棗栗枾梨(조율시리)
도정 권상호
두어 달 내내 비가 오더니 마침내 음력 팔월 초저녁 하늘에 반달이 덩실 떠 있다. 저 달이 둥글어지면 추석이다. 추석(秋夕)이 한가위, 仲秋節(중추절), 嘉俳日(가배일)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걸 보면 예부터 인기 있는 명절임이 틀림없다. 이날엔 추수를 끝내고 햅쌀과 햇과일로 조상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차례를 지낸다. 특히 반달 또는 온달 모양으로 빚은 송편(松편)은 솔잎 위에 쪄서 만들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석의 별미이다. 추석이 다가오면 솥 안에도 달이 뜨고, 동산에도 달이 뜬다.
추석에는 고향을 방문하는 지독한 전통이 있어서 民族大移動(민족대이동)이 일어난다. 추석을 전후하여 뭍길은 물론 바닷길, 하늘길까지 빼곡하다. 추석을 쇠러 추석빔을 차려입고 추석 길을 떠나는 마음은 가을 하늘처럼 휑하다. 가을 하늘의 구름처럼 외롭게 살아가다가 헤어진 피붙이를 만나 쌓였던 얘기를 가을 들판처럼 나눈다.
떠들썩하게 작은추석을 보내고 나면 추석 아침에는 어쩔 수 없는 경건으로 차례상 앞에 둘러서서 茶禮(차례)를 지내게 된다. 차례상은 유별나게 푸짐한데, 제물을 陳設(진설)하는 데는 집안에 따라 복잡한 격식이 있다.
차례상은 대체로 5줄로 진설되는데, 우리의 경우는 조상이 앉아 계시는 神位(신위) 입장에서 생각하여 진설한다. 첫째 줄은 진메, 송편 등의 주식, 둘째 줄은 젓가락으로 집기 어려운 적(炙) 종류, 셋째 줄은 숟가락으로 떠서 드실 湯(탕) 종류, 넷째 줄은 안주용 포와 나물 및 가끔 들고 마실 식혜, 끝줄은 디저트용 과일과 과자를 놓는다.
신위 쪽에서 보면 오른쪽에서부터 대추, 밤, 감, 배, 기타 과일, 과자 순으로 놓는다. 여기에서 특히 대추, 밤, 감, 배 등은 빼놓을 수 없는데 이를 棗栗柿梨(조율시리)라고 한다. 그런데 차례상 또는 제사상을 진설하는 데에는 말들이 많다. 左右(좌우)와 東西(동서)가 헷갈리고, 神位(신위) 중심이냐 祭官(제관) 중심이냐에 따라 달리 해석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생겨난 한자성어가 ‘他人之宴 曰梨曰柿(타인지연 왈리왈시)’이다. 남의 잔치에 배 놓아라 감 놓아라 한다는 뜻으로, 남의 일에 공연히 간섭하고 나섬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우리 속담은 ‘남의 제사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한다.’인데 순서만 다를 뿐, 같은 의미이다. 재미있는 것은 감과 배의 순서 때문에도 아직 논란이 많다.
진설 방법은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각 집안에 전해 오는 관습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놀라운 것은 제상 과실의 상징적 의미이다. 대추가 가장 먼저인 것은 씨가 하나로 한 분뿐인 임금을 뜻하고, 밤은 한 송이에 세 톨이 박혀 있으므로 三政丞(삼정승)을 나타낸다. 그리고 감(곶감)과 배의 씨앗은 각각 6개, 8개이므로 六曹判書(육조판서)와 八道觀察使(팔도관찰사)를 상징한다. 그 외 참외, 수박, 포도 등을 올리기도 하는데 이러한 과일은 씨가 많으므로 수많은 百姓(백성) 곧 억조창생(億兆蒼生)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차례상에는 한 나라의 모든 분을 모신 형국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선조는 자연의 열매를 보고 국가 체제를 만든 듯하다.
대추는 한자로 棗(대추 조)라고 한다. 갈고리 모양의 가시 네 개가 보이는가. 대추는 大棗(대조)에서 온 말로 다른 이름은 목밀(木蜜)인데 이름처럼 잘 익으면 꿀맛이 난다. 祖上(조상)과 朝廷(조정) 대신을 모심에 大棗(대조)가 없을 수 없다. 대추나무에는 가시가 많아서 朿(가시 자) 둘을 위아래로 붙여 썼다. 옆으로 붙여 쓰면 棘(가시 극)이 된다. 가시와 칼로 함께 찌르는 무서운 글자는 刺(찌를 자)이다. 가시와 창으로 동시에 찌르면 刺戟(자극)이요, 말로 변죽을 울리며 찌르는 것은 諷刺(풍자)로다.
밤은 栗(밤 율)로서 전서에는 나무 위에 가시 달린 밤송이 세 개가 붙어 있다. 밤에는 가시가 있으니 戰慄(전율)을 느끼게 한다. 나중에 ‘두려워하다’는 뜻의 한자로 慄(두려워할 률) 자를 새로 만들었다. 지금 중국에서는 간체자 栗(율)로 통용하고 있다.
감은 枾(감 시)로서 쉽게 柿(시)로 쓰기도 한다. 枾(시) 자는 갑골문과 금문에는 보이지 않고 소전에 처음 보이는데 市(시장 시)가 발음을 나타낸다. 익기 전에는 청색으로 떫은맛이 나지만 익으면 안팎이 붉은색으로 단맛이 난다. 껍질을 깎아 만든 곶감은 적갈색으로 달콤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특색이다. 이러한 곶감은 연중 보관하기가 쉽고, 따라서 시장에 내다 팔기에 좋으므로 市(시) 자를 붙인 것이다. 갑자기 紅柿(홍시) 생각이 나지만 차례를 지내고 먹어야지.
배는 梨(배 리)로서 ‘利(이로울 리) +木(나무 목)’으로 이루어진 글자로 ‘이로운 나무’라는 뜻이다. 속담에 ‘배 먹고 이 닦기’란 말이 있듯이 얼마나 이롭고 유용한 과일인가. 후식으로도 커피와 비길 수 없는 최고 명품이다. 梨花(이화), 黃梨(황리)의 예가 있다.
여기서 利(리) 자를 살펴보자. 이 글자는 본래 ‘날카롭다’의 뜻이었다. 칼[刂(도)]로 벼[禾(화)]를 베는데, 벼알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다. 즉, 칼날이 날카롭다는 데에서 출발하여 의미가 확장되어 ‘이롭다’의 뜻도 지닌다. 銳利(예리), 權利(권리), 利用(이용), 利益(이익) 등의 예가 있다.
마르지 않는 의욕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살아온 그대, 넉넉한 추석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