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자료

한글 - 정광(고려대학교 명예교수)

  

한글

                                  정 광(고려대학교 명예교수)

 

1. 강의의 초점

 

1) 한반도에서 고대시대에는 어떤 문자를 사용하였을까?  -한글 이전의 문자생활

2)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 한자차자표기

3) 한글은 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세종 25년(1443) 계해(癸亥)년 겨울(12월)에

  세종대왕의 親製로 제정된 것이다. 그러데 한글날은 왜 10월 9일로 정하였을까?

   - 훈민정음의 창제와 한글날

4) 한글, 즉 훈민정음은 왜, 누가, 언제, 어떻게 제정하였을까? - 훈민정음의 제정

5) 한글은 우리의 독창적인 문자인가? - 한글과 주변 민족의 문자

6) 諺文, 한글이란 이름의 슬픈 역사

 

 

2. 한반도에서 한글 이전의 문자 생활

 

1) 고조선 시대의 한자유입

한반도에는 古朝鮮의 檀君朝鮮 시대에 한자가 사용되었는지 명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신지의 비사문 등 고유문자가 쓰였다는 가설일 있을 뿐이다.

衛滿朝鮮 시대에는 중국어와 더불어 한문이 들어와서 統治문자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고 적어도 漢四郡 시대에는 한자가 통치문자로서 도입되어 만주 남부와 한반도의 언어를 한문으로 기록하였다. 삼국시대에는 한문이 일반화되어 작구의 역사를 한문으로 기록하기에 이른다.

한문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우리말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한자로 기록하는 것인데 그것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것은 인명, 지명, 관직명과 같은 고유명사다. 그런 경우에는 표의문자인 한자를 표음문자로 하여 표기할 수밖에 없는데 예를 들면 고구려 시조인 東明聖王의 이름이 高朱蒙인데 ‘朱蒙’은 당시 고구려어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의미를 가진 말이었으며 ‘鄒牟, 衆解’ 등으로 표기하였는데 사람의 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2) 한문으로 본 중국 공용어의 변천

漢文은 중국어를 한자로 적은 것이다. 한반도에 유입된 한문은 주로 유교 經典의 언어인 古文과 隋·唐·宋대의 變文들이다. 후자는 梵語를 번역한 한문본 佛經들과 『三國志演義』, 『水滸傳』 등의 문학 작품에 쓰인 한문 문체다. 이러한 한문은 중국 공용어의 변천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대(周代)의 아언(雅言) - 동주(東周)의 수도(首都) 낙양(洛陽)의 표준어.

  춘추(春秋) 시대 - 유교 경전의 언어로 아언(雅言)의 한문 정착. 고문(古文)이라 함.

  전국(戰國) 시대 - 육국(六國)이 모두 자기 나라 말로 표준어를 삼음.

          그러나 상류사회에서는 아언(雅言)이 표준어.

  변문(變文)의 등장 - 주변의 여러 이민족이 자국의 언어에 맞추어 한자 사용.

          돈황(敦煌)의 유물에 변문 자료가 적지 않음.

  한대(漢代)의 통어(通語, 凡通語) -  위진(魏晉) 이후 수(隋), 당(唐)을 거치면서 장안(長            安)을 중심으로 한 통어(通語)는 오랜 세월에 걸쳐 중원(中原)의 공용어로 쓰임.

   송대(宋代)의 운서음

         북송(北宋)이 중원의 변량(汴梁)에 도읍을 정하자 전 시대의 한음(漢音)의 발음을

         유지하려고 많은 운서를 만듬. 를 중고음(中古音)이라 함.

   원대(元代)의 한아언어(漢兒言語) - 근대 한어(漢語)의시작

   명대(明代)의 남경관화(南京官話)

   청대(淸代)의 북경 만다린

   중화민국의 북경관화(北京官話)

   중국의 보통화(普通話)

 

3) 원대(元代)의 한아언어(漢兒言語)

몽골에 의하여 건국된 원(元)이 수도를 대도(大都), 즉 연경(燕京, 지금의 北京)으로 정하자 이곳의 언어가 공용어로서 세력을 얻기 시작하였다. 원의 대도(大都) 주변에는 많은 민족이 모여 살았고 이들이 일상생활이나 교역 등의 접촉에서 언어 소통을 위하여 중국어를 기본으로 하여 스스로 만든 공통어가 있었는데 그것이 ‘한아언어(漢兒言語)’이었다. 

 

4) 이문(吏文)과 한이문(漢吏文)

원대(元代)의 구어(口語)인 한아언어를 기반으로 하여 문어(文語)인 이문(吏文)이 생겨난다. 즉 사법의 소송, 심문, 원정(冤情) 등에서 사용되는 한아언어를 그대로 기록한 이문(吏文)이 생겨났고 이 문체는 원(元)의법률, 행정 문서에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 한반도에서도 한자를 사용하여 우리말의 구어를 기록하는 이두가 발달하자 이를 이용한 이문(吏文)을 만들어 역시 행정 문서의 글로 사용하였다. 원대(元代)의 이문(吏文)을 조선 이문과 구별하기 위하여 한이문(漢吏文)이라고 부른다. 受敎輯錄』(1698)「戶部」‘徵債’조에 “出債成文(중략) 諺文及無證筆者 勿許聽理”이라 하여 이문(吏文)으로 작성하여야 법적 효력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3. 한반도에서의 한자 차자표기

 

 한반도에서는 일찍부터 한문으로 우리말을 기록하였다. 여기서 한문으로 우리말을 적는다는 말은 우리말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한자로 적는다는 뜻인데 고유명사는 어쩔 수 없이 한자의 발음을 빌려 우리말을 그대로 표기하였음을 앞에서 논한 바 있다.

 

 1) 삼국시대 고유명사 표기

  고구려의 고유명사 표기

     卦婁盖切小兄加群自此東廻上里四尺治 - 평양성 城石(평원왕 8년, 566년)

  백제 인명의 한자 표기

     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三十主耳 - 武寧王妃 銀釧銘

  ③ 신라의 고유명사 표기

    異次頓(506~27)

     姓朴字{或作異次 或云伊處 方音之別也 譯云也 觸頓道覩獨等皆隨書之便 乃助辭也

    今譯上不譯下 故云觸 又覩等也}  - 『三國遺事』(권3) 觸滅身

 

 2) 신라에서 鄕札의 사용

    고유명사 표기로부터 임신서기석 표기를 거쳐 신라어를 전면적으로 표기하기까지 몇 단계를 거친다. 그러나 한문이 일반화되면서 이러한 표기는 다시 쇠퇴한다.

 

1단계 - 고유명사 표기에서 우리말을 한자의 음과 새김을 빌어 표기.

2단계 - 우리말 어순의 한자 배열(예. 壬申誓記石의 표기)

3단계 - 吐(문법 요소)의 삽입(예. 南山 新城碑, 591)

4단계 - 석독자, 음독자로 의미부를 표기하고 토를 붙여 신라어를 전면 표기 - 향찰 표기

5단계 - 이러한 향찰 표기는 한문이 일반화되면서 쇠퇴 일로를 걷는다.

 

  ① 입겾(口訣)의 발달

  향찰, 이두는 한자로 우리말을 기록하는 것을 말하고 입겾(口訣), 토(吐)는 한문을 읽을 때에 조사나 어미를 붙여 읽는 것.

 

  ② 이두(吏讀) 표기의 발달

 구결(口訣)은 한문 문장에 조사나 어미, 즉 입겾(구결-토)을 넣어 읽는 방법이다. 그러나 한자를 우리말 어순에 맞추어 배열하고 이두를 넣어 표기하는 방법도 있었는데 이것은 신라시대의 향찰의 방법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것을 이두(吏讀) 표기라고 하는데 이두식으로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표기한 예는 『大明律直解』(30卷)과 『養蠶經驗撮要』(1卷)가 대표적이다.

4. 훈민정음 창제와 한글날

 

한글, 즉 훈민정음의 제정을 둘러싸고 아직도 많은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 그 주요한 쟁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어느 시기에 제정되었는가? 둘째 세종 단독의 창제인가? 集賢殿 학자로부터의 도움은 없었는가?, 셋째 언제 어떤 방식으로 반포 되었는가? 이제 이 각각에 대하여 검토하기로 한다.

 

1) 훈민정음 제정의 시기

 『세종실록』에는 ‘훈민정음’이란 이름이 두 번 기재되었다. 첫 번째는 『세종실록』(권 102) 세종 25년 12월 조에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중략) 是謂訓民正音”이란 기사가 훈민정음의 제정에 관한 최초의 실록 기사다. 그리고 역시 『세종실록』(권 113) 세종 28년 9월조에 “是月 訓民正音成 御製曰國之語音 異乎中國[하략]”이란 기사가 있다. 물론 『세종실록』(권 103) 세종 26년 2월 20일(庚子)에 유명한 최만리(崔萬理)의 반대 상소문이 있으나 여기서는 ‘언문(諺文)’이란 말밖에 없다.

 

  <실록>에 훈민정음 제정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고 새로운 자료와 시각으로 다시 본 훈민정음의 제정 경위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세종 25년(1443) 12월--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친제함. 

세종 26년(1444) 2월 16일(丙申)--韻會의 번역을 명함.

세종 28년(1446) 丙寅--釋譜詳節의 언해 시작.

세종 28년(1446) 9월-- 해례본<訓民正音> 완성.

세종 29년(1447) 2월--<龍飛御天歌> 완성.

세종 29년(1447) 7월--<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 완성.

세종 29년(1447) 9월--<東國正韻> 완성

세종 30년(1448) <月印千江之曲>과 함께 <月印千江之曲釋譜詳節>, 즉 <月印釋譜> 舊卷 간행

세종 30년(1447); 훈민정음 언해 완성, <월인석보> 구권의 권두에 언해 ‘훈민정음’ 첨부 

단종 3년(1455) 4월--<洪武正韻譯訓> 완성

세조 4년(1458)--최항 등의 <初學字會> 편찬.

세조 5년(1459)--<月印釋譜> 新編 간행. 권두에 구권과 같이 훈민정음의 언해를 붙이고 이를

     ‘세종어제 훈민정음’이라 함.

 

2) 한글날은 왜 10월 9일인가?

 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한글, 즉 훈민정음은 세종 25년 12월에 제정되었는데 왜 한글날은 10월 9일인가? 이것은 일제 강점기에 일부 한글학자들이 실록의 두 번째 기사, 즉 세종 28년 9월의 “是月 訓民正音成”의 ‘훈민정음’을 문자 명칭으로 오해하고 9월 마지막 날, 즉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30일을 ‘가갸날’로 정하여 한글이 제정된 것을 기념한 것이 후일 10월 9일로 바뀐 것이다.

  왜 10월의 마지막 날을 10월 9일로 바꾼 것일까? 1940년에 해례본 훈민정음이 소개되자 실록의 두 번째 기사가 이 책의 완성을 말한 것임을 알게 되었고 이 책의 말미에 붙어있는 鄭麟趾의 後序에 “正統 十一年 九月 上澣”의 ‘九月 上澣’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로 한 것이다. ‘上澣’은 제1일부터 9일까지이므로 마지막 9일을 한글날로 정한 것이다.

3) 훈민정음의 반포

<세종실록>을 포함한 <조선왕조실록>의 어디에도 훈민정음을 제정하여 반포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면 <해례본 훈민정음>의 간행을 훈민정음의 頒布로 볼 수 있을까? 세종이 새 문자를 만들어 직접 백성들에게 이 문자의 해설과 사용 방법을 간단히 소개한 것이 ‘세종어제 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세조 때에 간행된 <月印釋譜> 권두에 부재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新編 월인석보>이고 세종이 생전에 首陽大君 등의 『석보상절』과 세종의 『월인천강지곡』을 합편한『월인석보』의 舊卷이 존재하며 여기에 세종이 최초에 작성한 ‘御製序文’과 ‘例義’부분을 언해하여 권두에 부재하였다. 이것이 새 문자의 반포로 보아야 한다.

 

4) 『月印釋譜』와 훈민정음  

원래 현전하는 『월인석보』는 세조 5년(天順 3년, 1459)에 초간본이 간행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세종 30년경에 이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편하여 간행하면서 그 권두에 이미 훈민정음의 언해본을 부재하였다.

<釋譜詳節>의 간행은 현전하는 판본의 권두에 있는 首陽大君 서문에 자세히 설명되었고 그 간행도 서문 末尾에 “正統十二年七月二十五日에 首陽君諱序노라”라는 간기가 있어 세종 29년(1447) 7월 25일에 서문이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월인천강지곡>의 편찬에 대하여는 <月印釋譜> 新編의 卷頭에 부재된 世祖의 御製序文에 “乃進賜覽시고 輒製讚頌샤 名曰月印千江이라 시니” 라 하여 <월인천강지곡>은 <석보상절>을 보시고 곧 釋迦에 대한 찬송을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두 책은 거의 동시에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고 곧 두 책을 합편하여 ‘월인석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으니 이것이 <월인석보>의 舊卷이며 아마도 세종 30년(1448)의 일로 보인다.

 

 

5. 훈민정음의 제정

 

1) 훈민정음은 세종의 친제

<세종실록>의 기사에서 훈민정음 제정에 관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세종실록』(권 102) 세종 25년 12월조의 기사에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중략) 是謂訓民正音”으로 갑자기 나타난다. 그것도 확실한 날자가 없이 12월의 기사 末尾에 이 구절이 들어있다. 그리고 首陽大君이 信眉, 金守溫과 함께 釋迦牟尼의 일대기를 언해한 <석보상절>이 역시 갑자기 간행되고 이어서 세종의 <월인천강지곡>이 뒤를 잇는다. 

 

2) 새 문자의 시험은 가족과 함께

훈민정음이 제정되고 가장 먼저 이 문자를 이용하여 착수한 작업은 ‘운회’의 번역이었는데 이것도 東宮과 왕자들이었다. 즉 새 문자를 제정하고 2개월이 조금 지난 세종 26년 2월 16일에 <고금운회>를 번역하도록 하였으며 여기에 참가한 사람들은 진양대군, 안평대군 등 왕자들이었다. 그리고 竹山 安氏 집안으로 시집간 세종의 따님 貞懿公主가 ‘變音吐着’을 훈민정음으로 정리하여 많은 상을 받았다는 기사가 <竹山安氏族譜>에 전해 온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기사를 보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친히 만들고 이를 시험하기 위하여 왕자들의 도움을 받아 먼저 이 문자를 이용하여 <고금운회>, 또는 <고금운회거요>의 한자음을 표음하였다. 그러다가 정의공주가 ‘變音吐着’의 문제, 즉 토(구결)를 달 때에 한자의 새김을 발려 기록하는 어려움을 새 문자로 표기하여 세종을 기쁘게 하였다. 아마 세종은 이로부터 우리 고유어의 표기도 새 문자로 가능한 것으로 보게 된 것 같다.

세종은 역시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석보상절>을 편찬하면서 우리말 표기를 시험하고 그것으로 안심이 되지 않아서 자신이 실제로 <월인천강지곡>을 지으면서 우리말을 새 문자로 적어본다. 이 두 실험을 통하여 새 문자의 효용성, 즉 한자음의 표음과 우리 고유어의 표기에 적합함을 확인한 다음에 이를 <월인석보> 권두에 ‘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언해하여 전재한다.

물론 새 문자가 완성되었을 때에 이에 대한 성리학, 성운학적인 해설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의뢰하였다. 그들은 훈민정음 이론의 해설서인 <해례본 훈민정음>을 편찬하여 당시 지식인들에게 이 문자가 심오한 이론적 근거를 갖고 제정된 것임을 알리려고 하였다. 이 책은 결코 일반인들에게 새 문자를 소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문자의 권위를 더 하기 위하여 문자 제정의 이론적 근거를 구축할 목적으로 간행된 것이다.

 

 

6. 한글과 주변 민족의 문자와의 관련

 

최근 훈민정음의 제정인 중국 한자 문명에 대항한 북방민족의 문자 제정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즉 중국 북방에 산재하고 있는 교착적 문법구조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유목생활을 영위하는 여러 민족들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면 새 문자를 제정하여 사용함으로써 중국의 한자 문화권과 차별화하려고 하였다. 훈민정음, 즉 한글도 이러한 맥락에서 그 제정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 북방민족의 새 문자 제정 

티베트의 吐蕃 왕국에서 송찬 감포(Srong-btsan sgam-po) 大王이 7世紀 경에 고대인도 음성학을 배우도록 大臣 톤미 아누이브(Thon mi Anu'ibu)를 인도 파견하였고 그가 고대 인도의 聲明學, 毘伽羅論을 배우고 돌아와 그 이론에 맞추어 새로운 티베트 문자를 제정하게 하였다. 이 문자는 매우 효율적인 표음문자이어서 티베트어만이 아니라 당시 주변 여러 민족의 언어를 기록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티베트 문자 제정의 성공으로 북방민족들은 중국의 漢字 문화에 對立하는 유라시아 대륙의 非漢字 문화권을 영위하기 위하여 새 왕국의 건설과 함께 새 문자를 관습적으로 제정하게 되었다.

고구려와 渤海의 뒤를 북방 대초원의 강자로 등장한 遼 太祖 耶律阿保機는 吐蕃 왕국의 신문자 제정을 본떠서 거란(契丹) 문자를 만들었고 遼의 뒤를 이은 金 태조 아구타(阿骨打)도 女眞 문자를 새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유라시아 대륙의 스텝을 통일하고 몽골 우루스의 대제국을 건설한 태조 칭기즈 칸은 몽고 위글자(畏兀字)자를 빌려서 처음으로 몽고어를 기록하였고 중국에 元 나라를 건설한 世祖 쿠빌라이 칸을 제국의 통치를 위하여 파스파자를 새롭게 제정한 문자들이다. 이들은 새 문자를 만들어 새 王國의 추종 세력과 그 子弟들에게 교육하고 이를 시험하여 官吏로 임명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새로운 지배계급으로의 물갈이가 가능하였다. 훈민정음의 창제도 그런 맥락에서 고찰이 가능하다.

훈민정음이 제정된 지 불과 3년도 안 된 세종 28년(1446) 12월에는 하급관리를 선발하는 吏科와 取才에서 훈민정음을 시험에 부과한다. 이어서 세종 29년(1447) 4월부터는 각종 取才에서 훈민정음의 시험을 강화한다. 즉 󰡔세종실록󰡕(권116) 세종 29년 4월 신해(辛亥) 조의 기사에 “先試訓民正音 入格者許試他才各司吏典取才者並試訓民正音-먼저 훈민정음을 시험하고 합격한 자에게만 다른 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하다. 각 관청에서 이전의 취재를 하는 경우 훈민정음을 함께 시험하다-”라는 기사로 이 사실을 알 수가 있고 또 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세종·세조 때에 계속해서 각종 시험에서 훈민정음과 『동국정운』을 부과한다.

 

2) 훈민정음과 파스파 문자

고구려인들은 당시 가장 강력한 문자인 한자를 변형하여 고구려어를 표기하였다. 이러한 표기 방법이 渤海를 거쳐 북방 스텦 지역에 강대한 국가를 건설한 遼와 金에서 契丹 大小字와 女眞 대·소자를 만들게 하였고 이 문자들은 한반도에서 고려시대의 口訣字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元世祖 쿠빌라이 칸의 파스파 문자는 훈민정음 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니 문자 제정의 發想이라든지 字母의 선택, 자음자와 모음자의 구별, 음절 단위의 모아쓰기, 한자음의 발음 전사 등은 모두 훈민정음이 파스파 문자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八思巴 문자는 원 世祖 쿠빌라이 칸이 喇僧 팍스파(八思巴)로 하여금 제정하게 한 것이다. 그는 티베트 문자를 變改하여 새로운 표음문자를 제정하였는데 원 세조 6년(1269)에 쿠빌라이 칸의 詔令으로 공포되었다. 이 문자는 기본적으로는 한자의 발음 표기를 위하여 제작되었으나 몽고어의 표기에도 이용되어 元代에 漢文을 넘어 제국의 正文으로 삼았다. 이 파스파 문자는 고려 후기에 한반도에 유입되어 몽고어 학습과 더불어 널리 알려졌으며 조선 초기의 譯科 시험에는 몽고어 시험에서 이 문자가 출제되었다.

파스파자는 대체로 32개의 字母(-子音字에 해당함)와 7개의 喩母(-母音字에 해당함)로 되었다. 영국 런던에 있는 대영도서관에 소장된 『蒙古字韻』의 鈔本에는 중국 전통적인 36자모에 파스파자의 자음자들을 배열하였다. 훈민정음 17개의 자음을 나타낸 初聲字는 『동국정운』의 23字母에서 온 것이며 이것은 결국 파스파 문자의 31개 자모에 소급한다.  『몽고자운』의 36자모표를 도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牙 音

    舌 音

    脣 音

    齒 音

 喉 音

    半 音

牙 音

舌頭音

舌上音

脣重音

脣輕音

齒頭音

正齒音

 喉 音

半舌音

半齒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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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권상호
반포문(頒布文) <세종대왕(世宗大王)>

國之語音(국지어음)                   나라(조선) 말의 음조ㆍ음성이
異乎中國(이호중국)                  나라의 중심(북경)과 달라
與文字不相流通(여문자불상류통)  문자가 서로 잘 통하지 않는다.
故(고)                                   그래서
愚民有所欲言(고우민유소욕언)    우민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而終(이종)                             종국(終局)에는
不得伸其情者多矣(부득신기정자다의)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予爲此憫然(여위차민연)            내가 이것을 답답하고 딱하게 여겨
新制二十八字(신제이십팔자)         새로 스물여덟 글자(㓞字)를 만들었다.
​欲使人人易習(욕사인인이습)      원컨대 각자(人人) 쉽게 익혀서
便於日用耳(편어일용이)            날마다 편리하게 쓰기를 바랄 뿐이다.  

서문(序文) <정인지(鄭麟趾)>
有天地自然之聲(유천지자연지성)  천지자연에 소리가 있다면
則必有天地自然之文(즉필유천지자연지문) 반드시 그에 맞는 글이 있어야 한다
所以古人(소이고인)               그래서 조선(祖先)께서는
因聲制子(인성제자)                 그 소리에 부응하는 글자를 만들었다.
以通萬物之情(이통만물지정)       그로써 만물의 뜻을 통하게 하고
以載三才之道(이재삼재지도)       천지인(天地人)의 이치를 담았는데
而後世不能易也(이후세부능역야) 이는 후세에도 바뀌지 않았다.
 
然(연)                            그러나
四方風土區別(사방풍토구별)     사방 풍토가 나누어져 다르니
聲氣亦(성기역)                     말소리와 그 기운 또한
隨而異焉(수이리언)              그(풍토)에 따라 달라졌다.
盖外國之語(개외국지어)           나라 밖의 말은 
有其聲而無其字(유기성이무기자) 그 말소리는 있으나 그 상응 글자는 없다.
 
假中國文字(가중국문자)           (그러한) 중심나라의 글자를 빌려서
以通其用(이통기용)              통용 시키는 것은
是猶鑿之也(시유착지야)           오히려 그 간극을 더욱 벌리는 것이다.
豈能達而無乎(개능달이무호)      어찌 능히 통달한다 해도 차이가 없겠는가?
要皆(요개)                            요컨대 모두
各隨所處而安(각수소처이안)      각자 그 처지에 따라 편안하면 된다.
不可强之使同也(불가강지사동야)그것을 억지로 같게 할 수는 없다.
 
吾東方禮樂文章(오동방례악문장)   우리 동방의 예악과 문장은
擬華夏(의화하)                     화하(華夏: 화산서쪽...) 것과 유사하다
但                                     다만.
方言之語不與之同(방언지어불여지동) 지방언어(方言之語)는 그와 같지 않다.
學書者(학서자)                     (그래서) 글을 배우는 사람은
患其旨趣之難曉(환기지취지난효)  뜻을 깨치기 어려워 근심한다.
獄者(옥자)                          법 집행자는
疾其曲折之難通(질기곡절지난통)   통용이 어려운 곡절 파악에 고민한다.
 
昔新羅薛總(석신라설총)             옛날 신라 설총이
始作吏讀(시작이두)                 처음으로 이두를 만들었는데
官府民間至今行之(관부민간지금행지) 관민 간에 아직도 그것을 쓴다.
然皆假字而用(연개가자이용)         그러나 모두 字를 빌어 사용하여
或澁或窒(혹삽혹질)                  어떤 것은 어색하고 어떤 것은 맞지 않는다.
 
非但(비단)                           뿐만 아니라
鄙無稽而已(비무계이이)              속되고 이치에 맞지 않다.
至於言語之間(지어언어지간)          말을 글로 표현하는데 이르러서는
則不能達其萬一焉(즉불능달기만일언)  그 만분의 일도 반영하지 못한다.
 
癸亥冬(계해동) 我殿下(아전하)    계해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創制正音二(창제정음이십팔자)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여
略揭例義以示之(략게례의이시지)   간결한 용례(例義)를 들어 보이시고
名曰訓民正音(명왈훈민정음)       훈민정음이라 명명(命名)하셨다.
 
象形而字倣古篆(상형이자방고전)  고전(古篆)을 본떠 상형철자를 만들었다.
因聲而(인성이)                     소리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音犀七調(음서칠조)               음은 칠조(七調)에 맞고,
三極之義(삼극지의)               천지인(三極)의 뜻과
二氣之妙(이기지묘)               음양(陰陽)의 묘를
莫不該括(막부해괄)                  모두 포괄하였다.
 
▲ 삼현삼죽(三絃三竹)과 칠조(七調)
-三絃 : 거문고(玄琴)/가야금(伽倻琴)/향비파(鄕琵琶)
-三竹ㆍ삼금(三笒) : 대금(大笒)/중금(中笒)/소금(小笒)
-七調 : 평조(平調)/월조(越調)/출조(出調)/준조(俊調)/황종조(黃鐘調)/
           이아조(二雅調)/반섭조(般涉調) → 서양의 도레미파솔라시도
 
以二十八字而(이이십팔자이)      이 28자로도
轉換無窮(전환무궁)               무궁무진한 전환,
簡而要(간이요)                      간단명료한 요약,
精而通(정이통)                       정치(精緻)한 통달이 가능하다.
故(고)                             그래서
智者不終朝而會(지자부종조이회)  지자(智者)는 조회가 끝나기 전에,
愚者可浹旬而學(우자가협순이학)  우자라도 열흘(浹旬)이면 배울 수 있다.
 
以是解書可(이시해서가) 이로써 글 해석이 가능하여
以知其義(가이지기의)    그 뜻을 알 수 있다.
以是聽訟可(이시청송가) 이로써 송사 심리가 가능하여
以得其情(이득기정)      그 실정(實情)을 파악할 수 있다.
 
字韻則淸獨之能辨(자운즉청독지능변) 자운(字韻)의 청탁을 구별할 수 있고
樂歌則律呂之克諧(악가즉율려지극해) 악가의 율려(律呂)처럼 조화를 이룬다.
無所用而不備(무소용이불비)         쓰는 데 갖추어지지 않은 바가 없고,
無所往而不達(무소왕이부달)         어느 하나 통달하지 않는 바가 없다.
▲ 律呂 : 율음(律音)과 려음(呂音). 륙률(六律)과 륙려(六呂)
 
雖風聲鶴(수풍성학)               바람소리, 학 울음소리,
鷄鳴狗吠(계명구폐)               닭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까지도
皆可得而書矣(개가득이서의) 모두 글로 적을 수 있다.
逐命詳加解釋(축명상가해석) 드디어 (上께서) 상세한 설명을 더해서
以喩諸人(이유제인)         민중을 가르치라 명하셨다.
 
於是 臣(어시 신)                                이에 신(정인지)은
與集賢殿應敎臣崔恒(여집현전응교신최항) 집현전 응교 신 최 항,
副敎理臣朴彭年(부교리신박팽년)           부교리 신 박팽년,
臣申叔舟(신신숙주)                         신 신숙주,
修撰臣成三問(수찬신성삼문)              수찬 신 성삼문,
敦寧府注簿臣姜希顔(돈녕부주부신강희안) 돈녕부주부 신 강희안,
行集賢殿副臣撰李塏(행집현전부신찬이개) 행집현전부수찬 신 이개,
臣李善老等(신이선로등)                 신 이선로 등과 더불어

謹作諸解及例(근작제해급례) 삼가 여러 해(解 )와 예(例)를 짓고
以敍其傾槪(이서기경개)           요약본을 서술함으로써
庶使觀者(서사관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不師而自悟(부사이자오)          스승 없어도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였다.

若(약)                            그러함에도
其淵源(기연원)                  그 심오한 연원이나
精義之妙(정의지묘)             정치(精緻)한 묘의(妙意)에 대해서는
則非臣等之所能發揮也(즉비신등지소능발휘야) 신들이 드러낼 수 없는 바다.
 
恭惟(공유)                          삼가 생각하건대
我殿下天之聖(공유아전하천지성)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성인으로서
制度施爲超越百王(제도시위초월백왕) 법제와 시정(施政)업적이 백왕을 능가한다.
正音之作(정음지작)                   정음을 지으심도
無所祖述(무소조술)                   선인(先人)의 전수 설명(述) 없이
而成於自然(이성어자연)           스스로 이루셨다.
豈以其至理之無所不在(개이기지리지무소부재) 그 이치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니
而非人爲之私也(이비인위지사야)  사람의 사사로운 작품이 아니다.
  
夫東方有國(부동방유국)              대저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
不爲不久(불위불구)                    아주 오래이나
而開物成務之大智(이개물성무지대지)  문물을 창조하고 사업을 성취할 그 큰 지혜가
盖有待於今日也歟(개유대어금일야여) 어찌 오늘을 기다렸음이 아니겠는가!
 
正統十一年九月上澣(정통십일년구월상한) 정통 11년(1446丙寅) 9월 상순
 
資憲大夫禮曹判書集賢殿大提學(자헌대부예조판서집현전대제학)
知春秋館事世子右賓客(지춘추관사세자우빈객) 臣鄭麟趾(신정인지)
​拜手稽首謹書(배수계수근서)
자헌대부·예조판서·집현전 대제학·지춘추관사·세자우빈객, 신 정인지
두 손 모아 배례하고 머리 조아려 삼가 쓰다.
 
▲ 正統 : 명(眀)나라 정통제(正統帝 :1436-1449) 연호(秊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