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성탄절(聖誕節)에 생각하는 외교(外交)와 내치(內治)


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36
성탄절(聖誕節)에 생각하는 외교(外交)와 내치(內治)

 

메리 크리스마스, 코리아!
올해엔 특별히 조국에 안부를 여쭙고 싶다. 조국이 자연적으로는 지진과 태풍 등의 상처를 크게 입었고, 인간적으로는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이라는 해괴망측한 사태를 겪었기 때문이다.    국정농단이 부른 탄핵 정국에 맞이하는 성탄은 ‘성스러운 탄핵’의 준말처럼 다가온다. 온 국민이 그 어느 때보다 우울한 기분으로 연말연시를 맞이하고 있지만, 마침 크리스마스이브가 토요일이고 성탄절과 신정이 나란히 일요일이니, 아직 꺼지지 않은 애국의 촛불로 희망의 새해를 준비하자.
대한민국의 아픔을 하늘도 아는지, 대설(大雪)도 지난 동지(冬至)에 예년에 볼 수 없었던 찬비가 밤새도록 한반도를 적시고 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태복음 1장 21절 말씀이다. 죄와 절망과 실의로 가득한 이 땅에 탄핵 심판과 개헌이 진중하게 잘 이루어져 복된 나라에 선비다운 대통령이 임하기를 기도해 본다. 
“거짓말이라곤 모르는 정직한 소통의 대통령,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할 줄 아는 정감이 가는 대통령, 부끄러운 일에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인간미 넘치는 대통령, 정의롭고 공평한 호혜의 대통령, 연습으로 굳어진 미소가 아니라 가끔은 함박웃음을 선사할 줄 아는 유머 대통령, 무엇보다 민심(民心)을 천심(天心)으로 아는 대통령이 이 땅에 임하소서... 그러나 소수 집권에 의한 권위주의적 대통령이여, 고집불통의 꽉 막힌 대통령이여, 이젠 안녕!”
성탄(聖誕)이라고 할 때의 ‘태어날 탄(誕)’ 자는 탄생(誕生), 탄신(誕辰)에서 보듯이 성인이나 귀인이 태어남을 높여서 이르는 말이다. 의미가 확대되어 ‘문명의 탄생’ ‘새로운 정권의 탄생’에서처럼 사람이 아닌 제도나 조직 등의 출현에도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탄(誕) 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 글자 안에는 ‘끌 연(延)’ 자가 들어있다. 연(延)은 갑골문에서 ‘천천히 걸어가다’ 또는 ‘멀리 가다’의 뜻이었다. 소전에 와서는 연장(延長)처럼 ‘시간이나 길이를 길게 늘이다’라는 의미로 발전했다. 그렇다면 ‘탄(誕)’의 뜻은 ‘말을 길게 늘어놓다’에서 ‘말씀이 오래 전해지는 성인의 탄생’의 의미로 확대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의 말씀은 탄(誕) 자의 탄생 배경과 상통한다. 마치 창세기를 읽는 듯한 분위기인데, 삼위 가운데 한 분인 예수가 ‘말씀’으로 하나님을 선포하러 온 것이다.
탄핵(彈劾)이라고 할 때의 ‘탄알 탄(彈)’ 자의 갑골문은 활시위에 돌멩이 하나가 놓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새총의 원조가 탄(彈) 자라는 생각이 든다. 소전에 오면 돌멩이 하나가 ‘홑 단(單)’ 자처럼 복잡하게 바뀌어 지금의 탄(彈) 자로 완성된다. ‘싸움 전(戰)’를 보면 단(單)은 사냥도구에서 전쟁 도구로 발전한다. 현악기의 줄을 퉁기는 것을 탄현(彈絃), 갓의 먼지를 떠는 것을 탄관(彈冠)이라 하는 걸 보면, 탄(彈)이 ‘퉁기다’의 의미까지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내년은 정유년(丁酉年) 닭띠 해로,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난 지 7주갑(420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 그런지 정치, 경제와 같은 국내 문제는 물론 북핵과 사드 배치 등으로 야기된 외교적 파장도 만만치 않다.
대만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미국과 중국의 외교적 마찰은 우리에게도 커다란 근심으로 남아있다. 사드를 둘러싼 작금의 형국을 보면 마치 고려 말의 친원파와 친명파 사이의 갈등처럼 비화할 조짐이 보인다. 그러면 소위 망징패조(亡徵敗兆)가 드는 것이다.
구한말로 지칭되는, 조선 말기로부터 대한제국 때까지 청(淸)과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 틈바구니에서 ‘어느 나라에 줄을 댈 것이냐’라는 고민도 지금의 국론 분열 상황과 비슷하다. 해방 직후 유행했던 참요(讖謠)가 있다.

미국이라 믿지 말고
소련이라 속지 마소
일본 사람 일어난다
조선 사람 조심하소.

이처럼 미래에 일어날 징후를 암시하는 민간 노래를 참요라 한다. 이를테면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건국을 암시한 '계림요(鷄林謠)', 조선의 건국을 암시한 '목자요(木子謠)' 등이 참요에 해당한다.
이 노래는 언어유희 속에서도 시대 상황과 국제 정세를 절묘하게 읽어 내고 있다. 주변 강대국을 항상 조심하라는 뜻이렷다. 아니나 다를까 광복 직후 우리 민족은 신탁 통치를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양분되어 결국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뼈아픈 경험을 했다. 1945년 12월 미·영·소 삼국의 외상이 모스크바 삼상회의(Moskva 三相會議)에서 내린 결정으로 일어난 찬탁·반탁 논쟁은 한국인들에게 극심한 좌우 대립을 불러일으켰고, 끝내는 미국과 소련을 양축으로 한 냉전의 심화와 함께 민족분단의 불행한 결말로 남았다. 남북으로 갈라진 지금은 남북 갈등만큼이나 남남 갈등의 뿌리도 깊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
좋다.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달라서 갑론을박으로 토론하며 며칠 밤을 새워도 좋다. 4당이 아니라 8당 체제라도 좋다. 당론이 사분오열해도 괜찮다. 다만 끝장 토론으로 결론을 이끌어내면 더는 시비하지 말고 결정된 국론을 모두가 따라야 한다.
이스라엘 도서관처럼 시끌벅적한, 토론 국회는 오히려 자랑스럽다. 문제는 한번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지 말라는 것이다. 특히 외교적 사안에 대해서는 정권이 바뀌더라도 지속하여야 한다. 이는 국가신뢰도 문제이다. 
우리는 미국과의 정치적 군사적 혈맹 관계, 중국과의 경제적 정서적 우의 관계, 일본과의 피할 수 없는 애증 관계 등을 깨끗하게 인정해야 한다. 현실 수용이 외교의 출발점이다. 수용을 바탕으로 심사숙고하고 난상토론을 거친 뒤에 조심스레 외교를 펼쳐도 늦지 않다. 외교의 뿌리가 깊은 생각이라면 외교의 열매는 국론의 통일이다.
‘외교(外交)’라고 할 때의 ‘바깥 외(外)’ 자에는, 뜨는 달의 모습인 ‘저녁 석(夕)’ 자가 들어있다. 이는 ‘외교란 밤길을 걷듯이 조심하라’라는 뜻이렷다. 또 ‘점 복(卜)’ 자가 들어있음은 ‘외교상 합의의 어려움’을 시사하고 있다. 얼마나 어려우면 점괘를 봐야 할까.
외교의 ‘사귈 교(交)’ 자는 ‘다리를 꼬고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남에게 잘 드러나는 팔 대신에 책상 밑에 숨겨진 다리로 은밀한 외교를 펼치라는 뜻으로 본다. 1992년 8월, 죽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중국과의 깜짝 수교는 사전에 충분한 물밑 접촉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외교와는 반대로 내치(內治)는 신속하게 대응해야 한다. 조류인플루엔자(AI)나 세월호 침몰과 같은 내치는 조속히 대응해야 했다. 그러나 개성공단 폐쇄나 사드 배치 문제, 독도 영유권 분쟁이나 위안부 합의 등과 같이 외교적 이해가 부딪히는 사안은 좀 더 여유롭고 신중하게 대응했어야 옳았다.
외교는 빨리 가기보다는 정확한 방향이 중요하다. 외교에서 신중 외에 가장 확실한 대응 전략은 우리 스스로 힘을 기르는 일이다. 박 대통령 탄핵심판으로 자칫 외교 혼란이나 외교 공백이 생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대통령이 손을 뗀 지금이 외교관으로서 뛰어난 판단력을 보여줄 수 있는 ‘소신 외교’ 적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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