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35
대한민국의 겨울나기
병신년 달력도 마지막 잎새처럼 한 장만 달랑 매달려 있다. 전 국민이 그토록 믿고 의지해 왔던 대통령에 대한 불신(不信)의 그늘이 길게 드리우고 있어, 더욱 답답하고 서글픈 겨울을 보내고 있다. 모두가 북방의 겨울나무처럼 실낱같은 한 줄기 햇살에도 발돋움하며, 온몸을 파르르 떨고 있다. 내 곁에 그림자가 붙어있음은 살아있다는 증거인 줄 알기에 오늘도 칼바람에 몸을 맡기고 우두커니 서 있다. 내리는 눈마저 냉정함을 잃고 땅에서 쉴 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잔바람에 정처 없이 휩쓸려 다닌다. 그나마 한눈판 사이 광화문광장의 눈은 눈물로 증발하고 말았다. 눈:물인가, 눈물인가?
박근혜와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초래한 탄핵 정국 속에, 어딜 가나 행인들의 표정은 대숲을 스치는 겨울바람처럼 차갑고 우울하다. 외로움을 달래고자 찾은 송년회(送年會)는 저 혼자 미리 와서 외로움을 타고 있었다. 다들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사람처럼 시종일관 굳은 표정에 웃어야 할 대목에서도 웃음 근육은 이미 굳어 있었다. 정녕코 병신년은 ‘망년(亡年)’인가?
일본에서 주로 사용하는 ‘망년회(忘年會)’라는 말은 나이를 잊고, 그해의 온갖 괴로움을 잊고자 하는 좋은 뜻에서 ‘잊을 망(忘)’ 자를 쓴다. 우리는 이에 ‘잊을 망(忘)’ 자 대신에, 애써 ‘바랄 망(望)’ 자 ‘망년회(望年會)’라 고쳐 부르며 비전과 희망을 나누는 자리로 만들곤 한다.
지난밤엔 지우(知友)들과 오늘 저녁엔 문화예술인들과 함께한 송년회 자리가 있었다. 송년회에서의 유일한 희망은 그나마 건배사였다.
올해는 북한의 잦은 미사일 발사로 ‘미사일/발사’ 건배사가 인기를 끌었다. 촛불집회에 맞불집회가 있듯이, 북의 미사일 발사에 남의 미사일 대응이었다. ‘미- 미래를 위해, 사- 사랑을 위해, 일- 일을 위해, 미사일!’이라고 선창하면, 다 같이 ‘발사!’라고 후창을 했다.
풀이를 달리하는 건배사도 있었다. 가장 전통적 건배사는 ‘위하여’인데, 오늘은 이를 새롭게 풀이하여 ‘위- 위기를 만나도, 하- 하하 웃으며, 여- 여유롭게 살자!’ 또는 ‘위- 위기는 기회다. 하- 하면 된다. 여-여러분과 함께라면!’과 같은 방식으로 이어나갔다.
‘비행기’ 건배사도 인상적이었다. ‘비- 비전을 갖고, 행- 행동하면, 기- 기적이 일어난다’라는 의미로, ‘썩소’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밝소’ 분위기로 바꿔주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강원도에는 대설특보가 중북부에는 한파 주의보가 내려졌다. 양양의 눈 소식을 사진으로 보내온 친구도 있었다. 필자가 한시(漢詩)를 좋아하다가 보니 한시 작가로부터 가끔 시의적절한 한시를 카톡으로 받기도 한다. 현암 선생이 보낸 한시 두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시에는 음악이 빠질 수 없다. 배경음악으로는 이수인 작곡, 김재호 작시의 ‘고향의 노래’를 선택했다. ‘고향길 눈 속에선 꽃 등불이 타겠네~ 고향 집 싸리울엔 함박눈이 쌓이네~’
조선 후기 문신인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 선생의 시 ‘그냥 써 보네’(漫成) 2수 중 첫수이다.
어떤 일 닥쳐선 지난 일 부끄럽고
올해엔 지난해가 후회스럽다오.
뜬금없이 갈림길 위에 서 있자니
세월은 얼마나 더 옮겨 갈는지.
(卽事羞前事 今年悔往年 無端岐路上 歲月幾推遷)
지금 이 시를 읽으면 몇몇 사람이 연상된다. 제발 부끄러움과 후회스러움을 깨닫기 바라는 마음에서다. 생각하고 또 고쳐 생각해 보지만 지난 일은 부끄럽고 지난해는 후회투성이이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하고 괜스레 서성이다가, 하릴없이 세월만 또 흘려보낸 건 아닌지...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 선생의 시 ‘눈 내리는 밤 홀로 앉아’(雪夜獨坐)이다.
부서진 집 찬바람 스며들고
빈 뜨락엔 흰 눈만 쌓인다오.
근심하는 마음은 등잔불과 함께
이 밤사 모두 재가 된다오.
(破屋凄風入 空庭白雪堆 愁心與燈火 此夜共成灰)
무너져 가는 집에 스며드는 찬바람과 빈 뜰에 쌓이는 하얀 눈. 이 대목에서 대한민국의 현 상황이 오버랩되어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한다. 우리의 수심은 저 촛불과 함께 이 밤에 모두 재가 되는 건 아닌지...
계절을 가리키는 말 속에는 계절의 순환 원리가 담겨있어 신비롭다. 볼 게 많은 봄, 열매 맺는 여름, 가꾼 곡식 거두어 가둬 두는 가을, 겨우 살아가는 힘겨운 겨울. 지금은 순환하는 계절 속에서 대설(大雪)을 지나 동지(冬至)를 향하고 있다.
순간 심기일전하여 묘법자연(妙法自然)이란 말을 붓으로 써 본다. 불교에서 오묘하고 신기한 법문을 일러 묘법(妙法)이라 한다. 묘법자연은 평소 생각지 못한 기묘한 아이디어를 자연에서 얻었을 때 이르는 말이다.
원래 계절을 뜻하는 한자로는 ‘봄 춘(春)’과 ‘가을 추(秋)’가 전부였다. ‘여름 하(夏)’는 ‘키 크고 건장한 사람이 두 손을 양 허리에 얹고 있는 모습’에서, ‘겨울 동(冬)’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지붕의 양 끝을 꽁꽁 묶어 놓은 모습’에서 비롯했다. 동(冬) 자의 점 두 개는 ‘얼음’의 상형으로 겨울을 분명히 밝히기 위하여 소전(小篆)에 와서 덧붙인 것이다.
겨울을 뜻하는 한자는 ‘겨울 동(冬)’이다. ‘동’이란 발음이 중요하다. 겨울에 얼어 죽지 않으려면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움직이다’의 뜻에 해당하는 한자도 ‘움직일 동(動)’이다. 추우면 발을 ‘동동’ 구른다. ‘얼다’는 뜻의 한자는 동파(凍破)·냉동(冷凍)이라 할 때의 ‘얼 동(凍)’ 자로 역시 발음이 같다. 동절(冬節)이면 ‘동무’ 만나 ‘동동주’를 나누고 싶다. 취하면 시원한 ‘동치미’로 속을 달래면 그것뿐. 날씨가 추우면 원시인은 ‘동굴 동(洞)’ 자 ‘동굴(洞窟)’ 속으로 들어가고, 현대인은 ‘마을 동(洞)’ 자 본동(本洞)으로 돌아온다. 그러고 보니 마을의 원조는 동굴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얼음에 해당하는 한자는 ‘얼음 빙(氷)’이다. 얼음 위에서는 누구나 썰매나 스케이트로 얼음을 지치며 ‘빙빙’ 돈다.
눈에 해당하는 한자는 ‘눈 설(雪)’이다. 눈 위에서는 사람이든 차든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설설’ 기게 마련이다.
눈 내리는 겨울밤, 가마솥에서 소죽이 ‘설설’ 끓고 나면, 온돌방 아랫목도 ‘설설’ 끓기 시작한다. 온 가족은 ‘한마음’ 되어 부챗살처럼 이불 속으로 발을 쑥 들이민다. 온종일 고단하게 일하신 부모님은 금세 잠이 들지만, 조무래기들은 서로 밀치며 한참 동안 이불 속에서 소곤거리며 장난치다가 오줌 누고 잠을 자도, 또 오줌을 싸곤 했다.
첫눈 내리는 날, 눈부신 미소에 반해 첫눈에 들었던 그가 꿈속에 나타났다. 반가움도 잠시, TV는 밤늦도록 잠들지 않고 청문회 중계방송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라꼴이 황소 얼음판 걷듯 하니 영 불안하다. 더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긴 겨울을 어떻게 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