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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볼 것인가
도정 권상호
봄은 닫혔던 오감을 여는 계절이다. 특히 視覺(시각)의 축복을 가장 많이 누릴 수 있는 계절이다. 청각 · 후각 · 미각 · 촉각도 새롭지만, 시각이 가장 신비롭게 와 닿는 계절이라 할 수 있다. 둥지 틀기에 바쁜 아름다운 새소리, 이따금 코끝을 스쳐 지나가는 꽃향기, 담백하고 은근한 냉잇국 맛, 긴 겨울잠에서 초목을 일깨우는 봄 햇살의 부드러운 떨림도 빼놓을 수 없는 감각이지만, 초목이 누리에 푸름을 토하고 온갖 꽃들이 화사한 빛깔의 꽃등을 달고 마중 나오면, 봄은 분명코 시각의 계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봄의 어원은 눈으로 ‘보다’의 명사형인 ‘봄’에서 온 게 아닐까.
‘보다’와 관련한 한자로는 ‘見(볼 견), 觀(볼 관), 看(볼 간), 視(볼 시), 監(볼 감), 覽(볼 람), 閱(볼 열), 瞻(볼 첨), 睹(볼 도), 審(살필 심)’ 등 매우 많지만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조금씩 의미의 차이가 있다. 와우.
우선 시각을 맡은 기관은 ‘目(눈 목), 眼(눈 안)’이 있다. 目(목)은 눈의 겉모양을 상형한 글자이고, 眼(안)은 상이 맺히는 망막을 가리킨다. 目(목) 자의 자형은, 처음에는 눈 모습과 같이 가로로 길게 썼는데 나중에는 세로로 변했다. 많은 글자가 길쭉하게 변했는데, 이는 글을 세로쓰기에 맞춘 결과로 본다. 오잉.
‘보다’라는 뜻의 대표적인 글자는 見(볼 견)이다. 눈을 뜨는 순간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대상을 보는 것이 見(견)이다. 見(견)은 사람[儿(인)]이 눈을 뜨고[目(목)] 앞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여기에서 ‘견해’의 뜻으로 발전한다. 見學(견학), 見聞(견문), 意見(의견), 見解(견해), 卓見(탁견), 短見(단견), 偏見(편견), 管見(관견), 異見(이견). 私見(사견), 見利思義(견리사의), 見蚊拔劍(견문발검), 見危授命(견위수명), 見物生心(견물생심), 目不忍見(목불인견), 百聞不如一見(백문불여일견)이로다.
觀(볼 관)은 황새[雚(관)]가 먹이를 잡아먹기 위해 바라보고[見(견)] 있는 모습에서 ‘자세히 보다’의 의미이다. 여기에서 ‘觀象(관상)’이나 ‘觀相(관상)’의 예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하여 보다.’라는 뜻으로 발전한다. 觀光(관광), 觀察(관찰), 觀照(관조), 觀念(관념)이로다.
看(볼 간)은 ‘手(손 수)+目(눈 목)’의 구조이다. 看板(간판)의 예에서 보듯이 사물을 똑똑히 보기 위하여 눈 위에 손을 얹고 살피는 모습이다. 看護師(간호사)에 看(간) 자를 씀은, 눈으로는 환자를 잘 살피고 손으로는 잘 어루만져야 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看病(간병), 看過(간과), 看做(간주), 走馬看山(주마간산)이로다.
視(볼 시)는 ‘示(보일 시)+見(볼 견)’으로 示(시)가 음을 나타낸다. 보여주는[示(시)] 것을 보는[見(견)] 것이 視聽覺(시청각) 교육이다. 여기에서 ‘자세히 살펴보다’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見(견)이 눈 뜨면 저절로 보이는 ‘see’라면, 視(시)는 의식적으로 자세히 보는 ‘look’에 해당한다. 視力(시력), 監視(감시), 重視(중시), 輕視(경시), 視線(시선), 視察(시찰), 無視(무시), 視神經(시신경), 心不在焉視而不見(심부재언 시이불견: 마음이 없으면 봐도 보이지 않는다.)이로다.
監(볼 감)은 본래 거울[鑑(거울 감)]의 의미였다. 거울이 없던 옛날에는 그릇의 물이 거울을 대신했다. 사람[人(인)]이 그릇[皿(명)]의 물[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는[臣(신)] 모양이 監(감)이다. 여기에서 ‘감독하다’의 의미로 확장된다. 監視(감시), 監督(감독), 監獄(감옥), 監察(감찰), 校監(교감), 國政監査(국정감사), 不法監禁罪(불법감금죄)로다.
覽(볼 람)은 ‘監(감)+見(견)’으로 이루어진 글자로 ‘두루 보다’의 의미이다. 閱覽室(열람실), 觀覽客(관람객), 遊覽(유람), 供覽(공람)이로다.
閱(볼 열)은 문[門(문)]을 지키며 지나는 사람이나 車馬(거마)를 檢閱(검열)하는 모습이다. 여기에서 ‘점검하다. 책을 읽다’의 뜻으로 발전했다. 閱覽室(열람실), 閱兵式(열병식)이로다.
瞻(볼 첨)은 처마[簷(첨)]를 쳐다보는 모습에서 ‘먼 곳을 우러러보다’라는 의미로 확장된다. 瞻星臺(첨성대)로다.
睹(볼 도)의 古字(고자)는 覩(볼 도)이다. 도읍[都(도)]을 ‘지켜보다’의 뜻이다. 目睹(목도)로다.
끝으로 審(살필 심)은 ‘집[宀(면)]에 쳐들어온 짐승의 발자국[番(번)]을 자세히 살펴서 어떤 짐승인지 알아내다.’에서 ‘자세히 살피다’의 의미가 되었다. 審判(심판), 審問(심문), 審査(심사), 誤審(오심), 審議(심의), 抗訴審(항소심)이로다.
봄에는 보이는 것도, 보고 싶은 것도 많다. 더구나 올봄에는 국회의원 후보자도 봐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알아야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반은 육안으로 반은 마음으로 보도록 하자. 이른바 心眼(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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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
마음을 왜 비워야 하는가?
비운다는 것은 버린다는 것이다.
낡아서 더 이상 쓰지 못하거나
상해서 먹을 수 없을 때
우리는 내다버리게 된다.
말하자면
쓰레기를
그 때 그 때 내다버리지 않으면
냄새가 나고 주변을 오염시키며
계속 방치하면
집안이 쓰레기 더미가 되고 만다.
이와같이 과거에 형성되어 내려오는
전통적인 儀式이나
사고방식 행동양식 등이
고정관념화되고
이데올로기화되고 도그마가 되어
하나의 관례가 되고
상식이 되고
윤리도덕으로 정착되어
우리를 속박하고
우리 위에 군림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쓰레기 더미로 꽉차게 마련이다.
종교적인 도그마이든
전통적인 윤리도덕이든
일단 우리의 마음 안에
하나의 신념체계로 정착하게 되면
그런 생각의 뭉치들이
우리를 구속하고 강제한다.
그러므로
어떤 결론이나
신념체계를 신봉하는
어떤 고정관념도
눈에 띄는 즉시 버리지 않으면
마음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마음이
무엇인가에 조건부여된다는 것은
마음의 신선도가 떨어져간다는 말도 된다.
그런 고정관념이 많을수록
고루한 사람이고
복잡한 사람이고
갈등을 많이 느끼는 사람이고
자기와 주변을 오염시키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생각이나 사상이나
물질의 노예가 되고 만다.
그것은
조건부여(입력)와
조건반사(출력)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나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적인 삶의 수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다운 삶을 영위하려면
항상
자기의 안을 돌아보면서 살아야 한다.
마음의 쓰레기가 없는지 돌아보아
무엇이든
자기를 속박하거나
강제하는 기미가 보이면
마음의 쓰레기인 줄 알고
그 마음을 비워야 한다.
그 어떤 학문적인 결론이나
종교적인 신념이나 주의 주장이
자기의 마음을 점령하고
자기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무조건 마음을 비워야한다.
심지어
사랑하고 봉사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관념일지라도
일단 쓰레기로 간주하고
그러한 마음의 부담이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리하여 언제나 마음을 비워
싱싱하고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해탈이고 대자유다.
이 일은
어느 누가 대신 해주지 못한다.
예수도 석가도 대신 해주지 못한다.
오로지 자기가 자기를 돌아보아
몸소
마음의 쓰레기를 버리는 수밖에는 없다.
그것이 마음비우기이다.
마음을 비워야
낡은 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그것이 얼마나 지금의 현실에
거추장스럽고
불편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으므로
즉시 새 법을 만들어
자기와 주변 사람을 구할 수 있다.
마음이 비워져야
비로소
개혁도
창조도
개벽도 이루어진다.
출처 : 집중력 계발 봄나라 (http://bomnar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