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9-2
조선후기의 대표적 서예가이었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선생의 유적지로 추사고택과 화순옹주묘(영조의 2녀)및 정려문이 있으며 추사선생의 묘와 천연기념물 제 106호인 「예산의 백송」 그리고 추사께서 수도하던 화암사가 인근에 있다.
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께서 건립한 18세기 중엽의 건축물로써 당시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후손이 세거(世居)해 오다가 1968년 타인에게 매도된 것을 충청남도에서 1976년 1월 9일 지방문화재 제43호로 지정하고 동년 4월 25일 매수(賣收)하였다.
그후 故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한 배려로 유적정화사업을 1976년 9월 4일 착공하여 1977년 6월 27일 준공을 보았으며 1977년 9월 22일부터 충청남도 추사고택관리사무소를 설치하여 관리하여 오다가 1980년 1월 1일부터 예산군 추사고택관리사무소로 설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 김정희 선생은 1786년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영조의 부마이신 월성위 김한신의 증손이며, 병조참판인 김로경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김로영에게 입양되었다.
선생은 조선왕조 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로서 벼슬은 병조판서와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으며 당시의 당쟁에 휩쓸려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0여년간 유배생활을 보내고 말년에 생부 魯敬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71세를 일기로 1856년 10월 10일 작고하였다.
추사 김정희 선생
선생은 단순한 예술가에 그치지 않고 시대사조의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노쇄한 조선왕조의 구문화 체제를 탈피하여 신문화 전개를 가능케한 실학자인 동시에 선각자이기도 하다.
선생은 북학파의 거벽으로 청조의 고증학풍을 도입하여 학문으로는 경학(經學), 불교학, 금석학(金石學), 문자학, 사학(史學), 지리학,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박통하여 북한산 기슭의 비석이 신라진흥왕의 순수비임을 고증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원당집(院堂集),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원당척독 (院堂尺牘), 담연제집(潭연濟集) 등이 있다. 이와같이 광범위하고 철저한 학문과 천부의 재질을 바탕 으로 한 추사의 예술은 시, 서, 화, 전각(篆刻)등에도 뛰어났으며 書道는 추사체라는 독자일문을 열어 서예사상 至高의 경지를 이룩하였다. 작품으로는 「묵란도(墨蘭圖), 묵죽도(墨竹圖)」와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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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여행지로 내포지역을 꼽는 여행가들이 많다. 내포는 조선 중기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충청도 가야산 둘레 10개 고을을 묶어 일컬은 말이다. 백제 옛땅,지금의 충남 서북 6∼7개 시·군에 해당된다.
둥글둥글 나직한 산들, 넉넉한 들판. 충청도 사람의 느릿한 말씨와 행동이 산천을 닮았음을 깨닫게 된다.
600살 은행나무와 맹씨행단
이중환은 충청도를 "물산은 영 호남보다 못하나 산천이 평평하고 예쁘며, 서울에 가까워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여러 대를 서울에 사는 집으로 이 도에 전답과 주택을 마련해 생활의 근본되는 곳으로 만들지 않은 집이 없다.…충청도에서는 내포가 제일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 충청도가 양반의 고장인 까닭을 알만하다.
내포지역은 유서 깊은 양반문화와 백제 유적들, 그리고 편안한 산천이 따사로운 햇살 내려 쬐는 가을들녘처럼 여유롭게 어우러져 있다.
6백년된 두그루 은행나무의 노랗게 물든 잎들이 온 하늘을 물들이고 있을 아산 맹씨행단(孟氏杏壇)은 한해중 요즘이 가장 아름다운 때다. 맹씨행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 고종이 하사한 참판댁이 있는 외암리 민속마을, 추사 신필(神筆)의 고향 추사고택 등 내포지방의 사대부 살림집이 이어져 있어 테마여행지로 적격이다.
온양 남쪽 약 8㎞, 설화산을 주산으로 맹씨행단은 북동 산록, 외암리 민속마을은 남서쪽 산자락에 자리잡았다.
맹씨행단은 조선 초 청백리이자 명정승 맹사성이 살던 고택 일대를 말한다. 높다란 석단,두터운 돌담을 거느리고 북동향한 집 둘레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병풍처럼 원림(園林)을 이뤘다. 1959년까지 후손들이 살았지만 지금은 비어 있다.
고려말 최영 장군이 살던 집을 그의 손녀사위 맹사성이 물려받았으니 적어도 6백50년쯤은 됐다. 여러차례 수리했지만 고려후기 건축의 법식이 상당히 남아 있다고 한다. 27평의 살림집은 H자형 맞배집이다. 정면 4칸, 측면 3칸 집의 가운데 2칸에 대청을 들이고 양쪽 날개에 방 두 칸씩을 들인 완전대칭 구조다.
앞마당 두 그루 은행나무는 맹사성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가을이면 몇 가마씩 은행을 거둔다. 은행나무 때문에 행단이라고 불리는데, 공자의 고향 중국 곡부의 행단처럼 은행나무 아래서 강학(講學)했기 때문에 행단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외암마을은 4백년 넘은 예안 이씨 세거지(世居地)로 지금도 80여 가구가 살고 있는 민속마을이다.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다. 마을에는 1백∼2백년전 원형을 많이 간직한 영암댁 참판댁 외암종가댁 등 기와집 10여 채와 주변 초가집 등 50여 채가 남아 있다.
마을 전체가 중요 민속자료
참판댁이 대표적이다. 1백30여년 전 고종이 하사해 지었다고 한다. 평면구조가 '터진 ㅁ자'형인 집안을 살펴 보면(허락을 얻어야 한다.) 민속박물관 다름없게 옛 살림들이 많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 마을의 매력은 길고 긴 돌담장과 담들로 이어진 고샅길이다. 자연석만으로 쌓은(막돌 허튼층쌓기) 나직한 돌담은 사람 키보다 낮아 배타적이지 않고 정겹다. 두께가 어림잡아 아랫부분 2m,위 1∼1.5m. 마을 담장 총연장이 5㎞나 될 정도로 담의 규모는 대단하다.
추사고택은 추사 김정희가 태어난 집이다. 바로 옆에 추사의 묘가 있고, 고택 앞을 지나 7백m쯤 가면 추사 고조부 묘와 추사가 심은 백송(천연기념물 106호)고목이 있다. 두 묘사이에는 증조부와 증조할머니인 화순옹주의 합장묘가 있다.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는 남편이 죽자 밥 숟가락을 놔 버리고 부왕의 간곡한 당부도 뿌리친 채 사랑을 좇아 이승을 떴다.
추사 신필 남아있는 생가
고택은 대문채와 ㄱ자형 사랑채, ㅁ자형 안채, ㅡ자형 사당채가 차례로 계단을 이루며 일곽을 이루고 있다. 집이 주는 느낌은 화려함보다는 단아함이다. 잘 생긴 나무나 바위를 보았을 때처럼 흐믓함이 있다. 집안 구석구석에 세심한 배려가 깃들여 격조 높은 반가 살림집의 한 모범을 보여 준다. 집 지을 때 충청도 53개 고을에서 한 칸씩 나눠 맡아 53칸을 지었으며 서울 목수를 불러 시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집을 찾는 맛이 이걸로 다는 아니다.사랑채 마당 화단 앞 돌 해시계에 새긴 석년(石年)을 비롯해 기둥마다 걸린 주련(柱聯)과 화암사 법당 뒤 바위에 새겨진 추사의 신필들, 집안 구석구석 세련된 멋을 부린 갖가지 창호들, 백송이나 추사 묘소 앞의 반송, 화순옹주의 순애보,철 따라 바뀌는 고택 동구 밖 사과밭이나 들판 풍경…. 이 가운데 한 둘만 마음으로 느끼고 와도 미련없는 걸음이 될 것이다.
귀로에 삽교나 아산만 방조제에서 노을을 즐기거나 도고나 아산에서의 온천욕도 윤택한 여행 마무리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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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거리 |
청지기식당(041-545-9392)은 내포지역에서는 꽃게장백반(1만5천원)으로 꽤 자리를 굳혔다. 꽃게 맛이 가장 좋은 5∼6월 배에서 잡자마자 급속 냉동한 알배기 꽃게를 대량 확보해 사철 같은 맛을 유지하며 짜지 않게 담그는 것이 맛의 비결이다. 택배 판매(3㎏ 4만2천원)도 한다. 한우갈비찜(1만2천원)과 우거지갈비탕(5천원)도 괜찮다. 24시간 영업. 천안 쪽에서 온양 시내로 들어가 SK주유소건너편 오른쪽 골목안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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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 |
○ 교통편
①외암마을 : 아산터미널 건너편(또는 온양역)에서 강당골행 버스가 하루 7회 운행. 20분마다 다니는 송악행을 타면 송남초등학교서 내려 6∼7분 걷는다.
②맹씨행단 : 같은 곳에서 수철리행 16회.중리보건지소 앞 하차(온양교통 041-544-5143).
③ 추사고택 : 신례원에서 12회(매표소 041-334-2370).예산터미널에서 8회(예산교통 041-332-7495). |
권상호
1976년 1월 8일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의 고택이다. 원래는 99칸집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면적 265㎡ 가량이며 안채와 사랑채·문간채·사당채가 있다. 동쪽에 사랑채를, 서쪽에 안채를 배치하되 안채 대청의 방향은 다른 고택들과는 달리 동향이고 사랑채는 남향이다. 안채는 6칸 대청과 2칸의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부엌과 안대문·협문·광 등을 갖춘 ㅁ자형의 집이다. 이러한 ㅁ자형 가옥은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된 이른바 대갓집 형태이다.
안방 및 건넌방 밖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의 천장은 다락으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ㄱ자로 되어 별당채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지붕은 긴 홑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지형에 따라 기단의 높낮이가 생긴 곳에서는 맞배지붕으로 층을 지게 처리하였다. 사랑채의 함실 부분에도 맞배지붕에 이어붙인 지붕이 기능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고택은 영조의 부마이며 선생의 증조부인 김한신(金漢藎)이 건립한 18세기 중엽의 건축물로서 당시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이다. 후손이 세거(世居)해 오다가 1968년 타인에게 매도된 것을 충청남도에서 1976년 문화재로 지정하고 동년 4월 25일 매수하였다. 집 안에 있는 김정희의 영정과 도장, 염주, 붓과 벼루 등은 일괄 보물 제547호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으며, 고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그가 어려서 공부했던 절 화암사가 있다.
고택의 오른쪽 담장에 달린 쪽문을 나서면 대대로 마셔온 석정(石井)이 있고, 거기서 100m쯤 가면 김정희묘(문화재자료 188)가 있다. 방마다 모사품이기는 하나 선생의 유묵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