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44
과잉시대(過剩時代) 적정인생(適正人生)
내가 사는 곳은 30여 년 전만 해도 까치와 노루가 사랑하고 놀던 야산 자락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인간의 독무대로 변해버렸다. 인간의 욕심이 지나쳤나. 본래 이곳에 터 잡고 살던 동식물에게 미안하다.
옷장에는 입지 않는 옷으로 넘쳐나고, 찬장에는 사용하지 않는 그릇이 그득하며, 서재에는 읽은 책보다 읽지 못한 책들이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신발장에는 어둠 속에 갇혀 지내는 몇 켤레의 묵은 신들이 삭고 있다. 냉장고에도 아끼다가 잊어버린 식자재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필자의 경우 서예 활동을 하므로, 숱한 전시 끝에 선택받지 못한 많은 액자와 족자들이 방 한 칸을 옹글게 차지하고 있다. 못난 글씨는 앞으로도 영원히 벽에 한 번 더 걸려 보지 못할 제 운명을 아는지 저희끼리 불안에 떨며 나란히 붙어있다. 주차장에는 한낮에도 출근하지 못한 많은 자동차가 졸고 있다. 답답한 마음에 차를 몰고 거리를 나가보면, 그곳에는 더 많은 차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의 매연을 탓하며 허덕이고 있다.
경제 성장에 따라 외식 횟수가 늘어난다고는 하지만, 거리마다 어인 식당은 또 그렇게 많은지. 순간 우리는 ‘잉여시대(剩餘時代)’를 지나 ‘과잉시대(過剩時代)’를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회탄이 쏟아진다.
따지고 보면 물질만의 과잉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도 과잉시대를 맞고 있다. 이른바 정보의 홍수 속에 생각의 선은 끊어지고, 단편적이고 단절된 정보들만이 끓어 넘치고 있다.
검증된 정보의 전달 장소인 교실은 어떠한가.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모든 학생은 정보의 궁핍 속에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선생님의 말씀을 경전이라 생각하며 잘 들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생들은 자리에 앉아있기는 하나, 십인십색(十人十色)의 공부에 천차만별(千差萬別)의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수업이 제대로 진행될 리 만무하다. ‘거꾸로 교실’과 같은 새로운 모델이 제시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교육은 특별한 대안 없이 ‘개혁’의 목소리만 무성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SNS에 의한 과잉 정보가 교실을 무기력하게 만들 듯이, 영양의 과잉공급에 의한 비만은 몸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각종 암을 유발한다고 전한다. 교육에서는 자신의 수준과 취향에 맞는 정보의 질 선택이, 건강에서는 자신의 건강에 좋은 영양 선택과 적정량 섭취가 문제가 된다.
서양 중심의 산업혁명 이후에, 선진국을 중심으로 인간은 ‘부족시대(不足時代)’에서 ‘과잉시대(過剩時代)’로 직행했다. 당연히 그 중간에 ‘적정시대(適正時代)’가 있어야 마땅하겠지만,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철학적 인식 부족으로 적정시대 없이, 부족시대에서 곧바로 과잉시대로 넘어갔다. 과잉 시대가 낳은 결과로는 기후변화와 환경파괴, 물과 공기의 오염 등을 들 수 있다. 인간의 과욕이 하나밖에 없는 지구를 크게 망가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미 많이 늦었다. 일각에서는 아직도 개발과 성장의 논리로 하나뿐인 ‘푸른 별(Blue planet)’의 숨통을 끊고 있다.
다행히 동양인은 일찍이 자연과의 공생 가치를 깨닫고 자연의 일부로 살아왔다. 그러나 뒤늦게 서양 중심 세계관에 사로잡혀 서양을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우리는 잊어버린 ‘적정시대’를 찾아야 한다. 이것이 지구와 인간의 공생길이다. ‘자본주의(資本主義)’는 말 그대로 오직 재물(資)을 근본(本)으로 삼기 때문에, 더 많은 생산을 통한 이익추구가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본주의를 버리고, 적절한(適) 것을 근본(本)으로 삼는 ‘적본주의(適本主義)’로 나아가야 한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면 알맞고 바른 선택, 곧 적정(適正)한 선택을 해야 한다. 부족도 좋지 않지만, 과잉보다는 낫다.
적정가격, 적정인구, 적정규모, 적정수준, 적정생산, 적정소비, 적정지출, 적정수면, 적정생활, 적정평가, 적정성장... 이상에서 보듯이 적정은 이미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적(適)’에는 ‘맞다, 가다’의 두 가지 뜻이 있다. 이는 아무 데나 갈 것이 아니라, 알맞은 곳으로 가라는 의미가 깔려 있다.
우리는 앞으로 적정을 통한 행복 추구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고,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위해 적정한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축복이다.
적본주의의 성공을 위해서는 공동체 의식의 회복이 시급한 과제이다. 공동체 의식의 회복을 위해서는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지구 환경을 위해서는 과잉시대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적정한 삶의 추구와 나눔의 미덕을 실천해야 한다.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도 맹목적으로 따를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그리고 지구를 중심에 두고 신중하게 재검토해 봐야 한다. 만약 4차 산업혁명이 진정한 살길이라 믿는다면, 인류 역사에서 1, 2차 산업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했던 우리가, 그나마 3차 산업에서 앞서간 경험을 바탕으로, 4차 산업혁명에서는 글로벌 리더가 되어야 한다.
어제 신라호텔에서 국내 기업과 러시아 기업 간의 워크숍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서예 퍼포먼스 ‘라이브 서예’를 펼쳤다. 주제 선정으로 고심을 했는데 처음에는 ‘무신불립(無信不立)’으로 정했다가 나중에 ‘동주공제(同舟共濟)’로 바꾸었다. ‘무신불립’은 ‘신의가 없으면 함께 설 수 없다’는 뜻으로 신의를 강조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이제 갓 친교를 시작하는 마당에, 글의 의미가 너무 절박하게 다가온다. 그리하여 공동체 의식을 갖고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를 바라는 뜻에서 ‘동주공제’를 최종 테마로 결정했다. ‘한마음 한뜻으로 같은 배를 타고, 함께 강을 건너자’라는 뜻이다. 어떠한 질풍과 노도가 오더라도 힘을 모아 헤치고 나아가자는 뜻을 살리기 위해, 온힘을 다해 노를 젓듯이 써 내려갔다.
그런데 작금의 우리 정치와 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대통령 탄핵심판을 앞두고 동주공제가 아니라 ‘이주별제(異舟別濟)’가 아니던가. 무서운 생각이지만 서로 다른 배를 타고 따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물론 주말마다 거행되고 있는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집회가 특별한 충돌 없이, 뒤처리까지 깨끗하게 마무리하는 걸 보면, 성숙된 국민의식에 안심이 되고 또 갈채까지 보내고 싶다.
그리고 헌재 결정 뒤에도 서로 간의 이해와 수용의 아름다운 자세를 전 세계에 보여야 한다. 우리는 위기에 더욱 강해지는 DNA를 가진 민족으로, 앞으로 글로벌 뉴리더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번 기회에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지금 우리는 과잉시대 살고 있다. 잉여라면 그나마 여유 있어 보인다. 잉여가 지나치면 과잉이 된다. 과잉생산, 과잉공급, 과잉진료, 과잉근심 등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과잉시대 부산물로 쇼핑홀릭(shopping holic)과 스톡홀릭(stockholic)도 생겨났다. 과잉시대의 가르침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분수 이상의 ‘대박’만 쫓으면 ‘쪽박’ 차게 된다.
이번 주말에는 정리, 정돈을 통하여 불필요한 것은 떨쳐내고, 소중한 것은 집중을 위해 꼭 두어야 할 자리에 두리라. 심플한 생활 속에, 기분 좋은 일에 열정을 쏟으리라.