 왕성한 창작력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군인으로, 기자로, 작가로 각기 다른 행로를 거치면서도 선우휘는 소설 쓰기에 어느 전업작가도 못 따를 집중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가 6․25참전 군인으로 몸에 밴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제 3공화국과 유신시대를 거치면서 체제옹호적 논객으로 비춰졌던 것도 사실이나 그가 정부나 권력으로부터 이익이나 지위를 탐내거나 그런 목적으로 신문에 글을 썼던 것은 아니었다.
듣건대는 여러 욕심날 만한 자리를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때아닌 간첩단 사건이며 이러저러한 일(그것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로 문인들이 구속되고 고통받을 때마다 그가 알게 모르게 도움의 손길을 뻗쳐주고 있었던 것도 아는 사람은 아는 일이다.
내가 `한국문학`을 할 때 어느 기업인에게 지원을 부탁하러 문인들과 함께 지방에 내려갈 일이 있어 그 분을 찾아갔었다. 뜻밖에도 "내가 나서서 될 일이면 가야지"하고, 신문사 일로 바쁠 때인데 나서 주었다. 그때 소설 `불꽃`으로 달아올랐던 내 가슴은 그의 문학사랑에 다시 한번 데어야 했다.
<5501>제105話 문학동네에 살고 지고:11 `신춘시`와 함께한 날들
게재일 : 2003년 01월 17일 [22면] 기고자 : 시인 한국시인협회장 이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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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얼어붙은 눈동자와
시방 날개를 잃은 벽이었던가
꽃이었던가-`북위선`
나무가 겨울 눈바람 속에서 몸살을 앓으며 꽃을 장만하듯이 이 땅의 문학지망생들은 신문사들이 `등용문`이라 내걸고 있는 신춘문예를 향하여 어두운 골방에서 피를 말리며 응모작을 쓴다.
중국 황허(黃河)강의 상류에 `용문`이라는 물살이 센 곳이 있어 그 곳을 뛰어넘으면 잉어가 용이 된다고 해서 곧 입신출세를 뜻하는 것인데 몇백 혹은 몇천대 일의 관문을 뚫고 신춘문예에 당선했다고 해도 벼슬 자리가 붙거나 밥벌이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거기다가 1960대 초까지만 해도 문예지라고는 『현대문학』과 『자유문학』밖에 없었던 터라 등단을 해놓고도 원고 청탁을 받을 길이 없었다.
나는 61년 시조를 당선으로 64년까지 당시 5대 일간지에 시․시조․동시를 당선한 것 외에 문공부 신인예술상을 3회나 수상하여 신춘문예 5관왕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딱지를 붙이기도 했는데 상금 욕심만이 아니라 그것은 아주 확실한 작품발표 수단이기도 했었던 것이다.
발표할 지면이 없이 떠돌던 신춘문예 당선 시인들은 63년 `신춘시`라는 동인지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첫 발의에 참가했던 나는 64년 `북위선`이 한국일보에 당선된 뒤에야 합류했다. 출판사의 지원이나 광고비 같은 것도 없이 변변한 벌이도 없는 터에 빈 주머니를 털어서 제 19집까지 펴냈다. 몇 십 쪽짜리 동인지였지만 톡톡 튀는 시들이 있어 김수영 등 눈 밝은 이들이 월평에 자주 언급해주는 것에 고무되기도 했다.
우리들은 신춘문예 시상식 신문사에 몰려가서 새로 탄생되는 시인들을 축하해 주고 따로 날을 잡아서 모두 환영하는 한턱을 쓰기도 했다. 처음 열 명도 안되게 시작한 동인이 해마다 불어서 스무 명을 넘게 되었다. 각기 어려운 경쟁을 뚫고 당선한 저력도 있거니와 서정성보다는 시대와의 불화에 더 많은 언어를 쏘아대고 있었다.
69년 공화당정권이 3선개헌을 앞두고 어수선하던 때 동인이었던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강인섭이 `신춘시` 동인을 해체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했다. 속사정은 말하지 않았으나 어떤 집에 불려갔거나 `신춘시` 동인들의 시에 대해서 언짢은 귀띔을 받은 눈치였다. 우리 동인들도 많이 자라서 올챙이 꼬리를 떼고 네 발로 뛰기 시작할 즈음이어서 일단 문을 닫기로 했다.
밤 하늘을 나는 반딧불이처럼 눈에 빛이 나는 사람들이었지만 참 좋은 시를 잘도 쓰고 마음씨도 착하기만 했는데 어찌된 셈인지 지난 10년 사이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던 권일송,`봄은 오는데 긴 겨울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는 박봉우,`오늘은 저승새가 날아와서/내 울음 대신 울고 갔다`는 박정만,`색칠도 재치도 없는/그 투박한 한 장의 그림이/이렇게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던 윤삼하,`아무것도 없음으로 하여/영원은 있는 것이다`던 황명,`이 고요하고 고요한 시간에도/나의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던 조태일,`나는 여자와 사랑하기 위하여 태어난 사나이`라던 전영경, 그렇게 일곱이나 되는 시신(詩神)들이 세상 밖으로 끌려 갔다.
이제 강인섭․박이도․신세훈․장윤우․이탄․이가림․김원호․권오운․김종철․강인환․강희근 등이 뿔뿔이 흩어져 다시 불씨를 피우자고 들먹이나 앞에 나서서 풀무질하는 이가 없다.
해마다 새로 탄생하는 신인들을 맞이하기 위해서도 `신춘시`는 부활해야 한다. 저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도 청보리같이 머리를 들고 일어섰던 한 시대의 목소리를 다시 살려야 한다. 겨울이 깊을수록 봄을 노래해야 한다.
<5502>제105話 문학동네에 살고지고...: 12 `삼인시 청록집`
게재일 : 2003년 01월 20일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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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지훈
얼어붙었던 모국어의 강물이 광복의 햇살을 받아 소리내며 풀리고 있었다. 언론․출판․문화는 일제가 단말마적으로 포악을 부리던 태평양전쟁 속에서 숨죽인 채 떨고 있다가 활짝 기지개를 켜며 새 조국건설의 찬가를 부르고 있었다.
해방되던 1945년은 을유년, 그 해를 새기는 뜻으로 을유문화사가 이름을 내걸고 정지용․이상화․신석초등 말과 글을 빼앗겼던 암흑 속에서도 광채나는 시의 혼을 일깨웠던 시인들의 시집부터 출판을 서두른다. 그 책들 가운데 46년 6월 6일자로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삼인시청록집(三人詩靑鹿集)』이 있다. 우리 시문학사에 `청록파`라고 하는 가장 확실한 에콜의 봉우리를 치솟게한 이 시집의 출판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것이 아니고 아주 단순한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새로 문을 연 을유문화사는 윤석중․조풍연이 편집책임을 맡고 있었고 신인인 박두진이 직원으로 입사했는데, 윤석중이 박두진에게 시집을 내줄테니 시를 가져 오라고 했다. 박두진이 시집에 실을 만한 시가 열 편 남짓 밖에 안된다고 하자 그러면 친구들 것이라도 한 권 시집 분량의 시가 있으면 가져오라고 했다. 박두진은 박목월․조지훈 등 `문장`지에 함께 등단한 신진 시인들에게 연락했으나 모두 형편이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다시 수정안이 나온 것이 그러면 세 사람의 시라도 한 권으로 묶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모아진 것이 박목월의 `윤사월``나그네`등 15편, 조지훈의 `완화삼``승무`등 12편,박두진의 `향현``묘지송`등 12편, 합해서 39편이었다.
다음은 시집의 이름을 어떻게 붙일 것인가였다. 이 대목에서 윤석중은 세 사람을 뽑아준 스승인 정지용이 이미 『백록담(白鹿潭)』을 내었으니 거기에 짝을 맞춰 젊은 『청록집』으로 하자고 했다는 것이고, 박두진은 아니다, 박목월의 시 `청노루`에서 따온 것이다라고 증언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두 분의 말이 다 옳은 것일 수도 있다. 시집의 이름을 짓기 위해서는 여러가지를 놓고 선택하는데 박두진의 제안에는 `청노루`에서 딴 『청록집』이 들어있었을 터이고 윤석중의 채택에는 정지용의 `백록담`과 짝을 이루는 쪽에서 각인이 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문장`은 39년 2월 1일 창간되어 41년 4월 일제의 강압으로 폐간되기까지 통권27호를 내며 활발한 창작과 우수한 신인배출로 일제강점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문예전성기를 이뤘던 순수문예지였다. 편집 겸 발행인은 김연만(金練萬)이었지만 실제로 편집과 운영은 이태준(李泰俊)이 도맡아 했었다. 정지용은 청록파 세 시인 이외에도 이한직․김종한 등을 추천해 시단에 내보냈는데 우연히 세 사람의 호흡이 맞았던지 3인시집이 문학사의 한 유파로 남게 된 것이다.
박두진은 39년 6월호에 `향현``묘지송`을, 40년 1월호에 `의(蟻)``들국화`를 발표해 가장 먼저 등단했고, 조지훈은 39년 4월호 `고풍의상`으로 초회 추천은 앞섰으나 40년 2월호 `봉황수`로 박두진보다 한 달 늦게 나왔고 박목월은 `길처럼`이 39년 9월호에, `연륜`이 40년 9월호에 각각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에 추천되어 시단의 새 별이 되었다.
지훈은 막 추천 과정을 마친 40년 경주에 있는 목월에게 만나러 가겠다는 전보를 친다. 목월은 `조지훈 환영`의 깃발을 들고 경주역으로 마중나가서 1주일을 함께 술과 유흥으로 지낸다. 그때 `목월에게`라는 부제가 달린 시 `완화삼(玩花衫)`을 지훈은 준다. "구름 흘러가는/물길은 7백리/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익는 강마을 타는 저녁 노을이여". 이에 목월은 `나그네`로 화답한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이 보다 아름다운 만남, 아름다운 한때가 어디 있을까.
<5503> 제105話 문학동네에 살고지고...: 13 `천상병 유고집` 사연
게재일 : 2003년 01월 21일 [28면] 기고자 : 시인 한국시인협회장 이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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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이 세상은 항상 따뜻하고 항상 살맛나게 아름다운 곳인가. 저 1960년대의 엄혹한 살얼음길을 넘어지지 않고 건너온 사람은 누구이던가. 하루 세끼를 다 못채우고 돌아가 누울 잠자리가 없어도 나라 살림을 맡은 이들에게 눈을 흘기거나 쓴소리 한 번 내지를 수 없던 시대에 어찌보면 어린 아이 같고 어찌 보면 당나라의 선승 한산(寒山)이나 습득(拾得)처럼 세속을 훌훌 벗어던진 것 같은 시인 천상병(千祥炳)이 떠돌고 있었다.
명동거리나 술집에서 만나면 먼저 손부터 내민다.고작해야 요즘 값어치로 오천원, 만원이지만 그 품새는 조금도 비굴하거나 미안한 기미가 없고 오히려 오래 못 받은 빚을 받는 것 만큼이나 당당하다. 술값 좀 쥐어 줬다고 듣기 좋은 말로 립 서비스 하는 일도 없다. 시가 시원치 않다고 느끼는 시인에게는 "시도 못 쓰면서 시인 행세를 하니까 세금을 내야 한다"면서 독설을 하기도 했고, 한번은 천상병의 월평에 오르고 싶은 시인이 술대접을 하니까 인색하게도 "야아 나는 네 시가 좋아질려고 한다"고 했다가 술과 안주가 더 나오자 "야아 나는 네 시가 좋다"고 비로소 인정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뺏긴 것인지 스스로 알아서 준 것인지, 술값인지 밥값인지는 모르지만 천상병과의 거래는 정기적으로 이루어졌던 셈이고 수금하는 쪽이나 납부하는 쪽이나 낯 찌푸리는 일 없이 아주 화기롭게 진행되었다. 수금 날짜가 되어도 그가 나타나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한 것은 지불하는 쪽이다. 그런 평화, 그런 아무일 없는 문학동네에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 떨어졌다.
67년 7월 14일자 도하 일간지들은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동백림간첩단 사건`을 대서특필했고 거기 연루된 간첩(?)들의 명단에 천상병이 끼여 있었던 것이다. 발표에 의하면 북한은 동백림을 거점으로 서백림의 남한 쪽의 각계인사들을 간첩으로 포섭해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화가 이응로, 작곡가 윤이상 등이 연루되었고 그 가운데 강빈구(姜濱口)라는 경제학자가 있었는데, 63년 10월 상순 어느날 명동 유네스코 뒷골목의 술집에서 천상병이 그에게 포섭되어 난수표를 받고 67년 6월 25일까지 1백원에서 6천여원까지 5만여원을 협박하여 갈취착복하면서 강빈구를 간첩으로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빈구는 은행가의 아들로 돈 씀씀이가 좋아서 서울대상대 재학시절부터 천상병이 하숙비도 얻어 쓰는 사이였다. 그 친구를 우연히 명동 거리에서 만난 천상병은 예의 손을 내밀었을 터이고 강빈구는 옛날 친구를 만나 즐겁게 술을 사고 5백원도 쥐어주었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중앙정보부가 시인 한 사람을 얽어넣기 위해 천상병을 못 살게 굴었던 것이다.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으로 조서를 꾸미면서,"술 달라!","담배달라!"고 어리광을 피우는 천상병이 코미디언 김희갑을 닮았다 해서 `천희갑`이라 불렸다고 한다. 중앙정보부에서 석달, 교도소에서 석달, 모진 매와 전기고문을 당하고 선고유예로 풀려난 천상병은 몸도 정신도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71년 7월 어느날부터 수금원 천상병이 보이지 않았다. 한 달, 두 달, 석달..., 고향 부산에 연락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천상병이 기어코 길거리에 쓰러져 행려병사로 사라진 것이다, 하는 추측이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시체검증도 없이 사망진단을 내린 문우들은 유고시집을 내기로 뜻을 모아 그해 12월 유고시집 『새』가 4×6배판 호화장정본으로 조광출판사에서 출간된다.
뒤늦게서야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살아있음이 발견되지만 `고통받은 이세상`이 아니고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시 `귀천`에서 노래한 이 천진한 천상시인 천상병의 처녀 시집은 눈 뜨고 살아 있으면서 `유고시집`으로 포장되어 나왔다.
<5504>제105話 문학동네에 살고지고...: 14 천상병의 저승여비
게재일 : 2003년 01월 22일 [28면] 기고자 : 시인 한국시인협회장 이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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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천상병
세상에는 행복한 걱정거리도 다 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거늘 저승에 갈 여비까지 걱정하다니? 그러나 이 두 줄의 시구의 앞에는 많고많은 시인들 가운데 천상병만이 내지를 수 있는 아픈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 어머니는/고향 산소에 있고/외톨백이 나는/서울에 있고/형과 누이들은/부산에 있는데/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는 `70년 추석에`라는 부제가 붙은 시 `소릉조`의 뒤에 오는 역설의 극치다.
천상병은 1930년 일본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아 귀국, 마산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6․25 전쟁 중에는 미군 통역관으로도 일을 한다. 51년 전시 중 부산에서 서울대 상대에 입학했으며 이때부터 시동인지 `처녀`를 함께 하면서 시 쓰기에 몰두, 52년에는 `문예`지에 `강물`과 `갈매기`로 유치환과 모윤숙의 추천을 완료했고 이어 53년에는 다시 `문예`에 평론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와 `사실(寫實)의 한계`가 조연현에 의해 추천완료되어 50년대의 머리맡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와 평론을 한 손에 움켜쥐는 특유의 저력을 내뿜는다.
64년에는 부산시장의 공보비서로 들어가 한 2년간 월급쟁이가 되기도 했으나 그의 멍에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천성은 앞서갈 수 있는 학력과 뛰어난 글재주가 있음에도 헐벗고 떠다니는 길을 택했다.
한참 후배인 나도 그의 수금처가 되어 거의 정기적인 내방을 받고 있었다. 어느 날은 찾아왔다가 내가 자리에 없으니까 책상 위에 놓인 김소운 수필집 『하늘 끝에 살아도』를 들고 갔더란다. 헌책방에 넘길 양으로 들고나갔던 것을 첫 장을 읽다가 그만 오전 2시까지 독파했노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맨입으로만 나서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잡지도 그러했겠지만 내가 `한국문학`을 할 때는 그의 원고은행이 되어있었다. 청탁하지도 않은 시를 원고지도 아닌 백지에 여러 편을 써다놓고는 실리지도 않은 시의 원고료를 받아가는 것이다. 관훈미술관 3층에 편집실이 있을 때 그는 종로예식장에서부터 인사동 바닥이 다 들리게 쩌렁쩌렁한 소리로 "이근배씨!"를 불러댔고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원고료 내라는 불호령에 편집부 여기자들은 웃음을 참아야 했다.
문단 선후배를 떠나 그와 나는 막역지우가 되고 있었는데 예의 그 정신병원에 들어가 행방불명이 되어야 했던 까닭을 가까운 친구들이나 부인도 아닌 내게만 털어놓았던 것이다. 그의 모든 기록에는 "행려병자로 쓰러져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입원"으로 되어 있지만 내게 들려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