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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한국문학사의 논리와 체계(동아일보)

'한국문학사의 논리와 체계'  
숲 한가운데 늘어선 나무와 나무 사이로 오색 천들이 나부낀다.
요란한 나팔을 울려 늑대들을 일제히 그쪽으로 몰아댄다.
날쌔게 달리던 늑대들이 그 오색장막 앞에서 돌연 멈춰 선다.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로 ‘오인’한 것이다.
머뭇거리는 사이 몰이꾼들이 덮친다.
이것은 발트해 연안에서 늑대를 사냥하는 방법이다.
야생의 지혜를 자랑하는 늑대들이 한낱 오색 천 조각에 속아넘어가다니.

하지만, 그렇게 어이없어 하는 순간,
그 비웃음은 부메랑이 되어 고스란히 우리에게로 되돌아온다.
우리의 지적 영토에 세워져 있는 수많은 경계표지들.
그것들은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저 우리 앞에 던져져 있고,
우리는 감히(!) 그 말뚝들을 넘지 못한다.

근대 학문분과들이 모두 그렇지만,
특히 국문학 연구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계들이 가로놓여 있다.
고전과 현대, 한문과 국문, 남한과 북한 등등,
또 그 하위를 구성하는 수많은 장르구획선들.
주지하듯이, 이 경계표지들은
국문학사라는 대지의 비옥함과 광대함을 반증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단지 외부와의 소통을 거절하고
좁은 영토 안에서 자족해 온 습속의 산물일 뿐.

이 책에는 무엇보다 이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긴 호흡과 드넓은 시선이 담겨 있다.
저자는 첫 번째 글 서두에서 이렇게 진단한다.
한국문학 연구는 7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창작의 영역과 연구의 영역이 소식불통”이고,
“근대 이전의 문학과 이후의 문학 사이에는 단절의 골”이 가로놓여 있으며,
또 현대문학은 남한과 북조선 문학 사이의 분단이 여전히 지속되는 상태라고.
저자가 특히 주력하는 것은 고전문학의 이원적 구조,
곧 한문학과 국문문학의 상호교섭과 공존에 관한 것이다.
20세기 초 이래 국문학 연구는 한문학을 전투적으로 배제하면서 시작됐다.
갑오경장 이후 한글이 ‘국문’으로 격상되면서
국가, 민족, ‘천리(天理)’ 등 온갖 성스러운 표상들이
그 주변을 에워쌌기 때문이다.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 저자의 공부는
출발부터 그런 근대적 표상 너머를 응시하면서 시작됐고,
따라서 이후 저자는 국문학사에 한문학을 복원시키기 위해 각고의 심혈을 기울인다.
“국문학과 한문학의 관련 양상이야말로
한국문학사의 통일적 체계를 수립하는 전략적 요충”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단지 인식론적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직접 두 영토를 넘나드는 실천적 투여가 요구되는 바,
그런 점에서 ‘시조’, ‘삼국사기 열전’, ‘판소리’와 ‘여항문학’ 등을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저자의 세부각론들은 단연 독보적이다.
그런데 국문학과 한문학의 문제는 문자의 문제이기도 하다.
저자가 문자생활의 변혁이 이루어진 근대계몽기를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세기말에서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의 지점까지를 아우르는 이 시기는
한국의 근대가 태생하는 지점이다.
특히 문체문제는 비단 문학사뿐 아니라,
근대성 담론의 배치를 파악하는 핵심고리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하는 사안이다.
‘20세기 최대의 문화적 논쟁’으로 꼽힐 한글전용 논란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지만,
정작 20세기 초 문체 전환이 구체적으로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에 대한 관심은 미미한 편이다.
이 ‘무풍지대’를 저자는 국한문체를 통해 풀어나간다.
‘국한문체’야말로 언문일치라는 표상의 안과 밖,
그리고 앞으로 도래할 문체 등에 대한 사유의 실마리를 다각도로 내장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것을 좀더 심층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의 문자생활 전반을 두루 조명한다.
더할 나위 없이 미세한가 하면,
문득 수 천 년을 단번에 주파하면서
파노라마처럼 조망하는 이 시선의 자유로움이야말로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이런 식으로 저자는 한문학과 국문학이라는 경계,
고전과 현대, 더 나아가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의 경계를 자유롭게 종횡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근대적 문학담론이 구획한 경계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힘은
대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저자는 그것을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말로 압축한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고증학적 태도를 집약하고 있는 이 용어는
현실주의 혹은 대상과의 객관적 거리, 합리적 태도 등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이거야말로 근대적 인식의 산물 아닌가?
또 주지하듯이 이 용어는 실학담론의 모토이기도 하다.
70년대 이후 집중 부각된 실학담론은
18세기에서 근대로의 역동적 모색을 찾는 내재적 발전론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90년대 초반에 쓰여진 몇몇 글들은
그런 담론체계의 생산자로서의 목소리가 뚜렷하다.
잘 알고 있듯이, 이 담론은 80년대 마르크스주의의 도전과 함께
현저하게 역동성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지적 생산을 가로막는 장막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더욱이 최근 들어서는 민족, 민중, 현실주의 등
이 담론의 기본전제들이 발본(拔本)적으로 회의되는 상황에 처한 실정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저자가 내재적 발전론의 내부 깊숙이 있으면서도
항상 그 외부를 환기하는 긴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사구시’를 단지 실학담론의 표상으로만 환원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에 실린 ‘21세기에 구상하는 한국문학사’는 특히 흥미롭다.
이 글은 가장 최근에 쓰여졌을 뿐 아니라 논의의 배치를 변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려한 대미’라 할 만하다.
저자는 여기서 근대성 전반에 대해 명백히 거리를 유지하고자 한다.
문학주의의 환상은 말할 것도 없고,
근대주의가 전제하는 발전과 연속의 논리,
문학사를 지배하고 있는 산술적 평균주의에 대해서도 심각한 비판을 제기한다.
근대적 척도를 벗어나야만
한국문학사를 분절하고 있는 수많은 ‘이질적인 평행선의 관계들을 통합’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새로운 문제설정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저자는 ‘하나의 한국문학사’라는 광활한 대지를 펼쳐 보인다.
물론 그것은여전히 ‘문학사’라는 근대적 표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지만,
텍스트의 저변을 훑으면서 문제를 늘 새롭게 구성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역동적이다.
그렇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이 대지 위에서 마음껏 질주하는 일이 아닐까.

오색 장막 따위에 절대 속지 않는 ‘황야의 늑대’처럼.
그리하여 마침내 ‘한국문학사’라는 경계조차도 가뿐히 넘어설 수 있을 때까지!


고미숙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연구원 국문학 trans@korea.com  
동아일보   2002-06-21 17: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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