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나가야 안이 보인다 |
- 70년대
세계로 나가면 한국이 보인다. 집과 고향의 고마움, 아름다움을 사람 들은 타향살이를 하면서 비로소 배운다. 사물과의 「거리」가 인식의 전제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진리이다. 「안」 에 묻혀 있으면 볼 수 없다. 「밖」으로 떠나와야 된다.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전문가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일반시민의 수준에서도 우리 나라 목기의 아름다움이 널리 인식되고 불과 1∼2년 사이에 몇 만원하던 반닫이장이며 엽전괘 등이 몇 백만원으로 값이 폭등한 것은 1970년대 초의 일이다. 서울의 강남개발이 바야흐로 본격화되고 강북의 한옥에 살던 많은 시민들이 강남의 신축 아파트촌에 줄을 지어 이사를 하게 될 무렵이었다. 우리 나라 아파트 주택이 한국인의 주거생활에 불러일으킨 소리없는 문화혁명. 그것은 일찍이 경험한 일도 구경한 일도 없는, 이른바 「리빙 룸」 중심의 주거생활의 획일주의적인 보급이다. 리빙룸의 넓은 마루와 넓다란 벽면. 그것은 대부분의 한국인이 이전에 가져보지 못했던 사치스런 공간이다. 그 넓은 공간을 뭔가로 메우지 않으면 안된다. 방 한칸의 좁은 온돌방 윗목에 자리잡고 있을 때엔 그처럼 궁상맞고 을씨년스러워 보인 반닫이장이며 엽전괘를, 훤하고 넓다란 벽면을 배경으로 큼직한 리빙룸에 갖다 놓으니 같은 물건이 그리도 당당하고 의젓하게 보인다. 나뭇결을 살린 목재의 아름다움이며 절제된 과묵한 놋 장식이며 천의무봉의 숙련이 빚은 비례감각의 아름다움 등, 예전엔 미처 몰랐던 조선조 목기의 아름다움을 알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목기가 이제는 다소 「공간적인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리빙룸의 넓은 스페이스, 살아 숨쉬던 전통적인 생활과 「시간적인 거리」를 갖게 된 아파트라는 현대적 주거생활, 그리고 반닫이장이나 엽전괘가 이제는 일상생활의 사용목적에서 해방되어 「실용적인 거리」에서 가장 먼 심미적인 「오브제(객체)」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등이, 예전엔 그처럼 가까이 있으면서도 몰랐던 전통 목기의 아름다움을 우리 모두에게 깨닫게 해주었다.
광복이후 제2의 개화기를 맞고 있는 우리에겐 바로 지금의 세계화야말로 우리들이 우리 문화유산을 챙겨보고 그 값어치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는 찬스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의 자금성, 만리장성을 보고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보고, 또는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며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보면서 비로소 한국 문화유산의 특이함과 그 훌륭함을, 그 좋음을 깨닫게 되는 기회도 얻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세계문화유산과 차별화되는 한국문화의 특수성이란 무엇인가. 먼저 부정적, 소극적인 표현으로 그걸 부각시켜 본다면 한국에는 만리장성이나 피라미드와 같이 엄청난 규모를 과시하는 문화유산은 없다. 이른바 「거대주의이란 한국, 한국문화, 한국적인 것과는 가 장 거리가 먼 범주이다. 그뿐 아니라 한국의 문화유산에는 자금성이나 베르사이유 궁전, 그리고 그 내부의 인테리어나 가구집기에서 보는 현란한 기교의 장식같은 것도 없다. 오히려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에서는 덮어놓고 규모 큰 것만을 지향하는 것은 유치하게조차 보았고, 기교만 부리는 것은 천박한 것으로 얕잡아 보기도 하였다. 비단 조형예술, 미술의 세계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음악의 세계에서도 그렇다. 정악이나 속악, 기악곡에서나 성악곡에서나 우리 나라의 음악에서는 소리가 『그저 예쁘다, 깨끗하다, 아름답다』는 것은 전혀 칭찬의 말이 되지 않았다. 그저 예쁘기만, 깨끗하기만, 아릅답기만 한 소리란 성취의 도달점이 아니라, 그로부터 벗어나야 할 출발점으로 생각하였다.
한국문화유산의 긍정적, 적극적 특수성은 이처럼 규모가 큰 것, 기교가 넘치는 것, 그저 예쁘고 화려한 것을 배제한 지평 위에서 절로 부각되는 자연스러움이요, 편안함이요, 평화스러움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초인간적인, 그렇기에 비인간적이기도 한 규모의 극대함이나 기교의 극치를 거부하고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척도에 걸맞은 아늑함과 아담함을 지향한다. 인간 이상도 인간 이하도 추구하지 않는 인간주의. 그것은 인간긍정의 문화요, 그렇기에 그것은 생명긍정의 문화이기도 하다.
인간의 목숨은 이 세상에 있을 때라야 생명이 있다. 인간 긍정, 생명 긍정의 한국 문화는 그렇기에 또한 이 세상을 긍정하는 현세적이고 현세 긍정적인 문화이기도 하다. 이 세상이 그렇대서 살기 좋은 극락세계라는 뜻은 아니다. 한 많은 이 세상이요, 슬픔과 괴로움에 찬 이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하고 「땡감을 따먹어도 이승이 좋다」하는 것이 한국인이요, 한국문화이다. 그것이 한국문화에 일관하고 있는 「수복」의 사상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저 예쁘고 깨끗하고 아름답기만 한 것보다 는 「힘찬 것」 「생명력이 넘치는 것」 「살아있는 것」을 높이 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낳았다고도 볼 것이다. 도대체 막강한 대륙세력과 호전적인 해양세력이 협공하고 있는 동북아시아의 험난한 지정학적 여건속에서 한국민족과 한국문화가 오늘날까지 수천년을 살아남았다는 사실 이상으로 한국문화의 힘차고 생명력있고 살아있는 특성을 더 잘 증거할 또 다른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최정호(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